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링턴파크 여자들의 어느 완벽한 하루
레이철 커스크 지음, 김현우 옮김 / 민음사 / 2008년 9월
절판


그리고 식당 곳곳에 혼자 온 사람들이 책을 들고 앉아 자의식과 함께 샌드위치를 씹고 있었다.-134쪽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성들일까? 무슨 소용이 있다고? 그렇게 열심히 공부해서, 이 여학생들이, 그 과학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얻는 게 뭐가 있을까? 머지않아 남자를 만나고 나면 모두 빼앗겨 버릴 것을. 과학책 더미에 파묻혀 있던 여학생도 남자를 만날 테고, 그러면 그 남자가 차근차근 그녀를 죽여 버릴 것이다.-200쪽

5시가 되기까지 15분이 남았다. 도서관 안도 서서히 어두워졌다. 모서리, 저녁의 모서리였다. 어떤 것이 다른 어떤 것으로 변하는 시간. 경계가 사라지고 변조가 일어나는 시간이었다.-215쪽

벽난로 앞에는 인도산 깔개가 고문이라도 받는 것처럼 뒤틀려 있고, 여기저기 버려진 장난감이 지구본의 대륙들처럼 듬성듬성 모여 있었는데, 그 흐름은 소파 같은 장애물을 만나는 곳에서 끊어졌고, 사람들이 앉았다 일어났다 하는 자리에는 분화구처럼 빈 공간이 남아 있었다.-2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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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이디스 워튼 지음, 손영미 옮김 / 문예출판사 / 2007년 9월
구판절판


프롬 농장은 원래 고양이가 핥고 난 우유 그릇같이 척박했고,-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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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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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움직임 없는 것'(아르곤), 그리고 '낯선 것'(제논)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로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 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활성 기체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다만 1962년 한 부지런한 화학자의 오랜 독창적인 노력 끝에, '낯선 것'(제논)이 극도로 탐욕스럽고 활발한 플루오린과 잠깐 동안 결합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 일이 있었을 뿐이다. (중략) 내가 알고 있는 게 얼마 되지는 않지만 우리 선조들은 바로 그러한 기체들과 비슷한 데가 많다.-7~8쪽

모든 철학자들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인다고 작은 모기 한 마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이해조차 못 할 것이다. 이것은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운 일이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엔리코와 나는 화학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 신비의 내밀한 부분을 모두 훑어버릴 것이다.-36쪽

그 내용에 따르면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51쪽

즉 거의 같은 것(나트륨은 칼륨과 거의 같다. 하지만 나트륨을 썼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같은 것, 유사한 것, '혹은'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 대용품, 미봉책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아주 작을지 몰라도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 마치 철로의 선로변환기처럼 말이다. 화학자의 일은 상당 부분 바로 그러한 차이에 주의하고, 그것을 제대로 알고서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화학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93쪽

당시 우리는 너무나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정상이 아니었다. 우리의 배고픔은 한 끼를 걸렀으나 다음 식사는 거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잘 알려진 (그리고 완전히 불쾌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 느낌과는 공통성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욕구였고 결핍이었으며 1년 전부터 우리를 따라다니다 우리들 내부 깊숙이 영원히 뿌리박힌 것이었다.-205쪽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난 그 젊은이 같은 사람을 많이 봤으니까. 전속력으로 출발을 했다가 머리가 깨지고 마는 구두 수선장이들 말이요. 비단 구두 수선장이들뿐만 아니라오.-251쪽

내가 어떤 모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실수를 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엄격해진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 열매를 누리고 싶은 사람은 너무 오래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게 실수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도 너무 시간을 끌면 안 되었다.-273쪽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저는 이상한 현상을 종종 목격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을 훌륭하게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 있어 비굴한 일을 강요받았을 때조차도 그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여섯 달 동안이나 제게 몰래 음식을 가져다줘서 제 목숨을 구해준 이탈리아 벽돌공은 독일인들과 그들의 음식, 그들의 언어, 그들이 일으킨 전쟁을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그에게 벽을 쌓게 했을 때 그는 곧고도 단단한 벽을 쌓았습니다.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업적인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346쪽

