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본만 나눠 앞부분만 편집하고는 시간 관계상 이 부분은 나중에 편집할 예정입니다)

 

 

<뒷창문>은 이런 관찰자와 관찰 대상간의 거리(간격/공간)에 대하여 탐구하고 있다. 제프와 건너편 아파트간에는 마당이 거리를 유지하지만 또한 망원렌즈나 쌍안경도 그 역할을 한다.  관찰행위는 욕망을 순수한 시각행위로 전환시키기 때문에 제프의 망원렌즈는 욕망과 시각행위의 이중적 의미를 보여주는 상징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거리는 바라보는 행위에 대한 잠재 의식적 죄책감뿐 아니라 대상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건널 수 없는 심연 때문에 무력감이나 외로움을 낳는다.  상대방이 모르는 상태에서 일방적인 시선을 던지는 관찰자의 편파성 때문에 관찰자는 자신이 엿보는 죄를 범하고 있는 피핑 탐(Peeping Tom)임을 보게된다. 제프/관찰자/관람자가 대상에게 던지는 시선과 관심은 결코 응답 받지 못하기에 그는 자신의 행위를 관음증적인 행위로 경험하며 자신을 피핑 탐과 동일시하게 된다. 그리고 죄책감 때문에 자신도 누군가에 의해 낱낱이 감시되고 있다는 느낌을 가진다.  <뒷창문>에서 바른 소리를 잘하는 제프의 간병인 스텔라(Stella: Thelma Ritter)는 상대편 아파트를 바라보고 있는 제프를 피핑 탐이라며 나무란다.

스텔라에게서 피핑 탐이니 “쇼윈도 밖에서 구경만 하는 손님(window shopper)"이라고 비난받는  제프는 “그 사람들도 원하기만 하면 유리상자 밑의 곤충을 관찰하듯 날 바라볼 수 있지”(they can ... watch me like a bug under glass, if they want to)라고 말함으로써 자신도 관찰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이 말은 단순한 죄책감에서 오는 느낌 이상의 의미를 이 영화에서 가지게 된다.

”엿보기 행위는 욕망을 순수한 시각행위로 전환시키는데“ 이때 관찰자의 “보이지 않음”이 그의 시각 대상의 “보임”을 가능케 한다. 보여지는 대상이 관찰자에게 무해하고 안전한 존재가 될 수 있게 보장해주는 프레임/창은 바라보는 행위가 은밀한 한(관찰자가 숨어있는 한) 부셔지지 않는다. 그러나 후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히치콕은 이 영화에서 관찰자/관람자와 대상간의 시선의 일방성과 안전한 거리를 무너뜨리고 있다. 제프의 감시대상이던 토월드가 프레임을 부수고 밖으로 나와서 관찰자인 제프의 방으로 침입해 그를 창(프레임) 밖으로 밀어냄으로 스텔라의 말대로 제프가 밖에서 자기 자신의 방을 들여다보게 되는 이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위에 인용한 제프의 말에서 “그들(they)”은 자신의 관찰 대상인 아파트 사람들은 이야기 하지만 더 나아가 자기를 지켜보는 영화의 관객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영화의 주인공 제프의 관찰대상은 관객이라는 의미이며 동시에 그를 공격하는 토월드는 관객의 영화에 대한 공격이기도 한 것이다. 

  이러한 시각(관찰)과 관찰의 대상, 예술과 예술가의 관계에 대한 탐구는 그림에서도 많이 발견된다. 예를 들어 바로크미술의 거장 벨라스케즈의 「큐피드와 뷔너스(Cupido & Venus)」는 미의 여신 뷔너스의 비스듬히 누운 나신의 뒷모습을 그리고 있다. 그녀는 큐피드가 들고있는 거울을 바라보고 있다. 당연히 거울에는 그림에 나오지 않은 그녀의 앞모습, 혹은 그녀가 비쳐보는 자신의 얼굴이 나와야 한다. 그러나 관람객이 그림의 거울 속에서 마주치는 것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비너스가 아니다. 그녀의 시선은 자신의 얼굴을 보고있는 것이 아니라 뜻밖에 관람객의 눈과 마주치고 있는 것이다. 돌연 관람객과 그림 속의 대상사이의 안전하고 일방적인 거리감이 사라질 뿐 아니라 그림 속의 시선의 대상은 프레임 속에 갇혀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궁녀들(The Maids of Honor)」에서는 화가가 화면(프레임)속에 그의 그림의 대상들과 함께 등장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화면속에서 화가는 모델들을 바라보며 그림을 그리고 있지만 그림은 화가가 바라보는 시선이 아니라 관객이 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그려지고 있는 구도를 가진다. 즉 관객이 그림의 영역에 같이 포함되어있는 것이며 오히려 화가는 관객을 그리고 있다는 느낌을 가지게 된다.  결국 관람자(관객)과 관찰의 대상간의, 그리고 예술과 현실간의 끝없는 상호 교류에 대한 생각은 모든 예술의 장르에서 늘 관심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 영화에서 창은 카메라 렌즈, 영사기, 영사기부스의 창, 눈, 그리고 세상을 향한 창인 영화 자체까지 영화의 다양한 “창”을 의미한다.  제프의 방에서 보이는 건너편 아파트 직사각형 모양의 창틀(프레임)은 영화필름의 한 프레임을 연상시키며   이 프레임 속에서 보여지는 사람들의 삶은 영화이다. 그런데 그 ‘영화’는 제프의 방에서 일어나는 제프-리사의 관계와 묘한 심리적 연관성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제프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관람하는 창(영화)은 원망충족(wish-fulfillment) 혹은 대리만족이라는 의미에서 꿈과 같다.

