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글은  < 나사렛대학보 이봉희교수의 영화읽기 칼럼(2) 2002년2월 > 에 제가 그림을 삽입 편집했습니다.

 

‘영화인 세상’에서의 창과 방 그리고 엿보기: 히치콕의 <뒷창문>


창에 성애가 껴서 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볼 수 없을 때

절망에서 오는 슬픔은 죽음보다 더 하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울뤼치(Cornell Woolrich)의 소설 『살인이 틀림없어』(It Had to be Murder)를 기초한 히치콕의 영화는 제목이 <뒷 창문 (Rear Window)>이다. 창을 인간의 의사소통,  혹은 그 단절, 그로 인한 절망이나 그리움을 나타내는 언어로 사용한 영화의 장면은 무수히 많다. 위에 인용한 파스테르나크의 시는 그의 소설을 영화화한 <닥터 지바고>의 장면들을 곧바로 연상시킨다. 지바고와 라라사이에 가로놓인 운명적인 심연, 그러면서도 투명한 창처럼 늘 단절 속에서도 마주치며, 바라보게 되기에 더욱 비극적인 두 사람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

흔히 <창>이라고 하면 닫힌 공간에서 열린 세계로 연결되는 통로라는 일차적 의미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기에 창을 소재로 한 그림이나 시는 늘 현재에서의 일탈과 변화, 새로운 세계에 대한 그리움과 연결되어있다. 반면 닫힌 공간이 그의 세계의 전부인 상상력이 결여되어있거나, 의식이 죽어있는 사람들에게는 그 열린 세계가 오히려 죽음을 뜻할 수도 있다. 이런 창 안 밖에 대한 인식의 대조적 차이는 영화 <순수의 시대(The Age of Innocence)>에서 뉴랜드와 메이의 인식의 차이를 보여주는데서 아주 명확히 드러나기도 한다. 숨막힐 듯한 안일과 위선과 규범의 감옥에서 창을 열고 넓은 세계를 바라보고 싶어하는 뉴랜드에게 메이는 말한다. “창문 좀 닫으세요. 그러다가 죽을 병(독감)에 걸리겠어요.”그리고 뉴랜드는 문득 자기가 이미 죽음이라는 병에 걸려있는 것을 알게 된다:

        

“죽음에 걸린다고!” 그는 아내의 말을 되뇌이다가 이렇게 말하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하지만 난 이미 그 병에 걸렸는걸. 나는 죽은 몸이지--난 몇 달째 몇 달째 죽은 채로 살고 있어.("Catch my death!" he echoed; and he felt like adding: "But I''ve caught it already. I AM dead--I''ve been dead for months and months.")


그러나 히치콕의 창은 열린 세계로 향한 창이 아니라 뒷 창문이다. 남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사적이고 은밀한 욕망이나 삶, 심리적 내면의 세계, 또는 자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의미이다.  이 영화의 주된 시점인 사진기사 제프(L. B. Jesfferies: James Stewart)의  뒤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것은 마당을 둘러싼 뉴욕 그리니치 빌리지에 있는 아파트들의 뒷모습이며 숨막힐 듯한 닫힌 공간이다.  더구나 화면에는 그 각각의 아파트에서 밖으로 나가는 빌딩의 입구는 보여지지 않는다. 아파트 사이의 좁은 골목만이 유일한 통로이며 이곳을 통해 거리의 한 부분과 건너편 레스토랑을 보여줄 뿐이다.  제프의 창문을 통해 보여지는 아파트들 뒤의 창문들은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의 사적 공간을 그대로 노출시키는--그것도 자신들을 지켜보는 눈이 있다는 것도 모른 채 노출시키는--역할을 한다.