필립 로스 :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독일인들에 의해 자행된 "생물학적, 사회적 거대한 실험"에 대한 선생님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묘사하고 분석할 때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조종하는 것은 한 인간을 변화시키거나 파멸시키는 방법들, 화학 반응으로 어떤 물질을 분해시키듯 특성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 방법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가장 잔인한 실험의 희생양으로, 생체-표본으로 끌려들어간 도덕적 생화학 이론가의 기억과 같은 것입니다.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에 갇혀 있던 포로가 이성적인 과학자의 표본이었던 셈이죠.-348~349쪽

중세 유럽의 유대교도들은 직업이나 주거 등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기독교도에게는 교의에 따라 금지되어 있는 직업 분야를 담당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금융업이다. 한때 기독교는 '이자를 목적으로 한 금전의 대여'를 금지했기 때문에, 유대교도들이 금융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윽고 상업의 발달과 함께 일부 유대인 금융업자가 부를 축적하게 되자 기독교도들은 그들을 질투와 적의의 대상으로 여겼다. 세익스피어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은 그러한 과정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해준다. '유대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라는 편견은 이렇게 주조되었다.-377쪽

인종법 반포 이전까지 프리모 레비는 스스로가 유대인이라는 의식이 극히 희박했다. 그것은 태생의 머나먼 기억이나 사라져가는 습관과 문화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 이상으로 '이성'만을 따르는 '인간'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성 앞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주근깨'가 있고 없는 정도의 차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인종법 반포 이후 기독교도였던 학우들이나 교수들은 대부분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탈리아 사회라는 유기체로부터 '불순물'이 석출되듯이 그는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 석출되어갓던 것이다.
하지만 파시스트에 의해 '유대인'이라고 분류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프리모 레비는, 전유럽으로부터 모여든,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생활습관도 다른 '유대인'들 속으로 내던져진 후, 그곳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재발견했다. 말하자면 그는 아우슈비츠로 인해 '유대인'이 되었던 것이다.-3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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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인간인가 -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기록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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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자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찾아 삶과 작별했다. 기도를 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부러 곤드레만드레 취하는 사람, 잔인한 마지막 욕정에 취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어머니들은 여행 중 먹을 음식을 밤을 새워 정성스레 준비했고 아이들을 씻기고 짐을 꾸렸다. 새벽이 되자 바람에 말리려고 널어둔 아이들의 속옷이 철조망을 온통 뒤덮었다. 기저귀, 장난감, 쿠션, 그리고 그 밖에 그녀들이 기억해낸 물건들, 아기들이 늘 필요로 하는 수백 가지 자잘한 물건들도 빠지지 않았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내일 여러분이 자식들과 함께 사형을 당한다고 오늘 자식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을 것인가?-15쪽

거기서 우리는 최초의 구타를 당했다. 너무나 생소하고 망연자실한 일이어서, 몸도 마음도 아무런 통증을 느낄 수 없었다. 단지 무척 심오한 경이로움만을 느꼈을 뿐이다. 어떻게 분노하지 않고도 사람을 때릴 수 있을까?-17쪽

누구나 인생을 얼마쯤 살다 보면 완벽한 행복이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것과 정반대되는 측면을 깊이 생각해보는 사람은 드물다. 즉 완벽한 불행도 있을 수 없다는 사실 말이다. 이 양 극단의 실현에 걸림돌이 되는 인생의 순간들은 서로 똑같은 본성을 가지고 이싸. 그것들은 모든 영원불멸의 것들과 대립하는 우리의 인간적 조건에 기인한다. 미래에 대한 우리의 늘 모자란 인식도 그 중 하나다. 그것은 어떤 때에는 희망이라 불리고 어떤 때에는 불확실한 내일이라 불린다. 모든 기쁨과 고통에 한계를 지우는 죽음의 필연성도 그중 하나다. 어쩔 수 없는 물질적 근심들도. 이것들이 지속적인 모든 행복을 오염시키듯, 이것들은 또 우리를 압도하는 불행으로부터 끊임없이 우리의 관심을 돌려놓음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파편화하고, 그만큼 삶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준다.
여행 중에 그리고 그후에도, 끝도 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우리를 건져낸 것은 바로 이런 불편함, 구타, 추위, 갈증이었다. 살려는 의지나 의식적인 체념 같은 것이 아니었다.-18쪽

나는 그에게 본능적인 존경심을 느낀다. 그가 우리들보다 먼저 고통스러워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30쪽

