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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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해가 저물어도 그 빛은 키 큰 나무 우듬지에 걸려 있듯, 꿈은 끝나도 마음은 오랫동안 그 주위를 서성거릴 수밖에 없는 법이다.-32~33쪽

학생들이 죽어갈 때마다 사람들은 그건 노태우 정권의 공안통치가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라고 떠들어댔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 역시 누구보다도 큰 목소리로 손을 흔들어가며 외쳤다. 누구라도 죽을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들이 죽은 것이라고. 하지만 그런 필연적인 결과에 비하면 내가 살아남은 건 너무나 우연에 가까웠다. 그 죽음이 필연이라고 떠들어대면 떠들어댈수록 내 삶은 점점 더 우연에 가까워졌다. 그렇게 가장 먼저 삶과 죽음이 서로 그 자리를 바꿨고, 그 다음에는 정의와 불의가, 진실과 거짓이, 꿈과 현실이 서로 뒤엉키기 시작했다.-121~122쪽

누군가 인도의 시인이었던 카비르에게 물었다. 이름이 뭐냐? 카비르. 신분이 뭐냐? 카비르. 직업이 뭐냐? 카비르. 나는 이 세 번의 카비르라는 대답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150~151쪽

그 사람(카비르)은 이런 말도 했다고 해. '내게 조국은 하나뿐입니다, 선생님. 나 자신이죠.'-162쪽

차이코프스키 교향곡 제4번의 세계란? 패배하는 것은 언제나 인간일 뿐, 운명은 결코 패배하지 않으니 꿈처럼 지나가는 비극의 삶에서 살아남겠다면 먼저 웃으라는, 쓸쓸한 목관과 유머러스한 현악의 전언.-220쪽

나는 생각했다. 그런 유의 사랑이란 누구에게든, 어떤 식으로든 연민을 배설해야만 견딜 수 있는 시대의 소산에 불과한 것이라고.-314쪽

섭동에 대한 문장도 그때 외웠다. 별들의 집단 내에서 각 별들은 중심 주위를 돌게 되는데, 이런 운동을 일으키는 주된 힘은 집단 전체의 중력이다. 그러나 별들은 가까이 지나는 다른 별들로부터 계속 인력을 받는다. 이떄 두 천체가 서로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을 충돌이라 하고, 진행경로를 바꾸면서 서로 비켜가는 경우를 조우라고 한다. 조우가 일어날 때는 섭동을 통해 서로간에 에너지의 주고받음이 일어나고, 이에 따라 진행경로와 속도가 변하게 된다. 그게 바로 섭동이다. 천왕성의 경로가 불규칙한 까닭은 그 근처에 있는 다른 행성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352쪽

나는 멍하니 점점 더 붉어지고, 점점 더 커져가는 그 빛을 바라보다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말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그 말을, 이제 막 말을 배우는 아이처럼, 더듬더듬 중얼거렸다. 잘 가. 안녕. 나는 손을 들어 흔들면서 또 한번 중얼거렸다. 안녕이라고.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1991년 10월 어느 날 해질 무렵, 나는 한때 내가 살았던 어떤 뜨거운 시절에게 작별인사를 던진 것이라고.-389쪽

우리 눈을 못 뜨게 하면서 감각은 한 무리의 새떼처럼 그 여인의 눈부심 속에서 펄럭이며 날아오른다. 잎이 무성한 나무에서 숨을 곳을 찾는 새들처럼. 그렇게 저 감각들은 안전하게 자신을 숨길 수 있는 그늘진 주름살 속으로, 매력 없는 행동과 사랑받는 육체의 드러나지 않는 흠들 속으로 달아나는 것이다. 그 곁을 지나가는 그 누구도 이 결점들, 이 흠들 속에 덧없는 사랑에의 동요가 둥지를 틀고 있다는 걸 알아채지 못한다.-39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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