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는듯 천천히-해마다 추석을 일주일 앞두고 벌초를 하러 간다. 올해도 마찬가지. 큰집 형이 다리를 다쳐 이번엔 같이 갈 수 없게 되었다. 들러야 할 곳이 여러 군데라 부모님이 하루 먼저 가 몇군데를 들러 놓았다. 덕분에 수월케 끝냈지만 사실 여름을 지나온 벌초는 정글탐험이 따로 없다. 남의 감나무 산 중간에 덩그러니, 그것도 멧돼지 쫓으려 설치해 둔 전기 울타리 바로 옆 수풀과 대나무를 걷어내며 아버지가 으레 또 한마디 하신다. 너네 어렸을땐 여기 모두 나 혼자 했노라고. 감나무 산을 내려와 내팽겨쳐진 옻나무 밭과 고사리 밭을 옆으로 사잇길로 다시 올라가다 보니 알밤이 눈에 밟힌다. 고개를 들어 둘러봐도 밤나무는 없다. 한참을 더 들어가 미끄러지기 딱 좋은 진흙 오르막을 지나면 밤나무 아래 둥그런 풀숲이 눈에 보인다. 예초기를 돌리고 나면 아버지는 으레 또 한마디 하신다. 아비 어렸울 적 할아버지와 둘이 와서 했노라고. 매년 듣는 레퍼토리였을 것이다. 그때마다 굴곡진 귓등으로 흘렀겠지. 늘 흐르다 새삼 귓속으로 들어온다. 아버지에게 벌초하러 오는 길은 추억을 만나러 오는 길이였다는 걸. 20대엔 몰랐다 매일이 영화같을 수 있다는 걸. 새소리와 사람소리, 버스소리. 아침 티비소리부터 오후 학교종소리, 새벽빛 눈부심. 일상 속에 감정들이 다양하게 담겨져 있다는 걸 몰랐다. 인생의 영화는 내일 언젠가 터질 플래쉬와 같을 줄 알았지. 이 사람의 영화를 몇편 보고나서 무엇인가 바꼈다. 마음이. 걷는듯 천천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