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장자, 차이를 횡단하는 즐거운 모험 ㅣ 리라이팅 클래식 4
강신주 지음 / 그린비 / 2007년 8월
평점 :
소통이라는 개념을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이라는 용어와 혼동하지 마십시오. 커뮤터케이션은 어원 그대로 어떤 공적인 (communis) 영역의 권위를 전제하는 개념입니다. 그래서 이 개념은 자유로운 혹은 야생적인 개체를 주어진 공동체의 규칙으로 몰아넣는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와 달리 소통은 글자 그대로 '막힌 것을 터 버린다'는 뜻의 소(疏)와 '새로운 연결'을 뜻하는 통(通)의 의미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개념입니다. 결국 이 개념은 기존의 고정된 삶의 형식을 극복하여 새로운 연결과 연대를 모색하려는 의지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보수적인 의미를 갖는 커뮤니케이션과는 달리 소통이란 개념이 혁명적인 뉘앙스를 갖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 p6
흔히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들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장자는 이런 주장에 단호하게 반대합니다.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진리를 창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자유는 종교, 국가, 자본 등 초월적 가치라고 생각되는 것들을 완강히 거부하고, 우리의 삶을 되찾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 p7
여행에서도 자신의 삶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드는 장소가 있듯이, 철학에도 삶을 성찰할 수 있게 하는 어떤 공간이 존재한다. 칸트의 용어를 빌리자면, 우리는 이러한 정신적 공간을 '초월론적 자리'(transcendental position)라고 명명할 수 있다. 여기서 초월론적 자리란 삶을 조망할 수 있게 해주지만, 여전히 임시적이고 유동적인 성격을 갖는 정신적 지평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 임시적 지평이, 삶을 조망하기 위해서 필요한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지평으로 간주될 때, 이제 '초월론적 자리'는 곧 '초월적 자리'(transcendent position)로 변질되고 만다. - p26
타자와의 마주침은 타자가 속한 시스템과 내가 속한 시스템 사이, 혹은 양자 간의 차이에 직면한 것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 p60
어느 경우든 타자의 발견이란 사건은, 나 자신이 나만의 규칙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과 동시적인 사태이다. - p68
국가와 종교는 모두 초월적인 목적이라는 달콤한 미끼를 통해 인간의 마음을 유혹하며 지배하려고 든다. - p78
기존의 삶의 규칙이 지닌 문제들은 오직 새로운 삶의 규칙을 통해서만 대상화되고 해소될 수 있는 법이다. - p79
유아론이란 타자가 배제된 담론 일반을 가리킨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유아론적 사유에서도 타자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유아론 속에서의 타자란 진정한 타자, 즉 타자성을 가진 우연한 타자가 아니다. 오히려 이때 타자란 주체의 생각 속에서만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관조된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 p124
자신이 옳다는 판단을 중지해야만 우리는 타자의 움직임에 맞게 자신을 조율하는 섬세한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 - p143
그런데 이런 옳고 그름의 특정한 사태는 타자의 결에 따라 언제든 민감히 반응할 수 있는 마음의 태도를 필요로 한다. 장자는 이런 마음이 자신의 판단을 비워 두는 것, 즉 부단한 판단중지의 사태로부터 가능하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원리, 즉 타자의 시비 판단에 따르는 것과 자신의 판단을 중지함으로써 마음을 비워 두는 것은 상호 불가결한 원리일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장자는 두 가지 원리의 병행인 '양행'을 강조했던 것이다. - p144
내가 판단중지의 상황이라고 풀이한 천균의 상태는, 단순히 고요한 상태의 마음을 의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이 상태는 빠르게 회전하는 물레의 모습처럼 강렬한 역동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역동성에 자신의 몸을 편안하게 맡긴다는 것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은 타자의 타자성에 부합될 때까지 부단한 판단중지를 수행하는 주체의 끈덕진 의지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판단중지의 상태에서만 타자에 부합되는 새로운 제안이나 행동을 마련할 수 있다. - p145
가령 라캉이었다면 장자가 천균과 도추의 개념을 통해서 묘사하고 있는 판단중지의 상태를 '실재적인 것'이라고 이야기했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네 가지 근본 개념들』에서 라캉은 '실재적인 상태'를 'PΛ-P', 즉 모순의 상태라고 규정한 적이 있다. 이것은 바로 장자가 이야기한 것처럼 "저것과 이것이 자신의 짝을 잃은" 상태, 즉 저것인지 이것인지를 구별할 수 없는 판단중지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라캉도 '상징적인 것'이 지배하는 꿈의 세계를 벗어나 현실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일종의 판단중지와도 같은 상태를 거쳐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이다. - p148
아이는 순진무구함이며 망각이고, 새로운 출발, 놀이,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 최초의 움직임이며, 성스러운 긍정이 아니던가. 그렇다! 창조라는 유희를 위해선, 형제들이여, 성스러운 긍정이 필요하다. 이제 정신은 자신의 의지를 원하고, 세계를 상실했던 자는 이제 자신의 세계를 되찾는다. - 니체,『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p149
이제 우리는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장자의 양행이란 것이 결국 사자의 원리인 동시에 아이의 원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직감하게 된다. 양행은 사자처럼 기존의 모든 사유를 판단중지하고, 아이처럼 언제든 타자와 민감하게 반응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천균'과 '도추' 개념에서 드러난 망각과 회전의 이미지를 통해 우리가 "순진무구함과 망각" 그리고 "스스로 도는 수레바퀴"라는 니체의 어린아이 이미지를 보게 된 것도 단순한 우연의 일치만은 아닐 것이다. - p150
단독자는 기존에 자신이 고집한 특정한 공동체의 규칙을 타자의 삶에 그대로 적용하기는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는 삶의 주체라고 할 수 있다. - p156
정화열이 말한 의미의 '존재'(existence)는 관례대로 '실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그의 지적처럼 어원 그대로의 실존의 "바깥"(ex)을 향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존의 중심은 그 자신에게 있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타자에, 좀 더 정확히 표현하면 주체와 타자 사이에 있게 된다. 바로 이것이 그가 말한 '탈중심'의 의미이다. 그런데 바로 이런 '탈중심적 존재'야말로 장자가 강조한 단독자의 의미를 담고 있다. 단독자도 외부로 향해 있는 주체, 혹은 타자와 마주치는 주체를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 p156
망각이란 항상 "비움"이라는 개념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다. 이런 공백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와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을 확보할 수 있다. 이 점에서 공백은 타자를 담을 수 있는 열린 공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 p157
'심재'란 글자 그대로 '마음을 재계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결국 심재는 마음의 작용을 금욕적으로 절제하는, 즉 마음의 비움이나 망각을 가리키는 수양론의 일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장자도 '비움'이란 바로 '마음의 재계', 즉 '심재'라고 직접 설명했던 것이다. - p183
만약 맹목적으로 따르고 있는 아비투스가 자신이나 타자의 삶을 증진시킬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꿈이라고 조롱받을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꿈이라고 불리는 이유는, 기존의 모든 공동체가 자신이나 타자의 삶을 부정하는 방식으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 p190
장자만큼은 도란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걸어간 뒤에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분명히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장자의 도는 발견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 p211
"귀로 듣지 말고 마음으로 들어라. 다음에는 마음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어라." 이미 우리는 기로 듣는다는 것이 타자로부터 나오는 수많은 미세한 소리들을 민감하게 지각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 p2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