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 보면 반 평 정도 되는 보잘것없는 가지밭이 무슨 실수처럼 나타나곤 하였지만,-12쪽
더 기묘한 것은 에노시마 해변에 있는 모래든 고비 사막에 있는 모래든, 그 알갱이의 크기는 거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1/8mm 크기를 중심으로 거의 가우스의 오차곡선에 가까운 커브를 그리며 분포되어 있다고 한다. 어떤 해설서는 풍화와 물의 침식 작용에 의해 분해된 흙이, 아주 단순하게, 가벼운 것부터 먼저 날려간 결과라고 설명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설명으로는 직경 1/8mm가 지니는 특별한 의미는 해명되지 않는다. 그 점에 대해 다른 지질학 서적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덧붙여 있었다.
물이든 공기든 모든 흐름은 난류를 일으킨다. 이 난류의 최소 파장이 사막에 이는 모래의 직경과 거의 비슷하다. 그 특성 때문에 흙 속에서 모래만 선별되어 흐름과 직각 방향으로 날아간다. 흙의 결합력이 약하면, 돌은 물론이요 점토도 날지 못할 미풍이 불어도 모래는 일단 날아올랐다가 다시 낙하하면서 바람을 따라 이동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래도 모래의 특성은 오로지 유체역학에 속하는 문제인 것 같았다. 거기에다 다음과 같은 정의를 덧붙이면-
......덧붙여, 암석 파편 중에서 유체에 의해 가장 멀리 이동될 수 있는 크기의 입자.-18-19쪽
모래의 불모성은 흔히 말하듯 건조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끊임없는 흐름으로 인해 어떤 생물도 일체 받아들이지 못하는 점에 있는 것 같았다.-20쪽
그 위에서 태양이 날카로운 바늘 끝을 다발로 묶은 듯한 빛을 하늘 가득 흩뿌리고 있었다.-21쪽
평균 1/8mm란 것 외에는 형태조차 제대로 갖고 있지 않은 모래...... 그러나 이 무형의 파괴력에 대항할 수 있는 것은 무엇 하나 없다...... 어쩌면, 형태를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힘의 절대적 표현이 아닐까......-36쪽
벌이란, 죄값을 치렀다고 인정하는 행위나 다름없으니까.-55쪽
의사태발작(擬死態發作)이란 말이 있다. 어떤 유의 곤충이나 거미가 불의의 습격을 받았을 때 보이는 마비 상태다. 붕괴된 화상(畵像), 미친 인간에게 관제탑을 점거당한 비행장. 겨울잠을 자는 개구리에게 겨울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가능한 일이라면 자신의 정지가 세계의 움직임까지 정지시켜 버렸다고 믿고 싶었다.-57쪽
짐승 같은 여자...... 어제도 내일도 없는, 점 같은 마음...... 타인을, 칠판 위의 분필 자국처럼 깨끗하게 지워버릴 수 있다고 믿는 세계...... -70쪽
그들에게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자기를 쓰레기 같은 존재라 여기고 고독한 자학 취미에 빠지든지 아니면 타인의 일탈을 고발하는, 의심 많은 도덕군자가 된다. 자유로운 행동을 동경하는 나머지 자유로운 행동을 증오하지 않을 수 없다...... -78쪽
진심으로 걱정을 하고 있는지 어쩐지는 의심스럽지만, 적어도 구경꾼적인 호기심만큼은 계절이 지나도록 가지 끝에 매달려 있는 감처럼 빨갛게 익었을 것이다.-79쪽
그것은 잿빛 일상에 피부색까지 물들어 가고 있는 그들을 약올리기에는 더없이 유효한 방법이었다. 회색 종족은 자기 이외의 인간이, 빨강이든 파랑이든 초록이든, 회색 이외의 색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진다.-95쪽
4홉들이 병을 가슴에 꼭 껴안고, 빌린 물건처럼 멀게 느껴지는 정강이에 간신히 중심을 옮기면서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집으로 돌아갔다.-112쪽
무수한 화석층을 쌓아가며 극복해 온 인류의 경련...... 다이노이아의 어금니도, 빙하의 벽도, 절규하고 미쳐 날뛰며 전진하는 이 생식이란 추진기의 앞길을 막지 못했다...... 마침내 몸을 푸르르 떨면서 쥐어짜내는, 정자들이 쏘아올리는 폭죽...... 끝없는 어둠을 통과하여 용솟음치는 유성군...... 녹슨 오렌지색 별...... 거품들의 합창......-138쪽
서랍장 뒤에서, 시큼하게 썩은 낡은 걸레...... 후회란 먼지를 덮어쓰고 돌아가는, 경륜장 앞 큰 길...... 결국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끝나지 않았다. 욕망을 채운 것은 그가 아니라, 그의 육체를 빌린 전혀 별개의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성이란 원래, 개개의 육체가 아니라 종의 관할 하에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자기 역할을 끝낸 개체는 재빨리 자기의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행복한 것만이 충족으로...... 슬퍼하는 것은 절망으로...... 죽어가고 있는 것은 죽음의 자리로...... 이런 속임수를 야성의 사랑이니 뭐니 하고 뻔뻔스럽게 잘도 갖다 붙였다...... 정액권용 성과 비교하여, 과연 어딘가에 쓸모있는 점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 이럴줄 알았으면 차라리 유리로 된 금욕주의자가 되는 편이 그나마 나았으리라.-138-139쪽
물에 떨어뜨린 먹물처럼, 탁한 피로가 고리가 되어, 해파리가 되어, 술 달린 조화(造花)가 되어, 원자핵의 모형도가 되어, 배어든다. 들쥐를 발견한 밤새가 불길한 소리를 내며 동료들을 부르고 있다. 위를 토해 내는, 불안한 개. 높은 밤하늘에서 울어대는 서로 속도가 다른 바람의 마찰음. 지상에서는 한 겹 한 겹 모래의 박피를 벗겨내며 흐르는 바람의 나이프. 땀을 닦고, 코를 풀고, 머리에 쌓인 모래를 털어냈다. 발치에 그려져 있는 바람 무늬는,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춘 파도 머리를 닮아 있다.-155쪽
고독은 환영을 좇기에 충족되지 않는 갈증이었던 것이다.-203쪽
인내란 딱히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인내를 패배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시작되는 것이리라. 애당초 <희망>이란 이름도 그 정도 생각으로 붙인 것이다.-20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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