그러나 낙관주의자와 비관주의자인 이 두 부류가 그렇게 분명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불가지론자들이 많아서라기보다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화 상대와 상황에 따라, 기억도 일관성도 없이 두 극단적인 입장 사이에서 동요하기 때문이다.-50쪽

수용소에 들어온 지 보름 뒤에 나는 이미 규칙적으로 배가 고팠다. 자유로운 인간들은 알지 못하는, 밤이면 꿈을 꾸도록 만드는, 우리 몸 구석구석에 자리 잡은 만성적인 허기다.-50쪽

카베는 육체적으로 가장 편한 수용소다. 그래서 아직 의식의 씨앗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거기서 의식이 다시 깨어난다. 그리하여 공허하고 긴 날, 허기나 노동이 아닌 다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어떤 상태로 만들려고 한 것인지, 우리 중 몇 명이나 죽었는지, 이것이 어떤 삶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다. 상대적으로 평화로운 울타리인 카베 안에서 우리는 우리의 인간성이 아주 연약한 것이며 이 인간성이야말로 우리 생명보다 더 위태롭다는 것을 깨달았다.-80쪽

이 꿈 이야기를 이미 알베르토에게 했던 것이 생각난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가 자기도, 또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런 꿈을 꾼다고 털어놓았던 것도 생각난다. 그는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그런 꿈을 꿀지도 모른다고 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 왜 매일매일의 고통이, 우리가 이야기를 하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 장면으로 거듭해서 꿈으로 번역되는 걸까?-89쪽

삶의 의미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모든 힘줄 속에 뿌리 박혀 있다.-106쪽

인간의 본성에 따르면 슬픔과 아픔은 여러 가지를 동시에 겪더라도 우리의 의식 속에서 전부 더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원근법에 따라 앞의 것이 크고 뒤의 것이 작다. 이것은 신의 섭리이며, 그래서 우리가 수용소에서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에서, 인간이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라는 말을 그토록 자주 듣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인간이 애초에 완전한 행복의 상태를 누릴 수 없어서라기보다 불행의 상태가 지니는 복잡한 성질을 늘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없이, 차례대로 늘어선 그 불행의 이유들이 단 하나의 이름을, 가장 큰 이유의 이름을 갖게 된다. 그 이유가 힘을 잃어버릴 때까지 말이다. 그런데 그때 우리는 그 뒤로 또 다른 이유가 등장하는 것을 본다. 비탄에 잠길 정도로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뒤로 또 다른 이유들이 줄을 서 있다.-110~111쪽

우리 모두 적어도 몇 시간은 배가 부를 것이므로 싸움 같은 건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 기분이 좋다. 카포도 우리를 구타할 이유가 없다. 우리는 어머니를, 아내를 생각한다. 보통은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몇 시간 동안 우리는 자유로운 인간들 식으로 불행할 수 있다.-116쪽

죽음을 이해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들 앞에서, 그들의 죽음을 죽음이라고 부르기조차 망설여진다.
얼굴 없는 그들의 존재가 내 기억 속을 가득 채우고 있다. 우리 시대의 모든 악을 하나의 이미지로 형상화할 수 있다면, 나는 내게 친근한 이 이미지를 고를 것이다.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구부정하게 구부린, 뼈만 앙상한 한 남자의 이미지이다.-136쪽

익사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없다면, 그리고 죽음으로 이르는 길이 단 하나의 드넓은 길이라면, 구원의 길은 이와는 반대로 수없이 많고 험하고 가파르며, 실제로 있을 것 같지 않다.-137쪽

웃을 때는 마치 어린아이 같은데, 자주 웃는다. 일을 너무 많이, 너무 힘차게 한다. 그는 아직 모든 것을, 숨쉬는 것, 움직이는 것, 심지어 생각하는 것까지 아끼는 우리의 비법을 배우지 못했다.-202쪽

지금 나는 아우슈비츠가 존재했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 시대에 그 누구도 신의 섭리에 대해 말할 수 없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그 시간, 극한 상황에서 구원을 받는 성서의 모든 일화들이 바람처럼 모두의 머릿속을 스쳤던 것은 사실이다.-241쪽

1. 당신의 책에서는 독일인들에 대한 증오도 원한도 복수심도 전혀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을 다 용서한 것인가?

