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달력 웅진 모두의 그림책 44
김선진 지음 / 웅진주니어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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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친가 조부모님께서는 시골에 사셨다. 명절과 방학 때면 할아버지댁에서 몇일씩 머물며 논과 밭에서 사계절의 변화를 느끼고 직접 수확하신 곡물과 채소 등으로 만든 밥상에 앉아 배불리 먹었던 감사한 기억이 있다. 도시에서도 가로수를 보며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는 있지만 농촌에서만큼 피부로, 온 몸으로 느낄 수는 없다. 농촌에서는 겨울, 봄, 여름, 그리고 가을, 다시 겨울이 돌고 돌며 자연의 일부인 사람으로서 계절을 느낄 수 있고, 사람의 힘으로만은 좌우할 수 없는 자연의 섭리와 운행을 생각하며 때로는 순응하는 법도 배우고 때로는 극복하는 법도 배워서 살아야 했기에 더욱 생명과 자연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는 환경인 것 같다.

사실 거창하게 썼지만, <농부 달력> 그림책에 이 모든 게 담겨있다. 한 바닥씩 펼쳐놓고 깨알같은 글과 그림들을 찬찬히 읽어내려가다보면, '이런게 사람 사는 모습이지, 이런게 자연과 함께 더불어 사는 거지.' 하는 생각에 젖어들게 된다. 부담스러운 가르침도 없고 자극적으로 눈길을 끄는 것도 없는데 잔잔한 재미가 있고 푸근한 감동이 있다. 나처럼 농촌에 사셨던 조부모님이 계셨다면 자신의 조부모님을 떠올리며 더 정감있게 읽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마치 이 분들이 나의 할아버지이고 할머니이신 듯 친근하다.

계절의 변화에 따라 농부의 일감이 달라지고, 풍경도 변화한다. 이걸 글로만 설명했더라면 참 재미 없었을텐데 정말 공들여 그리신 그림 한 장면 한 장면에 그 모든 이야기가 담겨있다. 그림 속 풀 한 포기도 사랑스럽고 싱그럽다. 아이들의 생태 감수성을 기르는 데에도 한 몫을 할 것 같은 책이다.

또, 할아버지와 할머니 두 분은 얼마나 알콩달콩 재미있게 사시는지, 두 분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며 사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 또한 컸다. 봄의 시작에서 할아버지께서 할머니 선물로 봄꽃 무늬 몸뻬를 고르시며 "제일 고운 걸로 한 장 주쇼." 하시는 장면이나 꽃들 사이에서 "나 찾아보슈." "누가 꽃이고 누가 자네여?" 이야기 주고받는 장면, 또 경운기와 오토바이를 앞뒤로 나란히 타고 지나가는 모습에서도 두 분의 사랑이 느껴진다. 그뿐인가. 쿵짝 쿵짝 노래를 틀어놓고 두 분이 박자를 맞춰가며 농사일 하시는 모습이나 여름철 농사일 후 등목을 하시는 장면 등은 너무나 정겹다. 어르신들이 이렇게 사랑스러우시다니!

도시에 살며 회색빛 건물들 사이에서 마음이 팍팍할 때, 추억 속 조부모님을 만나고 싶을 때 수시로 꺼내보고 싶은 책으로 <농부 달력>을 추천하고 싶다.


*웅진주니어 출판사 서평단 자격으로 책을 제공받아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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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민주 시민 교육
장석준 지음, 김홍모 그림 / 노란상상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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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사회 교과서에 나오는 정치에 대한 단원을 열심히는 가르쳤지만 나부터도 정치가 무엇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린이를 위한 민주 시민 교육> 이 책은 아이들을 위해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고, 정치에 있어서는 아이들이 배우는(교사로서 내가 가르치는) 초등 사회 교과서 수준을 넘지 못했던 내게도 알기 쉽고 이해하기 쉽게 정치를 설명하고 있어서 읽는 내내 '아, 그런거구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총 18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는 정치에 대한 기본 개념에 대해 알기 쉽게 설명을 해준다. 정치란? 시민이란? 정치 참여란? 정당이란? 선거란? 등등 한 번에 한 가지 개념(주제)에 대해 적절한 예시를 들어 충분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어른이 따로 부연설명을 해주지 않아도 보통의 문해력을 갖춘 초등 고학년이 책을 읽는다면 스스로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후반부는 대학 등록금, 시험제도, 주택문제, 의료혜택, 노동조합, 기후 위기 등 현안들에 관련된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다루는데, 어린이들도 이와 같은 문제들이 모두 정치와 관련있는 것이고 자신의 삶과도 밀접하게 맞닿아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어 정치를 좀 더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정치 단원을 배우면서 다루는 내용은 매우 축약적이니 이 책을 함께 읽으며 스토리텔링으로 정치에 대한 이해를 돕고, 후반부에 다루는 몇 가지 주제들에 대해서는 관련된 이슈가 있을 때 발췌하여 읽기 자료로 제공해도 좋을 것 같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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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
나타샤 패런트 지음, 리디아 코리 그림, 김지은 옮김 / 사계절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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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덟 공주와 마법 거울>은 친절한 제목에서 말해주듯이 여덟 명의 공주를 마법 거울이 만나는 여정을 따라가며 공주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공주 이야기라면 나도 어려서부터 많이 읽고 들어왔는데(백설공주, 잠자는 숲속의 공주 등 전통적인 공주들의 이야기부터 요즘 아이들이라면 모르는 아이가 없는 겨울왕국의 엘사와 안나까지.) 이 책 속 여덟 공주들은 어떤 공주들일까 무척 궁금했다.