사실 제프는 자다깨다를 반복하면서 이웃을 관찰하고 엿보게 된다. 씬이 바뀔 때, 새로운 화면과 사건이 프레임에 담길 때 마다 거의 대부분 카메라는 제프의 잠든 모습을 담아내고 그가 잠에서 깨어나면 제프의 눈을 따라 다시 카메라가 움직인다. 석고붕대를 하고 움직일 수 없는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그는 마치 몸은 살아있으나 의식은 죽어있는 사람들(the living-dead)로 대변되는 황무지 인간처럼 수동적이며 반 수면상태이다. 그가 잠에서 깨어나는 장면은 잠에서 현실로 깨어나는 것인지 무의식의 수면상태에서 꿈의 세계 속으로 깨어나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어두운 공간 안에서 스크린 위의 그림자 인간들을 바라보면서 현실의 고통과 단절된 채 영화를 보는 행위는 꿈을 꾸는 행위와 흡사하며 또한 영화는 꿈처럼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인위적인 퇴행(regression)현상을 만들어 낸다. 영화 평론가 스탐과 피어슨의 말대로 영화는 심리발달의 초기단계로 돌아가고 싶은 무의식적인 욕구의 구체적 실현, 즉 유사 나르시시즘의 상태이다. 그 속에서 욕망은 가상현실을 통해 “충족”된다.


꿈이 전치, 압축 등 다양한 작업(dream work)을 통해 연출/위장되어 나타나듯이 영화도 다양한 위장/환상으로 우리의 무의식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히치콕은 사람들의 엿보기 심리뿐 아니라 보여주고 싶어하는 심리(배우가 되고 싶은 심리)인 노출증도 이 영화에서 다루고 있다. 일상적인 동작들 마저 비키니 차림으로 춤을 추면서 퍼포먼스를 행하고 있는 미스 토오소, 같은 의상을 두 번 입지 않는 리사, 그리고 심지어 레스토랑의 커다란 창 앞에 앉아 누군가의 시선을 끌고자 하는 고독한 로운리하트의 행동은 모두 노출증의 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은 그들의 억압된 욕구를 영화(꿈/환상/시뮬레이션의 공간)속에서 실현시키고 싶어한다. 직접 겪는 것 보다 안전하기 때문이다.  안전한 거리를 두고 안전한 현실공간에 남아서 자신들의 욕망을 스크린에 투사하고는 주인공을 통해 대리 만족을 선택한다. 현실도피의 장소로 영화관을 찾는 대표적인 문학 속의 인물인 테네시 윌리암스의 『유리동물원』에 나오는 탐은 이렇게 말한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활동하는 대신 활동사진을 보러 간다구.  할리우드영화 속 인물들은 모든 미국인들을 위해 온갖 모험을 다 겪어야해. 그러면 우리들은 어두운 영화관에 앉아서 그들이 겪고있는 모험을 바라보는 거지!"

