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미친 사람들 - 카렐 차페크의 무시무시하게 멋진 스페인 여행기 흄세 에세이 6
카렐 차페크 지음, 이리나 옮김 / 휴머니스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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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와 함께 체코 출신 최고의 작가로 뽑힌다는 카렐 차페크. 그의 작품을 접한 건 이번이 처음인데 무려 1920년에 형과 함께 쓴 <R.U.R.>이라는 희곡에서 '로봇'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던 작가라고 한다('강제노동'이라는 의미의 체코어 '로보타'에서 따온 용어란다). 소설, 에세이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다양한 작품 활동을 했던 이 분이 쓴 여행기가 이번에 처음으로 국내 초역이 되었다고 해서 읽어보았다.


   1930년에 쓰인 스페인 여행기라 지금의 스페인과는 거리가 멀지 않나 생각했는데 여행기록의 초점이 문화, 예술, 자연풍광 등에 집중되어 있어 사실 지금 읽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특히 벨라스케스, 엘 그레코, 고야를 비롯 예술가들과 작품들에 과한 글들은 스페인에서 그들의 그림을 본 적이 있는 독자라면 놀랄 정도로 통찰력 있는 견해를 제시하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스페인의 '투우'에 관한 것이었는데, 투우 경기의 잔인함(그저 오락을 위해 수많은 황소들이 죽음을 당한다)과 스페인에서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전통 문화로서의 관점 사이에서 느끼는 복잡한 감정이 글에 잘 녹아있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현재 관점으로서의) 여행기 형식은 아닌지라 막 와닿지 않은 부분도 있기는 했다. 특히 가보지 않은 장소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는 작가의 흥분과 떨림, 열정 같은 것들을 온전히 공감하기는 어려웠지만 작가의 묘사능력이 워낙 탁월한데다 작가가 직접 그린 일러스트가 상상력을 발휘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스페인 여행을 마무리 하면서 쓴 마지막 부분은 많은 생각거리를 남겨주었다. 아마도 작가가 광기의 나치즘 시대를 살았던 사람이라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우리에게도 충분한 일침이지 않을까. 요약해서 인용해 보자면,


...(중략) 스페인 사람들이 정말로 스페인 사람다워서 우리는 무척 기뻤습니다..(중략)..세상에는 수천 가지 모습이 존재하고 그 모습이 다 다르다는 사실 때문에 세상을 좋아하게 되는 게 한층 더 즐겁지 않을까요?...(중략)..모든 차이점은 그 자체로 소중히 여겨질 자격이 있기 때문입니다. 차이가 있기에 우리 삶의 지평이 넓어집니다...(중략) - p218-219


*참고로 '조금 미친 사람들'이라는 번역 제목은 작가가 엘 그레코를 묘사하는 부분에서 나온 말이다. 원제는 그냥 <Trip to Spain>. 엘 그레코를 미쳤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말하면서 '눈이 자신의 비전에 열정적으로 고정된 사람은 모두 조금 미친다'고 했다.

* 이 책은 체코어로 쓰여진 걸 영어로 번역한 것을 다시 번역한 것이다. 영어를 거치지 않고 직접 번역하면 어떤 글이 나올까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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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의 원전 - 다빈치에서 파인만까지 인류 지성사를 빛낸 원전 기록들
존 캐리 엮음, 지식의 원전 번역팀 옮김 / 바다출판사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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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책이 왔네요! 알라딘 북펀드는 책을 선정하는 것부터 퀄리티가 다릅니다. 천천히 읽어보면서 인간 지성의 위대함을 느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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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끗 어휘력 - 어른의 문해력 차이를 만드는
박선주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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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임말이나 소리나는 대로 쓰기가 온라인에서 너무나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되는 것에 약간의 우려가 있는 나는 꼰대일까? 사실 그런 우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나 역시 많이 사용하게 된다. 온라인 메신저의 특성 상 줄임말은 상대방의 이해를 전제조건으로 한다면 그걸 풀어서 쓰는 수고를 덜어주고 맞춤법에 맞지 않는 소리나는 대로 쓰는 방식은 구어체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 딱딱함을 없애주기도 하고 뭔가 친밀감도 느껴진다. 다만 문제는 그런 어휘들의 올바른 표현을 알고 그런 표현들이 통용될만한 공간에서만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끔 티비에서 연예인들의 맞춤법이 논란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연예인들의 몰상식을 비웃는 나는 얼마나 적절한 어휘를 사용하고 있을까 자문해 보는 건 어떨까. 그런 의미에서 <한 끗 어휘력>은 나의 어휘 실력을 점검해 보는 적당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평소 책을 자주 읽는 사람이라면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는 어휘들로 이루어져 있기는 하지만 진짜 헷갈리는 표현들을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어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내가 완전 잘못 알고 있는 어휘도 있었고 아..이래서 사람들이 헷갈려 하는구나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설명이 잘 되어 있다.