 

책은 이야기 속 이야기들이 쭉 이어서 나오는 큰 틀을 가지고 있었다. 단순히 여덟 공주 이야기를 병렬식으로 나열했다면 그냥 단편 모음집에 지나지 않았을 테지만 이 책은 흥미롭게도 여덟 공주들의 이야기를 하나로 꿸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해 두었다. 마법사의 마법으로 인해 작은 손거울이 되어버진 벽걸이 거울은 우연인지 운명인지 모를 공주들과의 만남을 거치며 여러 나라에 사는, 여러 문제 상황 속 공주들의 활약을 직접 보게 된다. (공주들은 물론 단순한 거울로 여겼을 뿐이지만 거울은 공주들을 응원하고 또 움직이게 만든다.)

 

공주들은 출신도 다르고, 외모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주변 인물들도 다르고, 고민도 다르지만.. 자신의 삶에 주체성을 가지고 스스로 선택하여 자기의 길을 만들어간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정의롭고, 작은 생명도 소중히 여기며, 다른 이와 연대할 줄 알고, 힘든 상황과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런 공주들의 이야기를 읽고 있자니 나 역시 그런 공주가 되고 싶고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마법 거울의 마법이 나에게도 통한걸까?) 나이는 40대에 저질 체력으로 항상 피곤함과 싸우고, 아직 어린 두 자녀를 돌보며 일을 하는 워킹맘이라 내 시간을 내기 힘들고, 뭐 하나 정말 특출나게 잘 하는 것-누가 봐도 인정할만한 탁월함-도 없는 평범한 사람이지만.. 꿈 앞에서 스스로 포기하지 않고, 유독 내 마음을 뒤흔드는 불의한 일에 대해 모른척하지 않고, 세상에서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 연약하고 소외된 작은 자들을 힘써 사랑하고, 나와 다른 사람들도 포용하고 아우를 수 있는 넓은 마음을 가진 그런 공주가 될 수 있다고 이 책이 말해주고 있는 것만 같았달까.

 

'훌륭한 공주'란 무엇이고 '훌륭한 삶'이란 무엇인지 생각해보게 해주는 이 책을 추천한다.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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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의 나라 여왕님
연두콩 지음 / 아스터로이드북(asteroidbook)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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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차의 나라 여왕님>은 연두콩 작가님이 처음으로 쓰고 그린 창작 그림책이다.

이 책에는 연두콩이라는 작가명처럼 사랑스럽고 통통 튀는 매력적인 주인공이 등장한다. 겉표지에 그려진 모습만 보아도 저 생기발랄한 표정 하며, 두 손을 위로 번쩍! 들고 환호하는 듯한 모습이 주인공의 밝고 당당한 모습을 잘 나타내는 듯 하다. 아마도 차의 나라 여왕님은 이 귀여운 꼬마 아가씨를 지칭하는 것 같은데, 차의 나라 여왕님으로서 어떤 활약을 하는걸까 궁금한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이야기의 시작은 엄마가 지인들을 만나고 있는 장소인 찻집이었다. 무슨 사정이었는지는 몰라도 엄마 모임에 혼자 끼게 된 여자 아이는 '엄마에게 말도 시키지 말고 혼자 놀아야 한다'는 엄마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얼마나 입을 열어 재잘거리고 싶고, 또 몸이 근질근질 했을까? 말을 걸지 말라고 했던 엄마 말을 듣지 않고 아이가 자꾸만 엄마를 찾으니 엄마는 결국 숙제를 40쪽이나 내준다. 아니, 숙제 40쪽?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다가도 한편으로 이해가 간다. 주인공 아이같이 이야기 하기 좋아하고 엄마를 계속 찾는 아이가 우리 집에도 두 명 있기에..ㅎㅎ 그리고, 엄마도 모처럼 만난 지인들과 나누고픈 이야기가 많았을 것을 생각하니..^-^;

 

 

 

아이는 진짜 숙제를 하려고 마음 먹어 보지만 엄마와 이모들이 마시는 찻잔을 보며 예쁜 드레스를 떠올리고, 이내 상상 속으로 빠져든다. 찻잔이 변하여 공주들이 되고, 아이에게 딱 맞는 예쁜 드레스를 준비해두었다며 차의 나라로 초대한다. (차의 나라 공주님들이 입은 드레스의 하얀 바탕에 파란색 무늬는 엄마와 이모들이 마시던 찻잔의 무늬를 닮아있고, 공주들의 피부색은 우롱차 같은 갈색이다. 따끈한 차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처럼 공주들의 머리카락도 하늘하늘하게 휘날린다. 이런 디테일을 찾는 즐거움이 있는 책이다.)