제프의 경우 그의 욕구가 투영된 프레임속의 인물들은 미스 로운리하트이며 또한 리사처럼 남편에게 계속 무언가를 요구하는 금발의 아내를 둔 세일즈맨이다.  이 영화에서 제프가 지켜보는 아파트의 사람들은 마치 그가 연출하는 영화(꿈)의 주인공인 것처럼 모두 제프가 지어준 이름으로 불린다.  리사가 화면에는 보이지 않는 가상공간 부엌에서 최고의 식당에서 배달해온 가제요리와 와인을 차리는 동안 제프는 창으로 눈을 돌려 ‘보이지 않는’ 가상의 방문객에게 저녁식사를 대접하는 로운리하트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녀가 물체화 되지 않은 원망(願望)의 대상을 향해 건배를 할 때 제프는 혼자 그녀를 향해 건배를 한다. 물론 로운리하트의 가상의 방문객과의 건배처럼 그의 감정적인 접촉의 시도인 건배도 응답 받을 수 없는 ‘접촉없는 접촉’이다.  이것은 따뜻한 체온으로 다가오는 리사와의 접촉에서 경험하는 ‘감정적인 거리감’과 그 때문에 제프가 느끼는 외로움, 소외가 투영된 것임을 말해준다.

리사의 적극적인 구애와 논쟁에서 피하고 싶을 때마다 제프는 리사를 외면하고 시선을 돌려 건너편 화면(창)을 바라본다. 수벌에 둘러싸인 여왕벌 같은 미스 토오소(Torso)의 방, 그리고 지병 때문인 듯 침대에 누워 계속 잔소리를 하는 아내와의 불행한 결혼에 묶인 토월드네 아파트는 모두 제프와 리사 두 사람의 관계 속에 잠재된 불행의 가능성을 투영하고 있는 듯하다. “너무나 완벽하고, 너무나 재주도 많고, 너무나 아름답고, 너무나 세련되고, 한마디로 [제프가] 원하는 것만 빼고는 모든 점에서 너무 완벽한” 리사와 달리 무용수 토오소는 제프의 이상적인 여성처럼 보인다. 압도당할 두려움이 없어서일까, 제프는 항상 편안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쳐다본다.  그녀는 리사와 다르면서도 동시에 리사와 같은 여왕벌의 이중성을 가지고 있음으로서 제프의 리사에 대한 모순된 감정인 욕망과 거부(두려움)를 반영하고 있다. 

욕망(desire)이라는 말이 라틴어로 ''별에서 부터(de-sidus)''라는 말에 어원을 두고 있음을 생각할 때 욕망은 그 자체가 모순감정임을 알 수 있다. 별에서부터 떨어져 별을 그린다는 의미는 한편 생각하면 별처럼 손에 넣을 수 없는 것을 소망한다는 절망이 결국 갈망의 본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더구나 욕망과 갈망을 나타내는 또 다른 말이 근심(anxiety)인 것은 제프-리사-토오소, 그리고 토월드부인 간의 묘한 구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제프가 무용수에게 붙여준  토오소라는 독특한 이름은 토월드부인의 (토막난) 죽음을 암시하며 결국 제프의 무의식적 욕구가 꿈의 작업(dreamwork)을 통해 스크린(꿈/환상)에 투영된 것임을 말해준다.

이렇게 욕망과 두려움에서 거리감을 두던 제프가 처음으로 리사에게 관심을 보이고 적극적으로 애정을 표현하는 때는 그녀가 제프의 환상/꿈/영화에 동참하면서부터, 즉 그녀가 제프의 환상의 공간(영화)에 들어오면서부터 이다. 리사는 나름대로 자신이 원하는 제프의 이미지를 연출하려고 노력해보지만 실패하게 되고 제프의 마음 문을 열 수 없게 되자 어느 순간 제프의 위치에서 제프의 시점으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의 눈을 통해서만이 그의 마음으로 들어갈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그의 환상에 동참하기로 한다: “제프,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봐요. 당신이 본 것을 모두 다 예기해줘요... 그리고 ... 당신 생각에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말해봐요."  리사는 적극적으로 제프의 다리(카메라의 삼각대/감독의 조수)역을 하게되고 제프가 ‘보지 못하는’ 의미들을 알아 내준다.

영화에서 리사가 제프의 환상(영화)속에 들어가는 행위는 그녀가 제프의 방에서 나와서 마당을 건너 토월드의 창문(프레임)을 통해 그의 아파트(스크린) 속으로 들어가는 데서 가장 완벽히 표현되고 있다. 그 곳에서 리사는 토월드에게 붙잡힌 위기의 순간에 증거인 결혼반지를 손에 끼고 제프에게 등뒤로 손짓을 한다. 이것은  제프가 원하던 증거를 확보하는 순간, 즉 제프의 시나리오가 완성되고 그의 환상의 진실성을 확인 받는 순간이며  그의 원망충족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러나 이 장면은 동시에 리사의 욕망이 실현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리사가 손에 낀 토월드 부인의 반지는 우선 제프에게 하는 구애의 의미(리사의 원망충족)이기도 하지만 토월드가 전이/투영된 제프의 무의식적 욕구라면 당연 리사(토월드 부인) 자신의 반지이기도 하다.

