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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요리사였다
제임스 힐만 외 지음, 김영진 외 옮김 / 황금가지 / 200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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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하다. 몹시도 심란하다.

사실 프로이트는 우리네 보통내기들이 대강 알거나 아는 척하는 심리학의 대명사이자, 정신분석학 하면 떠오르는 대표적인(유일한) 인물이다. 정신과 전문의에게서 치료를 받는 것을 '나는 미쳤다'라고 대외적으로 공언하는 것과 동일시하는 사회 환경 속에서 사람들(보통 사람들)은 그 밖의 정신분석학 학파나 이론가들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오로지 프로이트뿐이다.

아마 프로이트라는 이름이 이렇게 오래도록 유명세를 누리는 이유 중에는, 모든 정신 현상의 근원을 리비도라고 하는 성적 본능으로 환기하고, 오이디프스 컴플렉스 같은 대단히 파격적인 해석을 내놓았기 때문에 그의 이름이 (보통 사람들에게는) 스캔들적으로 회자된 경향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프로이트가 요리사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프로이트가 직접 쓴 요리책(Freud's Own Cook Book)이 발견된 것이다!!!

흠, 흥미롭군. 재미있겠는 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내용이었다. 특히나 일상의 지루함을 맛있고 독특하고 새롭고, 게다가 재미있는 음식을 먹는 것으로 해소해보려는 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던 때라, 프로이트의 요리책은 세인의 관심을 끌기에 너무나도 충분했다. 온갖 신문의 제호를 꼬리표로 달고 있는 미디어 리뷰 모음을 보라. 이것은 기발한 발상이며 유쾌한 농담이며 재치있는 패러디였을 것이다. 아마도. (이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너무나도 안타깝다.)

그의 이론에 동의하건 하지 않건, 어쨌거나 대중적인 정신분석학의 일가를 이룬 프로이트라는 거물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면, 그의 독특하기 짝이 없는 학설과 치료법은 물론이고, 가족관계, 주변 인물과 성장 배경, 지인과 주고받은 편지, 친구들과 적대자...에 이르기까지 프로이트라는 인물과 관련된 모든 것을 넣어서 완성해낸 하나의 요리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므로 이 책은 즐겁고, 재미있고, 유쾌하고, '맛깔'스러워야만 했다. 스스로를 편저자라고 부르며 프로이트 인형을 실에 꿰어 인형극을 펼치는 저자들은 '해박한 지식과 상상력'을 동원하여 장난을 쳤으니까. 그들은 이 심각한 인물을 두고 짐짓 장난을 걸어온 것이니까.

그런데 알고 봤더니 그 장난스러운 인형극에는 관람 요건이 있었다. (책을 사기 전에 알았더라면!) 장난스러운 인형극이니까 '7세 미만'이었던 게 아니라, 성에 대한 발언이 군데군데 이어지니까 '18세 이상'이었던 게 아니라, '프로이트에 대한 기본 지식 보유자일 것'이 그 요건이었다.

그러므로 보통 사람들은 이 재미있는, 유쾌한 농담이며, 재치있는 패러디를 제대로 즐길 수가 없다. 게다가 그것이 우리말로 옷을 바꿔 입는 과정에서 농담의 미묘한 향이 무뎌지거나 패러디의 섬세한 장식이 떨어져나가고, 식거나 미적지근해지고, 원래 넣어야 하는 재료를 구하지 못해 대강 비슷한 걸로 떼우는 식이 되어 버린 곳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사실은 너무 많이 눈에 뗘서 도저히 끝까지 읽어낼 수가 없었다. 물론 그 모든 이유는, 읽는 내가 관람 요건을 갖추지 못한 '비자격자'인 탓이겠지만.

번역은 아마도 대단히 어려웠을 줄로 짐작한다. 잘은 모르겠지만 그랬을 것 같다. 차근차근 선과 후를 설명해주는 것도 아니고, 조근조근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도 아니고, '너도 다 알지? 모르면 말고' 식으로 겅중겅중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슬랩스틱 코메디식, 또는 축지법식 구성을 따라잡기 힘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번역자가 조금만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번역을 하고(한 사람은 정신과 전문의이고, 한 사람은 영어 전문가인데...), 편집자가 조금만 더 친절하게 편집을 했더라면(왜 원주와 역주를 구분해서 달지 않았을까? 왜 편집자주는 넣을 생각을 안했을까?) 보통사람들도 재미있게 읽을 만한 책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오랜 안타까움이 남는 그런 책이다. 아까운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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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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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작품은 하나도 읽지 않은 채, 각오를 말하는 수필만을 읽고서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하는 일은 어쩌면 가당치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생에는 우연을 가장하고 일어나는 필연이거나, 필연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우연이 있어서, 어느날 생전 처음으로 써서 보낸 작품이 문학상에 당선되어 '우연찮게'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 마루야마 겐지처럼 나도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어디선가 '우연찮게' 듣게 되었고, 그 후로도 책바구니에서 보관목록으로, 다시 책바구니로 여러 차례 자리를 바꾸거나, 아예 삭제를 해버리고 잊어버렸다가('문청도 아닌 내가 소설가의 각오를 들어서 뭐 하겠어?') 충전의 방법을 모색하던 차에 다시 '우연찮게' 이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작품을 하나도 접해보지 않은 소설가의 발언에 이렇게 관심을 쏟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당장에 향유할 수 있는 이익을 눈앞에 두고도 부러 먼길을 돌아가는 요령부득 같은 그의 '기행'적인 삶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영상보다 훨씬 선연한 시각적 이미지를 글자로 형상화하고 싶다'는 각오로 자신만의 문체를 체득하여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고 악전고투하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큰 산봉우리에 오르는 등정으로 생각하는 그의 자세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소설에 직면할 때마다, 뭐랄까, 할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고, 하루치의 일을 그럭저럭 마무리한 후에도 내일 일을 생각하면 한숨이 새어나오곤 했다. 그래서 오전중에 두세 시간 일을 마치면 책상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내일이면 또 무슨 엉뚱한 벽에 부딪쳐 옴짝달싹 못하게 될 것인가 하는 불안감으로 안절부절못해야 했다.'

