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사는 스님이 달빛을 탐내 달빛까지 물병에다 뜨고 있구나 절에 가선 바야흐로 깨달으리라 병 기울면 달빛조차 간 데 없음을 -이규보, <산중의 밤에 우물에 뜬 달을 읊다>
남용익에게서 '동국 문학의 종장'이라는 찬사를 들은 그는 고려시대, 나아가 한국 문학사를 대표하는 문호이다. 우주까지 삼킬 듯한 상상력에 거침없이 흘러가는 도도한 문장력이 더해진 아주 호방한 작풍이 특징이다.-166-167쪽
역사상 남의 불우함을 위로하는 편지는 많이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을 위로하느라 하늘에 있는 선인의 입을 빌리는 그의 재치는 풍부한 상상력의 발현이 아니고 무엇일까? 이규보는 돌과도 문답을 나누고, 자기 마음과 대화를 주고받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자기를 벗어나 남의 마음과 목소리까지 빌려 표현한 작가였으므로, 이러한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170쪽
편지가 마침 도착하여 뜯어보고 한바탕 웃었습니다. 마음속에 그리던 사람이 이렇게 이르렀으니 무엇으로 보답할까요? 창 모서리에 뜬 봄별을 오이처럼 따다가 답장편지 속에 넣어 바로 보내고 싶습니다. 편지를 통해 노형께서 새해를 맞아 기쁜 일이 많아졌음을 알고 위안을 받았습니다. 노형의 불우함을 생각하면 언제나 한숨이 터져 나올 것만 같습니다. 허나 진평처럼 아름다운 분이 끝까지 곤궁하게 살 리 있을까요? 객지의 제 형편은 달리 말씀드릴 게 없군요. 쓸데없이 크기만 한 칠척 몸뚱어리가 달팽이 껍질 같은 초가집 안에 웅크린 채 처박혀 있어 침침한 벽 기우뚱한 기둥이 제가 기지개를 펴면 삐걱삐걱 금새 무너질 것 같다는 점만 말씀드리지요. -조희룡의 편지-175쪽
공교롭고도 오묘하지요. 이다지도 인연이 딱 들어맞다니! 누가 그런 기회를 만들었을까요? 그대가 나보다 먼저 태어나지 않고, 내가 그대보다 늦게 태어나지 않아 한세상을 살게 되었지요. 또 그대가 얼굴에 칼자국 내는 흉노족이 아니요, 내가 이마에 문신하는 남만 사람이 아니라 한나라에 같이 태어났지요. 그대가 남쪽에 살지 않고 내가 북쪽에 살지 않아 한마음에 같이 살고, 그대가 무인이 아니고 내가 농사꾼이 아니라 함께 선비가 되었지요. 이야말로 크나큰 인연이요 크나큰 만남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상대의 비위를 맞추는 말을 구차하게 해야하거나, 억지로 상대의 행동을 똑같이 따라해야 한다면, 차라리 천 년 전 옛사람을 친구로 삼든가 일백 세대 뒤에 태어난 사람과 마음이 통하기를 기다리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박지원, <경보에게>-232쪽
제가 쓴 <도산기>와 <도산잡영>이 그대의 책상 위에까지 올라갔다고 하니 너무도 땀이 나고 송구스럽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본래 지어서는 안 되지요. 산에 사는 사람에게 아무 일이 없다 보니 그저 필묵으로 장난을 치며 즐긴 것뿐입니다. 글상자에 감춰두고 아이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뜻을 같이 하는 벗 여럿이 멀리서 나를 찾아와 사흘 밤을 자고 갈 때 선물할 것이 없어 경계를 깨뜨리고 꺼내 보여주었습니다. 벗들이 가져가겠다고 조르기에 막지 못하고 퍼뜨리지나 말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지요. 그런데 벗들이 내 말을 아랑곳하지 않고 남에게 보여주었나 봅니다. 아니면 그 글을 베낄 때 아이들이 베껴서 내보냈는지도 모릅니다. 남이 모르게 하려면 차라리 짓지 않는 게 낫다고 합니다. 이미 짓고서 다시 비밀에 부치는 짓은 옛사람이 비웃은 바인데 제가 이러한 경계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이황이 이중구에게 보낸 편지.-283-284쪽
나는 평소에 큰 병통이 있다. 무릇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바로 글로 지어내고, 지은 것이 있으면 남에게 보이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버릇이다. 생각이 떠오르는 즉시 붓을 잡고 종이를 펴서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고 써내려가고, 글을 짓고 나서는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좋아한다. 문자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을 만나면 내 주장이 흠이 없는지 편벽된지 아니면 만난 사람이 가까운지 먼지를 미처 헤아리지 않고 급히 보여주려고 건넨다. 그러므로 남에게 한바탕 말하고 나면 뱃가죽 안과 상자 속에는 한 가지 물건도 남아 있는 것이 없다. 그로 인하여 정신과 기혈이 흩어지고 새어나가서 쌓이고 익어가는 맛이 전혀 없는 듯하다. 그리하고서야 어찌 성령을 함양하고 몸과 명예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요즈음 와서 점검해 보니, 모두가 경천(가볍고 얕음) 두 글자가 빌미가 된 결과다. 이것은 덕을 숨기고 수양하는 공부에 크게 해로운 데 그치지 않는다. 비록 주장이 현란하고 글솜씨가 화려하다고 해도 차차로 천박하고 값싸져서 남에게 존중을 받지 못하게 된다. 지금 선생의 말씀을 읽고 보니 느끼는 바가 한결 크다. -정약용, <도산사숙록>-284-285쪽
내가 스승님께 배운 지 이레 되던 날, 스승님은 문사를 공부하라는 글을 내려주시며 말씀하셨다. "산석(황상의 아명)아, 문사를 공부하도록 해라!" 나는 머뭇머뭇 부끄러워하며 말씀을 올렸다. "제게 세 가지 병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둔하고, 둘째는 꽉 막혔고, 셋째는 미욱합니다." 그러자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을 너는 하나도 갖고 있지 않구나! 첫째는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으로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는 글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으로 허항환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는 이해력이 빠른 병통으로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사람은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사람은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사람은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합니다. 뚫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합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합이다. 그렇다면 근면합은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황상, <임술기>-287-2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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