***(중략) ****


결정적인 증거확보를 위해 리사가 제프의 환상(영화)속, 즉 토월드의 창(프레임)을 넘어 아파트(영화)안으로 들어가는 극적인 장면은 돌연 환상의 세계와 현실의 세계의 경계를 너무나도 가볍게 순식간에 무너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뿐아니라 그녀의 행동은 동시에 엿보기행위의 필수조건인 익명성과 안전한 거리감, 그리고 관찰의 대상을 가두어 놓던 벽(프레임)을  무너뜨리게 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결국 토월드에게 자신과 제프의 정체를 노출시키게 되는 것이다. 결국 토월드는 제프의 아파트로 침입해오게 된다. 그의 제프에 대한 공격은 마치 동물원 우리의 창살(프레임)을 부수고 탈출하여 자기를 들여다보던 구경꾼들을 공격하는 야수의 경우처럼 상황의 전도를 가져온다.  그리고 돌연 현실과 환상, 영화와  관객, 관찰자와 대상간의 힘의 역전을 가져온다.  리사가 토월드의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 환상과 실재의 교류가 가져오는 긍정적인 측면(원망성취)이라면 역으로 토월드가 제프의 세계로 들어오는 것은 그 부정적인 측면(위험성)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었을까? 토월드는 어쩌면 영화가, 그리고 작가/감독/관객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이 스스로 살아남아 도전과 위협이 된다는 의미인지 모른다. 히치콕은 마치 오늘날 현실에서 가상공간으로의 출입마저 가능하게 하고 있는 게임을 비롯한 사이버 문화를 예견한 듯하다.  확실한 것은 이 장면을 통해서 히치콕은 엿보기 행위의 익명성, 거리감,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 주는 안전함에 의지한 우월감과 지배력에 대한 환상을 깨뜨리고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략)****


많은 비평가들이 히치콕이 <뒷창문>에서 영화를 찍는 행위로서의 엿보기 행위 뿐 아니라 관람하는 행위로서의 엿보기 행위(관음증)을 연구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을 비판적인 눈으로 보고 있든, 자성적인 차원에서 말하고 있든 확실한 것은 이 “영화 같은 세상”에서 사람들의 움직임, 삶은 하나의 잠재된 영화예술이며, 결국 예술과 현실, 카메라의 눈과 관객의 눈, 환상과 현실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서로 교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의 행동이 영화예술로 변신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는 말은 인간의 삶이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노출증)과 보고자 하는 욕망(관음증)의 이중주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리사와 토오소가 노출증을 보여주고 있고, 심지어 로운리하트까지도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성장을 하고는 레스토랑 창에 자신이 보여지기를 원하고 있다. 실생활에서도 많은 레스토랑과 찻집이 백화점 쇼윈도우처럼 큰 창을 하고 있고 그 앞에 앉은 사람들이 밖을 내다보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실 그들이 밖을 보고 있는 것인지 밖을 지나는 사람들이 유리창 속의 사람들을 구경하며 지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지나가는 사람들이 바라봐 주기를 욕망하는 것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사실 영화예술 자체가 관음증 뿐 아니라 노출증의 한 형태가 아닐까?

이 글을 쓰고 있을 때 러시아에서 한 사람이 수많은 카메라가 설치된 유리로 된 집에서 자신의 삶을 모든 이들에게 노출시키는 실험을 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다. 그리고 몇 주 뒤 우리나라 모 방송국 앞에 ‘유리의 성’을 지어놓고 한 연예인이 삶을 노출시키는 프로그램을 방영한다는 TV뉴스를 보게 되었다. 사람들이 카메라에 찍힌 그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보는 것 뿐 아니라 유리집 밖에 몰려와서 직접 들여다보고 있는 광경을 TV를 통해 보여주었다. 영상시대, 사이버 시대의 관음증과 노출증은 생각보다 심각한 병적 증상인 것 같다.

