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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로알드 달 지음, 정영목 옮김 / 강 / 2005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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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적 할머니께 전해 듣던 옛 이야기는 주로 무서운 이야기들이었죠. 한 여름밤에 듣는 오싹한 이야기는 무서우면서도 궁금한, 묘한 매력을 가졌어요. 할머니의 옛 이야기뿐 아니라 그림형제나 안데르센, 페로의 동화도 원래는 굉장히 무섭고 잔인한 이야기니까요. 우리는 무서운 이야기에 끌리는 면이 있나봅니다. 하지만 옛이야기 속 환상은 무서운 이야기에만 있는 건 아니에요. 낡고 투박한 이야기라도 누가 들려주느냐에 따라 환상적으로 들리기도 하니까요.
로알드 달의 어떤 이야기들은 낡고 투박한 모자 같아요. 오래되서 낡고 헤진 마술 모자 말이에요. 하지만 우리는 검은 마술 모자에 익숙해져 있지요. 이건 할머니의 마술 모자에요. 그 속에는 비둘기며, 토끼며, 기다란 지팡이, 엄청 많은 꽃가루 등등 없는 게 없어 보여요. 사실 검은 마술 모자 속에서 나오는 것도 알고 보면 다 거기서 거기인데 말이에요. 그래도 우리는 마술사가 이끄는 데로 마술 모자 속의 환상을 즐기죠. 수 많은 이야기들이 검은 마술 모자 속의 놀라움처럼 우리에게 온갖 환상을 보여준답니다. 재밌는 이야기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감이라고 할 수도 있어요. 로알드 달 역시 수 많은 이야기의 마술사 중 한 명이에요. 혹은 아닐 수도 있고요. 낡은 마술 모자를 가진 마술사는 흔치 않으니까요.
로알드 달의 단편집 <맛>은 몇 개의 단편으로 엮인 평범한 단편 소설집이에요. 그리고 <맛>이란 제목은 여러 단편 소설들 중 하나인 ‘맛’의 제목을 그대로 사용한 것이고요. 여러 단편들에는 내기가 등장해요. 단편 ‘맛’에서도 내기가 등장하죠. 어느 저녁식사에서 미식가와 집 주인이 딸을 걸고 벌이는, 말 그대로 맛 내기이죠. 이 내기의 결과야 어찌됐든 이 책의 제목을 <맛>으로 한 건 정말 좋은 선택이에요. 이 책에서 느껴지는 이야기의 맛!이 정말 끝내 주거든요. <맛>은 우리를 현혹하는 기괴한 생물이나 신비로운 숲 없이도 낡은 듯 하지만 묘한 매력을 뿜어내는 이야기들이죠.
여러 편의 이야기가 서로 다른 맛을 내지만, 단편 ‘맛’ 이야기가 나왔으니 이것 하나만 이야기해보죠. 사람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한 마이크는 절대 맞출 수 없을 거라는 호언장담과 함께 미식가에게 내기를 제안합니다. 원하는 건 뭐든 좋다는 조건으로요. 미식가는 그의 딸이 마음에 드나 봅니다. 그의 딸을 원하죠. 경멸하며 반대하는 딸과 부인을 뒷전에 두고, 자신감에 찬 마이크는 그 제안을 받아들입니다. 미식가는 집을 걸었고요. 하녀가 들고온 포도주가 잔 속으로 따라지고 미식가는 그 빛깔과 향, 첫맛과 끝맛을 아주 조심스레 음미합니다. 그는 천천히 어느 지역, 어느 농가에서 언제 생산된 어떤 등급의 포도주인지 사람들에게 안내하듯 맞춰가죠.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여느 모험소설에도 뒤지지 않는 흥미진진함이 느껴져요.
결국 미식가는 그 포도주의 생산년도와 이름, 지역, 농가 등 아주 정확하게 맞춰버립니다. 내기에서 이겼어요. 그럼 딸은 어떻게 되냐고요? 어떻게 되긴요. 아버지가 내기에서 졌으니 늙고 탐욕스런 미식가에게 시집가게 되었죠. 이게 이야기의 끝이냐고요?
제가 말했잖아요. 로알드 달은 마술사라고.
낡은 듯 투박하고 털털한 이 모자의 속이 궁금하다면 주저말고 책을 펼치세요. 로알드 달의 이야기 맛을 제대로 음미하려면 첫 맛부터 끝 맛까지 어느 하나도 놓쳐서 안될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