   예를 들어, 안주 일절과 안주 일체라는 어휘를 살펴보자. 당연히 안주 일체가 맞다. 일절은 어떤 행위나 일을 하지 않을 때 쓰는 표현이잖은가. 그런데 왜 어떤 술집에는 안주 일절이라고 써있을까? 알고보니 '일절'과 '일체'의 한자가 같다. 둘 다 一切을 쓰는데, 切이라는 한자가 '끊을 절'과 '모두 체'라는 2가지 뜻과 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한자만 보고 어떤 곳은 일절, 어떤 곳은 일체라고 써놓았던 것이다.


   내가 완전 잘못 알고 있었던 건 바로 '대'와 '데'였다. 설명을 읽은 지금도 여전히 헷갈리기는 하지만 이젠 '데'도 문장의 마지막에 사용될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는 문장의 마지막에는 무조건 '대'만 가능한 줄 알았다. 예를 들어 '이번에 보니 걔는 옛날이랑 똑같더라'라는 말을 '옛날이랑 똑같데'라고 할 수는 있어도 '옛날이랑 똑같대'는 사용할 수 없다. '대'는 내가 어떤 말을 다른 사람에게 듣고 그것을 다시 다른 사람에게 전달할 때 쓰는 어휘이고 (예를 들어, 일기 예보를 보니 내일은 비가 온대 - 내가 들은 일기 예보를 다른 사람에게 말할 때) '데'는 내가 과거에 직접 보거나 겪은 일을 상대방에게 말할 때 쓰인다. 안틀린 사람 찾기가 더 힘들다는 '대'와 '데'. 여전히 헷갈리지만 앞으로는 사용할 때 생각은 한 번 해보고 쓸 수 있을 듯 하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누군가 '심심한 사과'라는 표현을 썼는데 왜 심심하게 사과를 하냐는 답변을 받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다. 그리고 '중식 제공'이라는 표현에 왜 한식을 안주고 중국 음식을 주냐는 대답도 있었다고 한다. 그래, 뭐 좋은 우리 말이 있는데 왜 한자를 써서 무식한 사람 만드냐고 할 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바는 한자 자체가(여기 한자 잘 모르는 일인 있습니다) 아니다. 한자이긴 하지만 여전히 지금도 통용되고 있는 어휘라면 이해 정도는 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옷만 TPO를 따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어휘 역시 TPO가 있고 바로 그 '한 끗 어휘력'이 문해력 차이를 만든다. 대화를 하면서 단어나 표현이 생각나지 않아 '거시기'를 남발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으로 시작해 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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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한 건물 탐방기 - 노노하라 작품집
노노하라 지음, 김재훈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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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어렸을 때 이런 상상 안해 본 사람 있을까? 나만 아는 비밀의 공간이나 나무 위나 바다 속 혹은 하늘 위에 집을 짓고 사는 그런 상상말이다. 미술 실력이 비천하다보니 그런 상상을 그림으로 그릴 생각은 못했어도 엄청 구체적으로 어떻게 만들 것인가에 대해 고민했던 기억이 있다. 물론 건축학 따위에 지식이 있었을리는 만무하니 그저 내 마음대로 지어진 상상 속 공간이긴 하지만 나만의 공간을 상상하는 자유를 맘껏 누렸더랬다. 그 상상도가 내 눈 앞에 펼쳐졌다. 그것도 집 한 채나 방 하나가 아니라 세상 하나가 만들어졌다. 저자는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인디게임 개발자로 평소 SNS에 '멋진건축'을 주제로 멋진 상상 속 풍경들을 제작하여 올렸다고 한다.