영화 같은 세상, 그 속의 창, 방 등의 이미지를 통해 엿보고 싶은 욕구와 보여지고 싶은 욕구, 관객이 되고 싶은 욕구 뿐 아니라 배우가 되고 싶은 욕구를 영화(환상)와 삶(현실)의 관계 속에서 차이나 박스처럼, 러시안 인형처럼,  절묘하게 오버랩시켜 보여준 이 영화는 근본적으로 그 두 가지 욕구가 모두다 서로에게 이웃이고 싶은 인간의 욕구, 고독에 대한 두려움과 관심과 대화의 필요성에 대한 욕구라고, 그리고 더 나아가 영화예술의 욕구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리사와 제프가 던진 “뒷 창문의 윤리(rear window ethics)"와 이웃사랑(”Whatever happened to that old saying, ''Love thy neighbor''?")이란 계명간의 관계에 대한 답변이 된다. 히치콕 자신도 고백하듯이 “사람은 살인만으로는 살지[못한다]. 관심과 격려와, 그리고는―술 한잔”을―어쩌면 그 모든 것을 다 잊고 다시 새로운 살인/스릴러 영화과, 사랑과 격려를 찾아 새로운 창조를 시작하기 위해서―필요로 한다.  결국 모든 히치콕의 위대한 영화들도 이웃(관객)이 없다면 미스 로운리하트가 제작/연출/연기한 ‘저녁식사‘ 장면처럼 고독한 혼자만의 몸짓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Windows, Rooms and Peeping Toms in Cinemato-graphicum Mundi:

           Hitchcock''s <Rear Window>


The title of Alfred Hitchcock''s film is <Rear Window> which is based on the short story, "It Had to be Murder".  Windows are frequently used in films and arts as an image and an expression of the frustration of and the resulting desire for communication. More often than not windows represent a desire to escape from the present situation to the unknown, free world. However, Hitchcock''s "window" is at the rear which is opened to the rear windows of the private lives of  New York apartments, to the prison like frames of the residents.  The first part of the essay surveys the various roles the ''window'' plays in <RW>.

A window is meant for looking out of, not the reverse. In <RW>, Jeff''s rear window is  a voyeuristic instrument which is meant for looking through other windows into the rooms from outside. The view of the inside from the outside became a popular motif in the 20th century paintings among which Hitchcock''s contemporary and an enthusiastic theater-goer Edward Hopper''s paintings give most insight to understand <RW> as is pointed out by Prof. Pallasmaa. Many of Hopper''s paintings use the compositional device of an interior with a nude or half-dressed woman glimpsed through a window by an unseen viewer who looks in from outside.  The impression conveyed from both Hopper and <RW>, however, is not one of prurient voyeurism but rather of loneliness and isolation. This sense of isolation comes partly from the inevitable distance and the psychological gulf between the eye(cinema spectators) and the object(cinema): visual activity is by nature a touch without a touch, a contact without a contact. Hitchcock both reverses the roles of and shifts the power of the surveillant and the surveilled once more when the object of Jeff''s observation breaks out of the frame and attacks him. The study of the relation between the art(eye) and the object again is a popular motif in the paintings such as Velasquez''s [Cupido and Venus] and [The Maids of Honor]. The spectator''s voyeuristic curiosity is stirred by the nude Venus sitting askance with her back, with Cupid holding up the mirror for her in front of her.  However, it is instantly and unexpectedly attacked when the spectator meets Venus'' eyes looking directly at him from the mirror. The fantasy about the safety of the observer is shattered as if a dinosaur virtually attacks spectators from out of the screen frame.

If the windows are the screen and Jeff is a cinema spectator, then the lives in the rear window frames are the wish-fulfillment of Jeff and other voyeur, Lisa. ''Desire'' is from the Latin, de-sidus(from the star), referring that it is essentially a longing for the unattainable. Another term for desire or longing is anxiety. The double nature of Jeff''s desire for Lisa, i.e. craving and rejection(anxiety), can help understanding Jeff''s projection of his wish-fulfillment on the screen(windows he is watching) through the dream-works of condensation and displacement: Lisa/Miss Torso/Mrs. Thorwald. It is natural that only when Lisa ''enters'' into Jeff''s fantasy world, when all other enticements to get his heart fail, can she win and get the upper hand.

The second part of this essay examines the roles of the rooms in <RW>, and relates one of its roles, that of  Peeping Tom to other "race of Peeping Toms" in the movie including the dog that is killed because "it knew too much".  Hitchcock proceeds to include the movie spectators in the race of Peeping Toms, which leads to the third and concluding part of the essay.