감옥 중에 가장 가혹한 곳은 창이 없는 닫힌 공간인 독방일 것이다.  그러나 히치콕은 아이러닉하게도 마당을 중간에 두고 제프의 창을 통해 볼 수 있는 7개의 아주 넓게 열려있는 창(아파트 방)들을 푸코(Foucault)가 말하는 원형감옥(panopticon)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푸코는 『기율과 형벌』(Discipline and Punish: The Birth of the Prison)에서 “우리 사회는 관찰의 사회가 아니라 감시의 사회다... 우리가 사는 곳은 ‘원형극장’도 ‘무대 위’도 아니라 모든 것이 한 눈에 보이는 파노라마 기계(panoptic machine)속에 살고 있다”고 말한다. 푸코는 인간이 어떻게 제도적 통제와 과학적 탐구 그리고 행동실험의 대상으로 전락해 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한 이론적 수단으로 벤담(Jeremy Bentham)의 원형감옥(망원렌즈로 죄수들이 모르게 모든 감옥 안을 감시하고 있는)을 이용하고 있다. 커다란 창문이 달린 [감옥]을 세트로 사용한 이 영화에서 히치콕은 엿보기 행위의 이중성, 즉 감시와 감찰이라는 이중성을 제프의 행위를 통해 탐구하고 있다. 제프는 석고붕대를 하고 아파트에서 꼼짝없이 갇혀 지내다가 단순한 호기심에서 건너편 아파트의 사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차차 살인사건의 단서를 찾고 해결하기 위해 토월드(Lars Thorwald: Raymond Burr)를 감시하는 감시자로 변하게 된다. 이처럼 원래는 건물이나 집안에서 밖을 보기 위한 장치인 창은 히치콕에 의해서 밖에서 안을 들여다보고 관찰하는 장치로 그 의미가 전복된다. 그리고 이때 그 관찰되고 있는 대상은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가 밖에서부터 유심히 관찰/감시되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창 밖을 내다보고 있는 인물은 르네상스시대 이래 친숙한 그림의 소재(관찰의 대상/모델)가 되어왔으며 관찰자(미술가)는 항상 그 대상인 모델과 같은 공간 안에 (그 모델의 동의하에) 존재한다. 반면 밖에서 창을 통해 방안을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 시대의 유행이다.  히치콕과 동시대 미국의 화가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에 나타난 뉴욕풍경은 창 밖에서 들여다본 창안의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1920-30년대 호퍼는 영화광이었다고 한다. 「야창(Night Windows)」(1928)을 비롯한 일련의 그림들에서 우리는 영화화면이나 극장의 이미지를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야창(Night Windows)」의 전경에 있는 외부로 난 유리창턱은 무대의 가장자리를 연상시키며 그 위로 마치 조명등 아래의 무대 장면처럼 방안의 광경이 보여지게 된다.

팰라스마아(Pallasmaa)는 히치콕이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에 아주 친숙해 있었다는 증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고 있다.「야창(Night Windows)」이외에도 「밤을 밝히는 사람들(Night Hawks)」(1942), 「아파트 집들(Apartment Houses)」(1923), 「뉴욕의 방(Room in New York)」(1932)은 엿보기와 사적인 집안 내부라는 주제와 연결이 된다. 이 그림들은 창 밖에서 안을 관찰하는 시점을 보여준다.

    
       Night Hawks (1942) Apartment Houses (1923)  Room in New York (1932) 

   

그 외「쇼걸   (Girlie Show)」(1941)는 엿보기 행위 속의 관음증을 보여주며, 「오전 11시(Eleven A.M)」(1923)는 나체의 여인이 열린 창을 통해 밖을 내다보는 행위를,  그리고 「작은 마을의 사무실(Office in a Small Town)」(1953)은 제프처럼 한 외로운 남자가 사무실에서 주변을 관찰하고 내다보는 그림이다. 

    
       Girlie Show (1941)   Eleven A.M. (1923)  Office in a Small Town (1953) 

 

그 뿐 아니라 「자동판매기식당(Automat)」(1927)의 카페에 앉아있는 외로운 여인은  <이창>의 미스 [로운리하트](Lonelyhearts)의 이미지임을 알 수 있다.  그녀는 색의 농도는 달라도 이 영화에서 늘 초록색 옷을 입고 있는데 그것은 호퍼의 그림을 연상시킨다.


Automat (1927)

 

황량한 식당에 홀로 앉아있는 호퍼의 고독한 여자에게서 강한 인상을 주는 것은 초록색 옷이다. 로운리하트(Judith Evelyn)도 역시 초록색 옷을 입고 정성스레 화장을 하고는 혼자서 아파트 건너편 레스토랑에 앉아있다. 아마 그녀도 레스토랑 ‘창’틀 너머로 누군가가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에게 다가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많은 호퍼의 그림들이 누드이거나 혹은 반쯤 옷을 벗은 여자들이 있는 방을 보이지 않는 관찰자가 창 밖에서 들여다보는 구도를 사용하고 있지만 관람자가 그 그림들에게서 얻는 경험은 “관음증”적인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림 속 인물이나 풍경이 그려주는 고독함과 소외를 바라보게 된다.

관찰/관람자 자신도 또 다른 의미로 소외감을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관찰/관람하는 행위자와 그 대상사이에 필연적으로 가로놓이게 되는 거리감 때문인지 모른다. 사실 시각에 의한 인식은 그 자체가 대상과 시각주체사이의 거리를 전제로 한 지각작용이므로 접촉 없는 접촉이다. 따뜻한 체온의 교감이 없이 이루어지는 이 접촉은 자연 소외현상을 불러오게 된다. 메츠(Christian Metz)는 “마치 영화관람객이 스크린에 너무 가까이 가지도 않고 너무 멀리 떨어지지도 않은 자리에 앉고자 하는 것과 같이 관찰자는 대상과의 거리감을 유지하기 위해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며 항상 알맞은 거리에 대상을 묶어놓고”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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