이 멋진 환상 속 세상을 여행하는 주인공은 배달을 생업으로 하는 포터 돼지이다. 돼지가 여행하는 세상은 저자의 손끝에서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마치 '왕자의 게임'을 생각나게 하는 지명부터(거인의 손바닥, 수인의 숲, 대륙의 덮개 등등) 재미있는 건물 이름(혼돈의 집단 주택, 협곡의 피체리아, 낭떠러지 민박 등등)도 흥미롭지만 이 책의 가장 하이라이트는 이런 장소들에 대한 자세한 단면도와 설명이다. 상상의 장소라고 이미 알고 있음에도 뒤따르는 설명이 너무 현실적이고 그럴싸해서 진짜 어디에 있는 공간이지 않을까라는 착각을 하게 된다. 게다가 엄청 사소하고 소소한 것에까지 신경을 쓴 흔적은 어렸을 때 별거 아닌 것으로 고민하고 결정을 하지 못했던 내 상상 속 공간을 생각나게 한다.


책에 등장하는 장소나 건물들의 구조는 대체적으로 미로처럼 복잡하다. 그래서 그림 세부도 역시 엄청난 복잡함을 자랑하는데 완전 내 취향이다. 컬러링도 복잡하고 섬세한 것을 좋아하는 내 취향에 딱이다. (그러고보니 내가 절대 미니멀리즘을 실천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한 듯) 이런 세계를 창조해 내는 것도 어렵고 그걸 일러스트로 하나하나 표현해 내는 건 더 어렵겠지만 사랑스러운 포터 돼지가 배달도 하고 여행도 할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요, 작가님?


* 사진은 알라딘 책 소개에서 가져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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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비밀 강령회
사라 페너 지음, 이미정 옮김 / 하빌리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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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의 전작인 <넬라의 비밀 약방>도 18세기 런던이 주요 무대였는데 이번에도 빅토리아 시대의 런던이 배경인 걸 보면 저자는 18-19세기 런던, 여성의 활동이 그리 자유롭지 못하던 시대에 우회적으로 여성들이 강한 영역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보인다. 전작은 18세기와 현대의 런던을 오가는 형식이었는데 18세기 독극물을 제조하는 약방 이야기는 매력적이었던 반면 현대의 런던 이야기는 좀 식상했던 면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빅토리아 시대 +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런던의 음울한 분위기 + 죽은 자를 불러내는 강령회라는 오컬트까지 합쳐지니 전작보다 괜찮았다.


   사실 지금도 미신을 믿는 이들이 많기는 하지만 당시는 미신이 훨씬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였던 시대인지라 사람을 속이기도 그만큼 쉬웠을 것이다. 거기에 죽은 자를 끌어들여 남은 자의 슬픔을 이용한 사기행각이 많았을 것이라는 것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신사들 전용이자 회원제로 운영하던 폐쇄적인 런던 강령술 협회의 사기행각을 두 여성 영매가 밝혀내고 거기에 얽힌 살인 사건까지 해결한다는 내용이 주된 이야기인데 클래식 추리소설에 등장할 법한 클리셰들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 예측 가능함이 진부하다기 보다는 친숙하게 다가온다.


   책에 나오는 죽은 자를 불러내는 '강령회 7단계'는 매우 그럴싸 했는데 사실은 저자의 창작이라고 한다. 책의 말미에는 빅토리아 시대의 장례 문화와 음식에 대한 짤만한 글과 더불어 유령을 불러내는데 필수 소품인 양초 만드는 법이 나와있다. 책 속에선 사기수법 중 하나인 속임수 양초가 등장한다. 속임수 양초는 양초의 아래 부분에만 고인이 평소에 좋아했던 향이나 고인을 떠올리게 하는 향을 추가해서 양초가 어느 정도 타고 나면 죽은 자를 소환하는 단계와 향이 추가된 양초가 타는 시간을 잘 맞추어 죽은 자가 방에 있다는 느낌을 심어주는 사기 수법 중 하나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는 보델린과 레나의 애정 전선이 굳이 필요했나 싶기는 하지만 저자의 전작(학대받는 여성들을 위해 독약을 제조해준다)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으로 이해하기로 한다. <블라이 저택의 유령>이라는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고나니 이건 '유령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이야기'인가 싶기도. (아..오해금지를 위해 한마디 - <블라이 저택의 유령>과 이 책을 비교할 건 아니다. 그저 <블라이 저택의 유령>을 보고 난 여운이 아직 남아서 이 말을 써먹어보고 싶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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