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월은 붉은 구렁을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북폴리오 / 2006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삼월은 붉은 구렁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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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표지 책등에 검은 글자로 새겨진 제목, 《삼월은 붉은 구렁을》. 책은 하나의 우주이며 새로운 세계라고도 하죠. 이 책은 오묘하고도 환상적인 또 하나의 세계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그 세계는 다시 ‘책’이라는 아주 매력적인 소재를 이야기 하고 있죠.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관한 네 가지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책은 우리가 손에 쥐는 실제의 책이자, 이야기 속의 주 소재로 다뤄지는 책이기도 하죠. 소재로서의 책에 관한 이야기를 실물로서의 책을 통해 보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 같은 경험을 하게 되는 겁니다.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책을 통해서 말이에요. 이 책의 네 가지 이야기 중 첫 번째 <기다리는 사람들>을 통해 우리는 책이라는 물건 그 자체에 대해, 그리고 책을 읽는 행위와 책을 읽는 사람들, 책을 읽는 사회에 관한 이야기들을 듣게 됩니다.


책에 관해 이렇게 흥미로운 이야기는 흔하지 않아요. 사실 별 생각 없이 읽기 시작했다가 50페이지 정도에서 탁! 하고 책을 덮었어요.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기 때문이에요. 이런  일은 스토리가 강한 소설, 특히 쥘 베른 식의 모험 소설을 읽을 때 경험하곤 하는데요,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기대감으로 페이지를 단숨에 넘기는 게 아니라 아껴서 천천히 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에요. 하지만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쥘 베른의 이야기를 읽을 때와는 또 달라요. 쥘 베른의 이야기가 놀이기구에 올라타 이야기를 경험한다면, 『‘삼월은 붉은 구렁을』은 마치 우연히 들른 바에서 낯선 이가 건네는 이야기에 빠져드는 느낌이죠. 그런 상황 자체만으로도 매력적이지 않나요?!


뭘까, 이 느낌은. 아득한 기억을 일깨우는 이 감각은. 따뜻한 집 안에서 테이블을 둘러싸고 낯선 이야기의 줄거리를 듣고 있다. 이런 상황에 유난히 기시감을 느끼는 것은 단지 착각일까. 문득 잔잔한 감동이 밀려왔다. 다른 사람의 입에서 이야기를, 픽션을 듣는 것이 대체 몇 년 만인가.

커피 향과 브랜디 향. 그때 고이치는 문득 ‘지복’이라는 말을 생각했다. 어두운 밤, 따뜻한 실내에 앉아 재미있는 이야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아마도 먼 옛날부터 세계 곳곳에서 있어 왔을 행위. 역시 인간이란 픽션이 필요한 동물이다. 인간과 동물을 구별해 주는 것은 바로 그 한가지뿐일지도 모른다.


-P52


네 편의 서로 다른 이야기들 중에서도 저는 첫 번째 <기다리는 사람들>이 유독 좋았어요. 앞서 말했듯 책 그 자체의 매력에 관한 이야기거든요.

평범한 샐러리맨 고이치는 매년 열리는 회장의 요상한 다과회에 초대됩니다. 그리고 그 곳에서 회장과 그의 세 친구들과 함께 《삼월은 붉은 구렁을》이란 책에 관해 이야기를 듣게 되죠. 고이치는 그들로부터 책에 관한 어떤 비밀을 풀어보라는 제의를 받죠. 그건 일종의 내기이기도 하고요. 그리고 그들의 내기에 고이치도 동참합니다. 고이치가 비밀을 푸느냐 못푸느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건 회장과 그 친구들이 나누는 대화에요. 이 네 사람은 고이치에게 《삼월은 붉은 구렁을》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며 마치 ‘재밌는 이야기란 무엇일까?’라는 질문에 대해 각자 흥미로운 대답들을 내놓는 듯하죠. 그 대답들은 그들의 대화 속에 녹아있고요. 그 대답들이야말로 진정한 비밀일지도 모르죠.


상상해봅시다.


당신이 도서관으로 들어섭니다. 거대한 고요함 속에 빼곡히 진열된 책들이 당신을 주목하고 있어요. 책들은 속삭입니다. 내가 재밌는 이야기야. 당신은 수 천 권의 책 중 어떤 걸 고를까, 고민합니다. 그러다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겁니다. 이 책은 왜 재밌는 걸까, 재밌는 이야기를 구성하는 건 어떤 걸까, 재밌는 이야기란 대체 뭘까. 고이치와 회장 친구들이 던진 질문이며 그들 각자만이 답할 수 있는 문제지요. 당신에게도 당신만의 대답이 있을 겁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당신이 느끼는 뭔가가 회장과 친구들이 나누었던 비밀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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