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반죽통 속에서 반쯤 벌거벗고 있는 한 사내의 주무르는 손에 내맡겨진 채 있는, 머리도 없고 따뜻하며 선정적인 덩어리보다 더 미끈거리고 더 상냥한 것을 상상할 수 없었다. 그때 나는 밀가루 반죽과 빵 가게 조수 사이의 기이한 결혼을 상상했고 심지어는 빵에 사향 맛과 봄철의 짙은 향기 같은 것을 첨가해 줄 어떤 새로운 종류의 효모를 몽상하고 있었음을 이제 나는 알 것 같다.-99쪽
+ 내가 우즈 강가에서 오랫동안 명상에 잠겨 거닐 때, 그리고 내가 밤을 새우기 위하여 여러 자루의 초를 준비하고 아버지의 서재 안에 문을 잠그고 혼자 들어앉아 있었을 때, 런던에서 내가 우리 집안의 친지들에게 나를 소개해 주는 추천장들을 사용하기를 거절했을 때 나는 이미 고독과 서로 만난 일이 있었다. 사람들이 신앙심 깊은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후 아주 자연스럽게 종교에 입문하듯이 나는 '버지니아호'가 스페렌차의 암초 위에서 그의 이력을 끝장내던 날 밤 고독에 입문했다. 고독은 그의 필연적인 동지인 침묵과 더불어 저 바닷가에서 시간의 기원 아래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102쪽
그는 고독으로 인하여 비록 가장 보잘것없는 동물들이라 할지라도 자신에 대해 적의를 품은 감정의 표현 같다 싶은 것과 마주치면 무방비 상태가 되어 상처를 입었다. 손일을 하지 않으면 점차로 손에 박혀 있던 못이 풀리듯이 인간들이 그들 서로 간의 관계에 있어서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무관심과 무지의 갑옷이 그에게서 벗겨져 버린 것이었다.-104쪽
"불 꺼진 얼굴, 인간이라는 종족은 아직 한번도 도달한 일이 없는 정도에까지 불 꺼져버린 얼굴."-110쪽
꽃은 식물의 성기다. 식물은 자기를 찾아오는 누구에게나 자기가 가진 가장 빛나고 향기로운 것인 양 그의 성기를 순진하게 바친다. 로빈슨은 각자가 자랑스럽게 자신의 머리에 암컷 수컷의 마크를, 거대하고 번쩍거리며 향기가 나는 마크를 달고 다니는 새로운 인류를 상상해 보았다......-149쪽
말뚝에다가 너무나 짧은 끈으로 비끄러매 놓은 어린 염소처럼 마음이 제자리에서 펄떡펄떡 튀어 일어나려 할 때 나는 얼마나 자신을 억제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가!-206쪽
이리하여 시간은 빠르고 유용하게 흘러갔으며 보다 유용하게 쓰이면 쓰일수록 빨리 지나갔고, 그 뒤에는 내 역사라고 하는 기념물들과 찌꺼기 더미가 남았다. 아마도 내가 몸을 싣게 된 연대기적 시간은 우여곡절의 수천 년이 지나고 나면 마침내 '고리처럼 처음과 끝이 만나서' 그 출발점으로 되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같은 시간의 순환성은 하나님만이 아는 비밀인 채로 남아 있었고, 또 나의 짧은 일생은 직선의 한 토막으로서 그 양쪽 끝은 어처구니없게도 무한대를 향하고 있어서 이는 마치 불과 몇 평짜리 마당으로는 땅덩어리가 둥근 공같이 생겼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27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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