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기율표
프리모 레비 지음, 이현경 옮김 / 돌베개 / 2007년 1월
장바구니담기


우리가 숨쉬는 공기 속에는 이른바 비활성 기체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 이것들은 박식하게도 그리스어에서 따온 진기한 이름을 갖고 있는데, 각각 '새로운 것'(네온), '숨겨진 것'(크립톤), '움직임 없는 것'(아르곤), 그리고 '낯선 것'(제논)이라는 뜻을 지닌다. 이들은 정말로 활성이 없어서, 그러니까 자신들의 처지에 만족하고 있어서 어떤 화학 반응에도 개입하지 않고 다른 원소와 결합하지도 않는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비활성 기체는 수세기 동안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고 지낼 수 있었다. 다만 1962년 한 부지런한 화학자의 오랜 독창적인 노력 끝에, '낯선 것'(제논)이 극도로 탐욕스럽고 활발한 플루오린과 잠깐 동안 결합하도록 하는 데 성공한 일이 있었을 뿐이다. (중략) 내가 알고 있는 게 얼마 되지는 않지만 우리 선조들은 바로 그러한 기체들과 비슷한 데가 많다.-7~8쪽

모든 철학자들과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모인다고 작은 모기 한 마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을 이해조차 못 할 것이다. 이것은 수치스럽고 혐오스러운 일이다.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엔리코와 나는 화학자가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노력과 능력으로 신비의 내밀한 부분을 모두 훑어버릴 것이다.-36쪽

그 내용에 따르면 부드럽고 예민하며 산에 고분고분해서 한 입에 먹히는 아연도 불순물 없이 아주 순수한 경우에는 행동이 완전히 달라진다. 그럴 경우 아연은 어떤 결합도 완강히 거부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충돌하는 두 가지 철학적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다. 악에서 지켜주는 보호막 같은 순수함에 대한 찬미와, 변화를 일으켜서 생명력을 불어넣어주는 불순함에 대한 찬미가 그 둘이다.-51쪽

즉 거의 같은 것(나트륨은 칼륨과 거의 같다. 하지만 나트륨을 썼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질적으로 같은 것, 유사한 것, '혹은'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는 것, 대용품, 미봉책은 믿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차이는 아주 작을지 몰라도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수 있다. 마치 철로의 선로변환기처럼 말이다. 화학자의 일은 상당 부분 바로 그러한 차이에 주의하고, 그것을 제대로 알고서 결과를 예상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화학자에게만 해당하는 일은 아니다.-93쪽

당시 우리는 너무나 굶주려 있었기 때문에 정상이 아니었다. 우리의 배고픔은 한 끼를 걸렀으나 다음 식사는 거르지 않을 거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느끼는, 잘 알려진 (그리고 완전히 불쾌하다고만은 할 수 없는) 그 느낌과는 공통성이 전혀 없었다. 그것은 욕구였고 결핍이었으며 1년 전부터 우리를 따라다니다 우리들 내부 깊숙이 영원히 뿌리박힌 것이었다.-205쪽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 생각은 없었어요. 난 그 젊은이 같은 사람을 많이 봤으니까. 전속력으로 출발을 했다가 머리가 깨지고 마는 구두 수선장이들 말이요. 비단 구두 수선장이들뿐만 아니라오.-251쪽

내가 어떤 모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지만 실수를 할 수 있는 자격 조건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엄격해진다는 것을, 그러므로 그 열매를 누리고 싶은 사람은 너무 오래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편으로 그게 실수였다는 것을 알아차리기까지도 너무 시간을 끌면 안 되었다.-273쪽

하지만 아우슈비츠에서 저는 이상한 현상을 종종 목격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일을 훌륭하게 완수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뿌리 깊게 박혀 있어 비굴한 일을 강요받았을 때조차도 그 일을 완벽하게 하려고 애를 쓴다는 겁니다. 여섯 달 동안이나 제게 몰래 음식을 가져다줘서 제 목숨을 구해준 이탈리아 벽돌공은 독일인들과 그들의 음식, 그들의 언어, 그들이 일으킨 전쟁을 증오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인들이 그에게 벽을 쌓게 했을 때 그는 곧고도 단단한 벽을 쌓았습니다. 명령에 복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직업적인 자존심 때문이었습니다.-346쪽

필립 로스 :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독일인들에 의해 자행된 "생물학적, 사회적 거대한 실험"에 대한 선생님의 고통스러운 기억을 묘사하고 분석할 때 그것을 아주 정확하게 조종하는 것은 한 인간을 변화시키거나 파멸시키는 방법들, 화학 반응으로 어떤 물질을 분해시키듯 특성을 상실하게 만들 수 있는 여러 방법들에 대한 관심입니다. <<이것이 인간인가>>는 가장 잔인한 실험의 희생양으로, 생체-표본으로 끌려들어간 도덕적 생화학 이론가의 기억과 같은 것입니다.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에 갇혀 있던 포로가 이성적인 과학자의 표본이었던 셈이죠.-348~349쪽

중세 유럽의 유대교도들은 직업이나 주거 등에서 심한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기독교도에게는 교의에 따라 금지되어 있는 직업 분야를 담당하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금융업이다. 한때 기독교는 '이자를 목적으로 한 금전의 대여'를 금지했기 때문에, 유대교도들이 금융업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윽고 상업의 발달과 함께 일부 유대인 금융업자가 부를 축적하게 되자 기독교도들은 그들을 질투와 적의의 대상으로 여겼다. 세익스피어의 명작 <<베니스의 상인>>은 그러한 과정을 웅변적으로 이야기해준다. '유대인은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라는 편견은 이렇게 주조되었다.-377쪽

인종법 반포 이전까지 프리모 레비는 스스로가 유대인이라는 의식이 극히 희박했다. 그것은 태생의 머나먼 기억이나 사라져가는 습관과 문화의 다른 이름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를 유대인이라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이탈리아인이라고 생각했으며, 또 그 이상으로 '이성'만을 따르는 '인간'의 일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보편성 앞에서 '유대인'이라는 것은 '주근깨'가 있고 없는 정도의 차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런데 인종법 반포 이후 기독교도였던 학우들이나 교수들은 대부분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이탈리아 사회라는 유기체로부터 '불순물'이 석출되듯이 그는 한 사람의 '유대인'으로 석출되어갓던 것이다.
하지만 파시스트에 의해 '유대인'이라고 분류되어 아우슈비츠로 보내진 프리모 레비는, 전유럽으로부터 모여든, 서로 말도 통하지 않고 생활습관도 다른 '유대인'들 속으로 내던져진 후, 그곳에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재발견했다. 말하자면 그는 아우슈비츠로 인해 '유대인'이 되었던 것이다.-37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