The third part surveys the idea of "the world is a stage and the life is a cinema and we are actors and actresses" in <RW>. Whether or not Hitchcock endorses the voyeurism of the race of Peeping Toms(both cinema and audience), one thing for sure is that life is "a group of little stories," a  potential cinematic art. If cinema itself is  represented desires of both scopophilia and exhibitionism,  then life, too, is like a texture woven with the desires to be an audience and to be an actor.  Both desires in essence are the expression of the need to escape from loneliness: the need to be cared for and encouraged,  to be "a neighbor" to each other. This is the answer of Hitchcock to the question of "rear window ethics" which Jeff poses in the movie. After all, without a neighbor, all the great works of Hitchcock would nothing but a lonely pantomime of Miss Lonelyhearts who invites an invisible guest to her feast but to despai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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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글은  < 나사렛대학보 이봉희교수의 영화읽기 칼럼(2) 2002년2월 > 에 제가 그림을 삽입 편집했습니다.

 

‘영화인 세상’에서의 창과 방 그리고 엿보기: 히치콕의 <뒷창문>


창에 성애가 껴서 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없을 때

절망에서 오는 슬픔은 죽음보다 더 하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울뤼치(Cornell Woolrich)의 소설 『살인이 틀림없어』(It Had to be Murder)를 기초한 히치콕의 영화는 제목이 <뒷 창문 (Rear Window)>이다. 창을 인간의 의사소통,  혹은 그 단절, 그로 인한 절망이나 그리움을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한 영화의 장면은 무수히 많다. 위에 인용한 파스테르나크의 시는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닥터 지바고>의 장면들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지바고와 라라사이에 가로놓인 운명적인 심연, 그러면서도 투명한 창처럼 늘 단절 속에서도 마주치며, 바라보게 되기에 더욱 비극적인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흔히 <창>이라고 하면 닫힌 공간에서 열린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라는 일차적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기에 창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시는 늘 현재에서의 일탈과 변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연결되어있다. 반면 닫힌 공간이 그의 세계의 전부인 상상력이 결여되어있거나, 의식이 죽어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열린 세계가 오히려 죽음을 뜻할 수도 있다. 이런 창 안 밖에 대한 인식의 대조적 차이는 영화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에서 뉴랜드와 메이의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데서 아주 명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숨막힐 듯한 안일과 위선과 규범의 감옥에서 창을 열고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싶어하는 뉴랜드에게 메이는 말한다. “창문 좀 닫으세요. 그러다가 죽을 병(독감)에 걸리겠어요.”그리고 뉴랜드는 문득 자기가 이미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있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에 걸린다고!” 그는 아내의 말을 되뇌이다가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그 병에 걸렸는걸. 나는 죽은 몸이지--난 몇 달째 몇 달째 죽은 채로 살고 있어.("Catch my death!" he echoed; and he felt like adding: "But I''ve caught it already. I AM dead--I''ve been dead for months and months.")


그러나 히치콕의 창은 열린 세계로 향한 창이 아니라 뒷 창문이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사적이고 은밀한 욕망이나 삶, 심리적 내면의 세계, 또는 자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이다.  이 영화의 주된 시점인 사진기사 제프(L. B. Jesfferies: James Stewart)의  뒤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것은 마당을 둘러싼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아파트들의 뒷모습이며 숨막힐 듯한 닫힌 공간이다.  더구나 화면에는 그 각각의 아파트에서 밖으로 나가는 빌딩의 입구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파트 사이의 좁은 골목만이 유일한 통로이며 이곳을 통해 거리의 한 부분과 건너편 레스토랑을 보여줄 뿐이다.  제프의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아파트들 뒤의 창문들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사적 공간을 그대로 노출시키는--그것도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노출시키는--역할을 한다.