 

 

아이는 드레스를 입고 한껏 마음이 부풀었지만 달려가다가 드레스 자락을 밟고 넘어질 뻔 했다. 공주들은 이제 막 예쁜 드레스를 입고 공주가 된 아이에게 '공주가 되는 법'을 가르쳐준다. 이야기인 즉슨, 공주는 달려도 안되고, 큰 소리를 내도 안되고, 속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해도 안되고, 질문이 많아도 안된다는 것.

그래서일까? 차의 나라의 공주들은 모두 사뿐사뿐 걷고 조곤조곤 말하고 오호호호 웃었다.

주전자 왕자님이 아이에게 춤을 청하자 차의 나라에 무도회가 시작된다. 차에 곁들여 먹는 과자는 모두 멋진 왕자님들이 되어있었고, 공주들은 드레스가 쫙 펼쳐지도록 뱅글뱅글 돌며 춤을 추기 시작한다. 즐거운 무도회에서 몇 가지 사건-사고들이 생기는데 그 때마다 아이는 용감하게 나서서 지혜로운 조언을 하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도록 돕는다. 이를 통해 차의 나라 공주님과 왕자님들은 좀 더 자기 자신과 상대방에게 솔직해지는 법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관습, 겉모습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아이를 만나기 이전에는 '공주란 이러이러해야 해.' 같은 행동의 제약과 겉모습에서 보이는 조건들이 중요한줄로만 알고 살았던 우롱차 공주들은 이제 달라졌다.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으며 속마음을 당당하게 표현할 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변화의 계기를 만들어 주고 영감을 준 아이를 공주님보다 더 잘 어울리는 여왕(책 제목에도 나온 것처럼) 으로 추대한다. 아이는 이를 사양하지 않고 기꺼이 차의 나라 여왕이 되어 기쁨의 무도회, 아니 춤판-이 어울리는 듯 하다-을 벌이고 현실에까지 이어져 웃음 가득한 마무리를 짓는다.

아이의 1인칭 시점으로 풀어나가는 이야기와 순수하고 당돌하면서도 예쁜 드레스에 두근거려하는 소녀 감성을 자극하는 그림체가 잘 어우러진 그림책인 것 같고, 공주다움이나 여성스러움에 대한 편견을 깨면서도 그러기 위해 꼭 예쁘고 사랑스러운 것을 버려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그 또한 겉모습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마음가짐과 태도의 문제임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아 흥미로웠다. 비록 현실의 아이는 반팔티, 반바지 차림에 바구니를 뒤집어 쓴 모습에 개의치 않고 춤을 추었지만, 이 책 전반적으로 보여지는 아름다운 그림들 속 드레스, 레이스 무늬, 찻잔과 주전자 등은 여전히 아름답게 그려졌기에,(작가님께서 무척 공을 들여 그리신 게 보였다) 기존의 공주다움에 대한 사회 문화적 요구에 다른 목소리를 내면서도 그런 아름다움에 대한 취향을 부정해야만 한다는 부담을 주지 않는 것 같이 와닿았기 때문이다. 나다움에 대한 그림책들이 많이 나오고 있는데, 이 책도 함께 읽어보며 아이들과 생각을 나눠보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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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어의 방 위고의 그림책
그로 달레 지음, 스베인 뉘후스 그림, 신동규 옮김 / 위고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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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솔직하게 작성한 서평입니다.




새로운 책을 처음 만나면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는 앞표지.

<문어의 방> 이라는 제목과 함께 푸른 바다같은 배경 위에 검게 번져나가는 문어의 먹물 같은 검정이 인상적이었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책 소개를 읽었기 때문에 친족 성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그림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동안 다른 그림책들을 펼칠 때 같은 설렘과 즐거운 마음보다는 어쩐지 조심스럽고 긴장되는 마음으로 책을 펼쳤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전의 두근거림과 떨림이 있었고, 이 책 속의 이야기가 허구가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두고 있기에 그와 같은 아픔을 겪었던 누군가와 그 가족들을 생각하며 이야기를 읽어나갔다.





