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깊은 침묵

 

희망없는 삶을 시각화한 <밤을 지새는 사람들>

도시의 밤. 이제 밤은 조명을 깨울 것이다. 그리고 길고 어두운 그림자를 남기며 도시의 뒷골목으로 피신할 것이다. 짐승처럼 웅크리고 불안한 잠을 청할 것이다. 불을 밝힌 카페가 화폭 밖 멀리까지 어둠을 배웅한다. 카페는 빛나는 조명같다. 빛은 너무 강렬해서 곧 탈색된다. 먼지입자처럼 건조하게 이곳 저곳을 무중력 상태로 유영한다.

표백된 빛은 시간마저 순간 정지시킨다. 빛에 의해 드러난 배경은 진공처럼 침묵하고 하루의 피로와 피폐한 정신을 그 안에 가둔다. 지친 영혼을 부르는 사자처럼 불안하다. 정신은 불안하다. 화려한 빛 역시 그래서 창백한 정신 같다. 그러다가도 칼날을 세우고 예리한 칼로 화폭을 난폭하게 유린한다. 냉혹한 킬러처럼 잔인하지만, 그 역시 가슴 속에 우울을 안고 산다. 대도시의 밤을 밝히는 빛은 이렇게 양면적이다. 이처럼 20세기의 도시는 밤과 빛이 주인공이다.

에드워드 호퍼의〈밤을 지새는 사람들〉. 대도시의 밤에 관한 보고서. 카페는 불을 밝힌 채 하루의 일과를 마친 사람들을 초대한다. 사람들은 터벅 터벅 굽은 어깨를 하고 불을 찾았다. 불에 탐닉하는 곤충들처럼 이곳을 찾았다. 그들은 차를 마시기도 하고 술을 안주삼아 묵은 일상을 세척했다. 주섬주섬 그들은 떠났고 빈 자리가 그 공간을 채웠다. 그리고 카페 여기저기에 그들이 놓고 간 쓸쓸한 이야기가 상처처럼 남아 있다. 어쩌면 흥청거렸을 카페는 시간의 추이에 따라 진공처럼 무중력 상태로 차츰 변모한다.

이제 침묵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남은 것은 침묵이다. 흰 모자와 흰 유니폼을 단정하게 걸친 바텐더만이 임무에 충실할 뿐이다. 그러나 그가 던지는 말 역시 건조하다.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두렵다. 사람들은 자신의 내부로 내부로 시선을 돌릴 뿐이다. 참을 수 없는 이러한 침묵을, 호퍼는 연인처럼 보이는 남녀의 손으로 표현한다.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남자의 오른손과 붉은 옷의 여성의 왼손은 닿을 듯 그러나 무관심하다. 이 부분은 그림의 압권이다. 사람 사이의 소외와 단절, 그것의 불가능한 소통은 이렇게 손처럼 가까우면서도 한없이 먼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들은 마치 조각 같다.

붉은 옷의 여성은 자신의 오른손을 응시한다. 그녀 역시 담배를 집게와 엄지로 잡고 있다. 그녀는 약간의 호기심을 드러내는 표정이지만 남자는 전혀 관심 밖이다. 그들이 담배를 피우지 않고 이렇게 손에 쥘 뿐이어서 담배는 생명을 잃은 생물 같다. 허망하다. 사람이나 담배 모두 생명을 잃은 소품 같다. 흰 찻잔 역시 차가운 냉기 뿐이다. 그들에게서 감정의 교류나 정서적 교감은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 마치 수족관 속에 갇힌 박제된 모조품들 같다

모든 관계는 무관심에 의해 설정되고 지탱된다. 의사부재의 상황은 원자화된 도시인의 소외감을 극단적으로 드러낸다. 도시의 익명성은 이렇게 잔인하다.

우리는 우리의 이웃을
모르고 있다.
이웃 연탄집 아저씨의 웃음이
매일 조금씩 검어지는 것도
그리고
연탄들이 연탄집의 방향을
산간지방으로
차츰 바꾸고 있는 것도.

이웃집 아저씨가 연탄이
아저씨를 감화시키는 사실을 모르듯
우리는 우리가 무엇에
물드는지 모르고 있다.
------〈진실로 우리는〉(오규원)

도시인들은 서로에게 익명으로 존재할 뿐이거나 아예 서로 부재한다. 다만 극단적인 절망감과 소외가 사람 사이를 매개할 뿐이다. 짐승처럼 거칠고 외로운 삶은 사람들을 단자화, 수량화했다. 빈부의 격차, 주거의 문제, 급진적인 소외 등 도시의 병폐는 사람들의 영혼을 갉았다. 호퍼는 병든 도시인들의 심층을 이렇게 강력한 심리적 충격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림 속 무시무시한 침묵은 1930년대 경제 대공황을 체험한 미국 사람들의 황폐한 내면, 무력한 자의식과 연관된다. 그는 당시 미국인의 희망없는 삶. 외로움과 무기력함을 이렇게 침묵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은 3, 40년대 미국 사회에 국한되지 않고 보편성을 획득한다. 그가 미국인 사회를 조명하면서도 이를 철저하게 허기진 도시인의 내면으로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그 역시 이러한 현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대도시의 허기와 외로움을 경험하는 모든 사람들의 쓸쓸한 내면 풍경으로 전염된다.

조용훈의 그림읽기, 효형출판사

 

 

이 글을 읽고 난 뒤는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하자면.... 괜히 읽었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쓴 사람은 정식적인 미술교육을 받았을터이니 비교적 정확한 비평을 내렸으며, 에드워드 호퍼에 대한 일반적이 평과는 비슷할 것이다.

공황시절의 병든 도시인을 말하고 있지만....

(가끔 그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을 듣지 또는 읽지 않는게 나의 그림보기에 더 건강할 거하는 생각이 든다)

그림을 들여다 보면, 등 돌린 인물은 안보인다 치고 정면에 앉아있는 두 인물의 앞에는 각각의 커피잔이 놓여져 있다. 만약 내가 작가라면 아예 잔조차 놓여져 있지 않은 걸 택할 것이다. 그 커피 잔이 놓여지기 까지 - 아무리 자동적으로 말없이 이런 다이너에서 커피를 따른다 해도 - 조금의 눈마주침은 있지 않았을까?

붉은 색의 원피스를 입은 그녀와 데이트를 위해 말쑥하게 빼입은 그의 모습에서는 하루의 피곤은 느낄 수 있을 지언정 자신의 삶 속의 작은 일상적 욕망과 인간관계의 갈구가 느껴진다.

너무나 말쑥해고 깔끔해서 공허함이 느껴질 수 있지만, 나에게는 긴 하루가 끝나고 다음 날의 활동을 위해 조용하게 휴식을 취하는 평화로움이 느껴진다.

그게 내가 이 그림을 본 첫 느낌이었다.

가끔은 첫 느낌이 가장 끝까지 좌우하지 않는가....

그냥 나만의 작은 그림 읽기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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