감옥 중에 가장 가혹한 곳은 창이 없는 닫힌 공간인 독방일 것이다.  그러나 히치콕은 아이러닉하게도 마당을 중간에 두고 제프의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7개의 아주 넓게 열려있는 창(아파트 방)들을 푸코(Foucault)가 말하는 원형감옥(panopticon)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푸코는 『기율과 형벌』(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에서 “우리 사회는 관찰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다... 우리가 사는 곳은 ‘원형극장’도 ‘무대 위’도 아니라 모든 것이 한 눈에 보이는 파노라마 기계(panoptic machine)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푸코는 인간이 어떻게 제도적 통제와 과학적 탐구 그리고 행동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해 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수단으로 벤담(Jeremy Bentham)의 원형감옥(망원렌즈로 죄수들이 모르게 모든 감옥 안을 감시하고 있는)을 이용하고 있다. 커다란 창문이 달린 [감옥]을 세트로 사용한 이 영화에서 히치콕은 엿보기 행위의 이중성, 즉 감시와 감찰이라는 이중성을 제프의 행위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제프는 석고붕대를 하고 아파트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다가 단순한 호기심에서 건너편 아파트의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차차 살인사건의 단서를 찾고 해결하기 위해 토월드(Lars Thorwald: Raymond Burr)를 감시하는 감시자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원래는 건물이나 집안에서 밖을 보기 위한 장치인 창은 히치콕에 의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장치로 그 의미가 전복된다. 그리고 이때 그 관찰되고 있는 대상은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밖에서부터 유심히 관찰/감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인물은 르네상스시대 이래 친숙한 그림의 소재(관찰의 대상/모델)가 되어왔으며 관찰자(미술가)는 항상 그 대상인 모델과 같은 공간 안에 (그 모델의 동의하에) 존재한다. 반면 밖에서 창을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유행이다.  히치콕과 동시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에 나타난 뉴욕풍경은 창 밖에서 들여다본 창안의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1920-30년대 호퍼는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야창(Night Windows)」(1928)을 비롯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우리는 영화화면이나 극장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야창(Night Windows)」의 전경에 있는 외부로 난 유리창턱은 무대의 가장자리를 연상시키며 그 위로 마치 조명등 아래의 무대 장면처럼 방안의 광경이 보여지게 된다.

팰라스마아(Pallasmaa)는 히치콕이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에 아주 친숙해 있었다는 증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야창(Night Windows)」이외에도 「밤을 밝히는 사람들(Night Hawks)」(1942), 「아파트 집들(Apartment Houses)」(1923),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1932)은 엿보기와 사적인 집안 내부라는 주제와 연결이 된다. 이 그림들은 창 밖에서 안을 관찰하는 시점을 보여준다.

    
       Night Hawks (1942) Apartment Houses (1923)  Room in New York (1932) 

   

그 외「쇼걸   (Girlie Show)」(1941)는 엿보기 행위 속의 관음증을 보여주며, 「오전 11시(Eleven A.M)」(1923)는 나체의 여인이 열린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행위를,  그리고 「작은 마을의 사무실(Office in a Small Town)」(1953)은 제프처럼 한 외로운 남자가 사무실에서 주변을 관찰하고 내다보는 그림이다. 

    
       Girlie Show (1941)   Eleven A.M. (1923)  Office in a Small Town (1953) 

 

그 뿐 아니라 「자동판매기식당(Automat)」(1927)의 카페에 앉아있는 외로운 여인은  <이창>의 미스 [로운리하트](Lonelyhearts)의 이미지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색의 농도는 달라도 이 영화에서 늘 초록색 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호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Automat (1927)

 

황량한 식당에 홀로 앉아있는 호퍼의 고독한 여자에게서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초록색 옷이다. 로운리하트(Judith Evelyn)도 역시 초록색 옷을 입고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는 혼자서 아파트 건너편 레스토랑에 앉아있다. 아마 그녀도 레스토랑 ‘창’틀 너머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많은 호퍼의 그림들이 누드이거나 혹은 반쯤 옷을 벗은 여자들이 있는 방을 보이지 않는 관찰자가 창 밖에서 들여다보는 구도를 사용하고 있지만 관람자가 그 그림들에게서 얻는 경험은 “관음증”적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림 속 인물이나 풍경이 그려주는 고독함과 소외를 바라보게 된다.

관찰/관람자 자신도 또 다른 의미로 소외감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관찰/관람하는 행위자와 그 대상사이에 필연적으로 가로놓이게 되는 거리감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시각에 의한 인식은 그 자체가 대상과 시각주체사이의 거리를 전제로 한 지각작용이므로 접촉 없는 접촉이다. 따뜻한 체온의 교감이 없이 이루어지는 이 접촉은 자연 소외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메츠(Christian Metz)는 “마치 영화관람객이 스크린에 너무 가까이 가지도 않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것과 같이 관찰자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항상 알맞은 거리에 대상을 묶어놓고”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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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파일] 가장 미국적인 사실주의 화가의 탄생 - 에드워드 호퍼

고경원 기자(aponia@libro.co.kr)

  
Aug.  01, 2003 | 평범해 보이지만 가끔 ‘저 인간은 천재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사람을 아주 드물게 만난다. 평범함 속에 비범함을 감추고 있기에 그 특별함이 더욱 빛나고, 한편으로는 주변을 감쪽같이 속여온 것 아니냐는 생각에 오싹함마저 들 때가 있는 그런 사람 말이다. 현대미술작가 속에서 비슷한 예를 찾아보자면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를 들 수 있겠다.