면지를 지나 본 이야기가 시작되기 직전, 프롤로그 같은 장면이 나온다. 한 바닥의 절반을 가득 채운 문어가 누군가의 속옷에 발을 뻗고 있었다. 문어는 표정을 읽을 수 없었고 화나 보이거나 억세보이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침없이 쭉 뻗은 발은 위협적이었다.





주인공 금이는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받는 아이이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빛나는 금이. 부모님의 금빛 보물이었다.

오빠에게는 어떨까? 네 식구가 등장하는 첫 페이지에서 금이를 향하고 있는 부모님과는 달리 오빠는 소파에 누워서 헤드셋을 끼고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듯 하다. 금이의 시점에서 가족들을 동물에 비유할 때는 오빠가 원숭이로 묘사된다. 원숭이처럼 음식을 입 안 가득 넣고 먹어서이기도 하고 금이를 최고로 잘 웃겨주는 오빠이기 때문이란다.


그랬던 오빠가 어느 날 금이가 놀고 있던 방으로 들어왔다. 오빠는 금이가 알던 원숭이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동물이 방에 들어왔어."





금이는 지금껏 이런 동물을 만나본 적이 없었고, 이런 공기를 느껴본 적도 없었기에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오빠의 낯선 모습에 질문을 던져도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고 커튼을 치고 문을 잠그자 익숙하고 편안했던 금이의 방은 문어가 장악한 방이 되었다.

문어의 방.

숨을 곳이 없었고 이게 어떤 상황인지 물어볼 부모님도 계시지 않았다.


"금이는 나무 막대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그러기 싫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지만, 문어는 명령하고 요구했고 금이는 그냥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말을 할 수도 아무 소리도 낼 수도 없었으니까.


마음이 아팠다.


나의 안전을 위협하는 누군가를, 무언가를 만났을 때 주위에 도움을 요청하라고, "싫어요. 안돼요."를 외치라고 가르쳐오던 이야기들은 말이 안되는 거였다.

문어의 방에서는 입이 문어의 것이었기에 아무 소리도 낼 수 없고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겪어보지 않았으니 몰랐던 어른들이 그렇게 가르쳐왔다.


금이 또래의 아이들만 그럴까? 아이도, 어른도, 여자도, 남자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누구나 공포심과 무력감에 사로잡히면 자기 힘으로 위험을 알리고 도움을 요청할 수 조차 없이 속수무책일 수 있다는 걸 더 많은 사람이, 아니 모두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금이를 보니 그랬다.


금이의 얼굴에서 금빛으로 빛나던 생기가 사라졌다. 가장 안타까운 건 금이에게 이제 더이상 쉴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금이의 빛을 잃게 한 문어는 한 집에 있었고 그 문어로부터 숨을 곳은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모든 것이 멀쩡하다는 듯 문어는 자리잡고 앉아 금이를 향해 웃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금이는 홀로 생각 속에서 혼란스러워 했고 자신이 잘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도 하며 괴로워했다. 책을 읽는 나도 같이 숨이 막히는 듯 했다.

그러다 엄마와 단 둘이 집을 나서 차를 타고 이동할 때, 금이가 입을 열어 문어에 관한 모든 것을 이야기했다. 그러지 않으면 숨을 쉴 수 없을 것 같아서.

다행이다. 다행이다.


"그런 일은 비밀로 하면 안 돼.

그런 비밀은 혼자 가지고 있기에는 너무 커.

네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어."


이 커다란 비밀을 혼자 오래 품고 살며 멍들고 곪아가지 않고 엄마에게 털어놓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이렇게 말해줄 수 있는 강하고 용기있는 엄마가 있어서 금이는 참 다행이다.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친족 성폭력은 타인에게서 당한 성폭력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예민한 문제이다. 가족이니까. 가족이라서 더 말하기 어렵고, 자신이 안전하다고 느낄 최소한의 공간도 집에서는 찾을 수 없으니까. 형제자매간에 벌어진 친족 성폭력이라면 부모님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의 부모이기에 이 일을 알게된 후라도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방법을 찾기는 더더욱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로 인해 고통받고 있고, 말 못할 비밀을 품고 있던 이들에게 이 책은 '나한테만 이런 일이 생기는 게 아니다.'라는 메세지를 전해주며 이야기를 꺼낼 용기를 줄 것이라 기대한다. 그 아팠던 일이 없던 일이 되지는 않겠지만, 가해자를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어 자기 자신을 탓하며 자책하던 일을 그치고 '도무지 해결되지 않을 것 같은 일을 해결해 주는 어른들'에게 알릴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고마운 그림책. 적절한 비유를 사용하면서도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수위 조절도 탁월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금이와 같은 비밀을 품고 있을지 모르기에 앞으로 내가 만나는 모든 아이들에게 꼭 읽히고 싶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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