작가는 글로, 작품으로 말한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렇지 않고, 작가들도 불평하는 한 켠으론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부추긴다. 세상은 유명세를 요구하고, 위대한 작품에 앞서 '유명한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고 싶어한다. 그리고 소설가들은 안전지대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세상을 향해 자극적인 코멘트를 날리며 이름을 얻는다. 세상을 손끝으로 비난하고 독자들에게 문학의 죽음을 탓하면서도, 눈 흐린 세상의 이익을 추수해가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진정 문학을 좋아한다면 그렇게 정치적인 일에 흥미를 보일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혹시 그들은 문학을 발판으로 삼아 작가 이상의 무엇이 되려는 것이 아닐까요.'

존재를 삼켜버릴 것처럼 끝 모를 심연의 검은 눈을 가진 고독을 대해 고개 돌리지 않고 그를 응시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섭취하여 조금씩 성장하며 열매맺고 새끼 낳는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인공의 빛과 물질과 관계에 현혹됨 없이 빛과 그림자를 적당히 취하며 늘 같은 자세로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에는 구도자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사실, 누구나 그럴듯한, 듣기에 멋있는 말을 할 수는 있다. 적당한 코멘트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이름값을 높여가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당장의 이익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사람의 삶만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비슷하지만 다른, 언뜻 같아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사이비들이 진짜의 자리를 차지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 되어버린 이때,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우리 모두를 향한 청랑한 풍경 소리, 정신이 번쩍 나는 죽비소리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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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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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어느 날 베로니카는 죽기로 결심했다. 그 동안 모아 온 수면제를 털어넣고 의식의 소등을 기다리는 동안 무료해진 그녀의 눈에 잡지의 기사가 들어온다. 그 기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슬로베니아는 어디에 있는가?' 스물넷. 희망과 기대로만 덧칠해도 충분히 아름다운 나이. 사랑하는 가족과 안정된 직장과 미모까지, 모자람이 없을 것 같은 베로니카는 어느 날 죽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그녀의 마지막 의식에 포착된 질문. '슬로베니아는 대체 어디에 있는 나라인가?'

그러나 베로니카의 자살은 미수에 그치고, 그녀는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다. 그것도 지금껏 아무도 탈출에 성공한 적이 없다는 난공불락의 정신병원. 그녀는 왜 정신병원에 와 있는 걸까? 이렇게 이 책은 몇 가지 의문을 우리에게 던지며 시작된다. 그녀는 왜 자살을 하려 했던가. 작가는 왜 뜬금없이 슬로베니아의 존재를 부각시킨 걸까. 그리고 베로니카는 왜 정신병원에 수용되었는가.

병원의 의사는 정신병을 유발하는 요인과 그것을 치유할 방법에 대한 실험 대상으로 아무도 모르게 베로니카를 이용하고, 여전히 죽기만을 바라는 베로니카는 나름대로의 질서를 갖추고 짐짓 평화롭게 운영되던 정신병원에 하나의 의문, 하나의 도발, 삶과 죽음에 대한 의식의 환기로서 던져진다.

베로니카는 매일매일 똑같은 모습으로 오로지 반복될뿐인 일상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확신으로 자살을 결심한다. 삶에서 아무런 의미도 발견할 수 없다면, 이제 남은 건 죽음뿐이므로. 그렇다면 작가는 왜 슬로베니아라는 나라와 정신병원이라는 무대를 선택했을까? (파울로 코엘료는 브라질 작가로 십대 시절에 정신병원에 드나든 경험이 있다고 한다.) 혹시 그곳이 광기가 집중된 곳이기 때문이 아닐까? 두 가지 시각, 두 가지 무게의 광기. 정상과 그 대척점으로서의 미치광이.

슬로베니아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 1991년에 분리독립했고, 유고연방 대통령인 밀로세비치는세르비아에 대한 인종청소를 감행해 반인륜 전범으로 국제재판소에 피소되어 있다. 그것은 시대의 광기이지만, 바로 그 옆에서,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에서는 일상의 삶이, 천연덕스럽게 계속된다. 시대와 다수가 인정하고 승인한 길을 맹목적으로 따라 걸으며.

자기의 꿈을 쫓는 것이, 사랑에 전부를 거는 것이, 부와 명예와 안정이 보장된 삶을 버리고 인류에 봉사하고자 하는 것이, 정신나간 짓으로, 미친 짓으로 간주되고, 인류의 잔인한 광기 옆에서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일상의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 이 세계가 작가에게는 하나의 커다란 정신병원으로 해석된 건지도 모른다.

작가는 정신병원이라는 담 안쪽에서 친목회(Fraternity)를 결성한 채 삶과 안정을 맞바꾸지 말고, 세계의 미친 일상의 규정에서 벗어나 삶을, 죽음을, 죽음을 각오하는 삶을 추구하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 책은 흔히 말하는 '해피엔딩'인지도 모른다. 다만 이제 이 책을 덮고 일어선 우리에겐 선택이 남아 있다. 너는 마을의 우물로 내려가 모든 마을 사람을 미치게 한 저 우물물을 마시고 한 평생 미친 것이 정상인 세상에서 정상으로 살다 가려느냐, 아니면 이 미친 세상을 떠나는 미치광이로서의 너의 삶을 선택하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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