  야수파, 입체파, 다다와 초현실주의 등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예술의 시도가 난무했던 20세기 초 현대미술의 역사 속에서 돌이켜본다면 에드워드 호퍼의 그림은 평범하다 못해 공허해 보이기까지 한다. 1930년대 언저리 미국 상업광고의 삽화로나 쓰였음직한 사실주의 화풍 역시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퍼가 1930년대 미국 풍경화파(American Scene Painting)의 대표작가로 손꼽히는 이유는 뭘까.

   다시 한번 들여다보니 텅 빈 거리, 무표정한 사람들의 표정 등 그림 속에서 느껴지는 공허함이 더 강하게 와 닿는다. 순간 깨닫는다. 그림이 평범해서, 눈여겨볼 만한 것이 없어 느껴지는 허전함이 아니라, 그림 속의 대상이 지닌 공허함을 그만큼 실감나게 담은 그림이라는 걸 말이다. 1920년대 이후 산업화사회로 본격 진입하면서 변화된 미국사회의 현실을 호퍼만큼 설득력 있게 그려낸 작가도 흔치 않다.

모더니즘 대신 삶의 진실 파헤치는 리얼리즘을  
  1882년 미국 뉴욕주 나이아크에서 태어난 에드워드 호퍼는 청소년 무렵부터 이미 화가로서의 재능이 다분했지만, 그의 부모는 가난뱅이 예술가보다 먹고살기에 나을 거라는 계산에서 아들이 상업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하길 원했다. 그의 그림이 마치 크기를 부풀려 놓은 광고삽화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일러스트레이터로서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뉴욕예술학교에서 리얼리즘회화의 대가로 손꼽히던 로버트 헨리에게 사사했던 호퍼는 24세 되던 해인 1906년 10월 파리로 떠난다. 현대미술운동의 중심지였던 활기찬 파리에서 호퍼는 별 감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그가 사로잡혀있던 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모더니즘보다 삶의 진실을 파헤치는 리얼리즘 쪽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파리에서 한 일이라곤 고흐가 그린 풍경처럼 밤의 카페에 앉아 있거나 밤거리를 싸돌아다니는 일이었다. 몇 달을 파리에서 더 보낸 후에 1910년까지 유럽 여행을 지속했던 호퍼에게 인상적이었던 것은 차라리 과거의 명작, 그 중에서도 렘브란트의 ‘야경꾼들’(1642)이었다. 어둠 속에서 극적으로 드러나는 빛은 호퍼의 그림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요소가 됐다. 호퍼의 대표작‘밤을 지새는 사람들’(1942)은 빛의 극적인 느낌을 강조한 3백년 전 렘브란트 그림의 또 다른 변용이라고 볼 수 있다.

   30대 후반에 접어들어서야 호퍼는 밥벌이 수단이었던 일러스트레이션을 놓고 비로소 순수예술가로 전향했다.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흐르는 그의 풍경화에서 인물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텅 빈 거리는 극복할 수 없는 공허감을 보여준다. 둘 이상의 사람이 등장하더라도 그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의 세상에 빠져있어 다른 사람들과 소통할 수 없는 벽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인다. 호퍼의 그림 속에는 구원을 갈구하는 듯한 상징적인 요소로 ‘창’이라는 요소가 반복해 등장하지만, 창 내부에서 혹은 창 밖으로 흘러나오는 빛은 붙잡을 수 없는 신기루와 같은 희망으로 나타난다.

경직된 인간군상 속에 드러나는 황량한 현대인의 삶
  호퍼의 이름을 널리 각인시킨 것은 도시풍경을 그린 일련의 그림들이지만, 그는 시골 풍경이나 바다 풍경과 같은 자연에도 종종 눈을 돌렸다. 하지만 모든 인물들이 경직되고 소외된 모습으로 등장하는 호퍼  그림의 특징은 자연을 그릴 때에도 유감 없이 드러난다. 심지어 파도를 묘사할 때조차 석고로 빚어낸 듯 딱딱하게 그려낼 만큼 모든 사물에서 생동감을 느낄 수 없다. 그가 쏟아낸 그림들은 풍경이든 인물이든 산업화와 제1차 세계대전, 경제대공황을 거치면서 황량해진 미국인들의 삶을 오롯이 담아냈다. 리얼리즘의 아버지 쿠르베 이후 가장 탁월한 미국 리얼리즘 화가로 에드워드 호퍼의 이름을 꼽는 것은 그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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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그림에 맞춰 깐 음악은 Miles Davis의 Blue in Green입니다. 이 음악 들으면서 이 그림을 쭉~ 들여다 보고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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