-> (전략) 덧붙여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보기에 증오는 개인적인 것이고 한 사람에게, 어떤 이름에게, 어떤 얼굴에게 향해지는 것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당시 우리를 박해했던 사람들은 이름도 얼굴도 갖고 있지 않았다.-268쪽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여러 방책을 강구했는데, 공식석상에서 신중하고도 냉소적인 완곡어법을 사용하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학살'이 아니라 '최종해결책'이라 표현했고 '강제 이송'이 아니라 '이동', '가스실 살해'가 아니라 '특별처리' 등등으로 썼다.-273쪽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다양하게 존재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독일인들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해 모른 척하고 싶었기 때문에 알지 못했다.-276쪽

마지막으로 나는 한 가지를 덧붙이고 싶다. 억압에 굴복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저항을 해야 한다는 뿌리 깊은 의식이 파시스트 치하의 유럽에 그리 널리 퍼져 있었던 것은 아니고, 특히 이탈리아에서는 그러한 의식이 약했다는 것 말이다. 그러한 의식은 정치적 행동주의자였던 소수의 인간들이 지니고 있던 자산이었다. 그러나 파시즘과 나치즘은 그들을 고립시키고 추방하고 테러를 가하고 심지어 아예 목숨을 빼앗아버렸다. 독일 수용소에서 희생당한 수십 만 명 중 첫 희생자들이 반나치스 정당의 정치가들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에, 저항하거나 그것을 조직적으로 계획하려는 민중의 의지는 훨씬 뒤에야, 무엇보다 유럽 공산당 덕택에 싹트기 시작했다. (...) 결론적으로 저항이 부족했다고 포로들을 비난하는 것은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실수다. 이거은 오늘날 어느 정도 일반적인 자산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엘리트들만 가지고 있던 정치의식을 포로들에게 요구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281~282쪽

그녀는 또 작은 창문을 통해 보이는 화장터의 폐허를 가리켰다. 당시에는 굴뚝 위로 불꽃에 보였다고 했다. 그녀는 나이 많은 여자들에게 물었다. "저 불길은 뭐지요?" 그러자 여자들이 대답해주었다. "저기서 타고 있는 건 바로 우리야."-284쪽

둘째 부류는 반대로 '정치적'이었던, 혹은 어찌되었든 정치적 경험이 있거나 종교적 신념 또는 강한 도덕성을 소유한 포로들이다. 이 귀환자들에게는 기억하는 것이 의무다. 그들은 잊고 싶어하지 않는다. 특히 세상이 잊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그들의 경험에 의미가 있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에. 수용소는 사고가 아니라는 걸, 단순히 예기치 못한 우발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니기 때문에.
-285쪽

수용소는 유럽에서 파시즘이 강세를 떨치고 가장 기괴한 모습을 보일 때 가장 번성했다. 그러나 파시즘은 히틀러와 무소리니 이전에도 존재했고, 분명한 형태로 혹은 가면을 쓰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계속 살아남아 있다. 세계 어느 곳에서든지, 인간의 기본적인 자유와 평등을 부정하는 것을 용납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수용소 체제를 향해 가게 된다. 이것은 막기 힘든 과정이다.-285쪽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뒤 불과 몇 달 뒤에 최초의 강제 수용소인 다하우 수용소가 세워졌다. 같은 해 5월에는 유대인 저자들 혹은 나치즘의 적들이 쓴 책이 처음으로 불태워졌다(100여 년도 더 전에 독일계 유대인인 시인 하이네는 이렇게 썼다. "책을 불태우는 사람은 조만간 인간들을 불태우게 될 것이다").-298쪽

나는 솔직히 히틀러와 그의 뒤에 있던 독일의 광적인 반유대주의를 이해할 수 없다고 고백한 몇몇 진지한 역사학자들(블록, 슈람, 브라허)의 겸손함을 좋아한다.

이와 같은 일은 어쩌면 이해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해되어서도 안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정당화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내 말은 이런 뜻이다. 인간의 의도나 행동을 '이해한다'는 것은 (어원학적으로도) 그거을 수용한다는 것, 그 행동의 주체를 수용하고 그의 입장이 되어보고, 그와 자신을 동일시한다는 것을 의미한다.-301~3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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