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 슬립

빅 슬립 ㅣ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

사립탐정인 필립 말로는 돈 많은 스턴우드 장군에게 사건 하나를 의뢰 받게 되죠. 겉으로 보기에는 그저 단순한 협박 사건 같아 보이지만 중심으로 다가갈수록 사건은 복잡해집니다. 스턴우드 장군과 첫째 딸과 그 사위, 그리고 둘째 딸. 그들 사이에서 필립 말로는 사건의 언저리를 맴도는듯 보이지만 점점 중심으로 파헤치고 들어갑니다.

사건을 풀어가는 동안 필립 말로에게 호의적인 사람은 단 한명도 없죠. 경찰과도 사이가 안좋은 데다가 사건의 연루자들은 하나같이 양아치와 건달들이니까요.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필립 말로는 겨우 일당 25달러만으로 이 골치 아픈 사건을 풀어 가죠.

왜일까요?

필립 말로가 으리으리한 저택에 사는 스턴우드장군에게 푼돈만을 받고도 적극적으로 사건에 뛰어드는 건, 장군이 의뢰한 협박건 이면에 스턴우드 일가를 둘러싼 석연치 않은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죠!   

흔히 사람들은 필립 말로를 현대적 사립 탐정의 전형적인 캐릭터로, 레이먼드 챈들러를 하드보일드 소설의 전형적인 작가로 설명하곤 하죠. 하드보일드라는 단어를 찾아보면 비정하고 냉혹하다는 뜻이 나오기도 하며 ‘계란 완숙’이란 말도 나오죠. 사실 냉혹하다거나 비정하다는 묘사는 필립 말로랑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요. 그보다 필립말로는 냉담한 훈련교관에서 비롯되었다는, 빳빳하게 다림질한 제복의 깃을 뜻하는 하드보일드가 더 어울리네요.

하드보일드는 하나의 장르라기보다는 스타일이죠. 하드보일드와 비슷한 스타일로 느와르가 있어요. 느낌상 얼핏 비슷해 보이지만 느와르는 하드보일드와 조금 달라요. 불어로 검은색을 뜻하는 느와르는 갱스터 영화와 만나 ‘필름 느와르’라는 장르로 발전하게 되죠. 하지만 필립 말로를 보면 하드보일드는 회색에 가깝다는 생각이 들어요. 무미건조한 시멘트같은 이미지이죠. 필립 말로는 다른 소설들의 탐정들보다 철저히 객관적으로 사건을 마주하죠. 마치 관객인것처럼 말이에요. 단순히 검다, 희다로 구분되지 않아요. 같은 무채색이더라도 검은색은 검을 뿐이지만 회색은 그 나름대로의 계조을 가지고 있죠. 이런 회색은 세련되어 보이는 동시에 애매모호하기도 하지요. 특히 소설 속에서 스턴우드 장군의 사라진 사위 리건을 찾고 있는게 아니냐는 여러 인물들의 추측에도 필립 말로는 매번 아니라고 대답하죠. 상대방으로 하여금 필립 말로가 이 사건을 왜 쫓고 있는지 알 수 없게 만드는 대목이에요.

레이먼드 챈들러는 1939년 <빅 슬립>을 발표합니다. 추리 소설의 흐름을 보면 그보다 앞서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고 챈들러 이후에도 많은 이야기들이 나왔죠. 하지만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만큼 회색에 어울리는 캐릭터는 찾기 힘든 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