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의 각오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문학동네 / 199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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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소설가의 작품은 하나도 읽지 않은 채, 각오를 말하는 수필만을 읽고서 이렇다, 저렇다 왈가왈부하는 일은 어쩌면 가당치 않은 일일지도 모르겠다. 사실 인생에는 우연을 가장하고 일어나는 필연이거나, 필연이라고 믿고 싶어지는 우연이 있어서, 어느날 생전 처음으로 써서 보낸 작품이 문학상에 당선되어 '우연찮게' 소설가의 길에 들어선 마루야마 겐지처럼 나도 이 책에 대한 찬사를 어디선가 '우연찮게' 듣게 되었고, 그 후로도 책바구니에서 보관목록으로, 다시 책바구니로 여러 차례 자리를 바꾸거나, 아예 삭제를 해버리고 잊어버렸다가('문청도 아닌 내가 소설가의 각오를 들어서 뭐 하겠어?') 충전의 방법을 모색하던 차에 다시 '우연찮게' 이 책을 떠올리게 되었다.

작품을 하나도 접해보지 않은 소설가의 발언에 이렇게 관심을 쏟고 귀를 기울이게 되는 것은 아무래도 당장에 향유할 수 있는 이익을 눈앞에 두고도 부러 먼길을 돌아가는 요령부득 같은 그의 '기행'적인 삶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영화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영상보다 훨씬 선연한 시각적 이미지를 글자로 형상화하고 싶다'는 각오로 자신만의 문체를 체득하여 인간과 세상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려고 악전고투하고 있다. 하나의 작품을 큰 산봉우리에 오르는 등정으로 생각하는 그의 자세는 자못 비장하기까지 하다. '새로운 소설에 직면할 때마다, 뭐랄까, 할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다는 충동에 사로잡혔고, 하루치의 일을 그럭저럭 마무리한 후에도 내일 일을 생각하면 한숨이 새어나오곤 했다. 그래서 오전중에 두세 시간 일을 마치면 책상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 그러나 내일이면 또 무슨 엉뚱한 벽에 부딪쳐 옴짝달싹 못하게 될 것인가 하는 불안감으로 안절부절못해야 했다.'

작가는 글로, 작품으로 말한다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이 그렇지 않고, 작가들도 불평하는 한 켠으론 은근히 그런 분위기를 부추긴다. 세상은 유명세를 요구하고, 위대한 작품에 앞서 '유명한 소설가'가 쓴 소설을 읽고 싶어한다. 그리고 소설가들은 안전지대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세상을 향해 자극적인 코멘트를 날리며 이름을 얻는다. 세상을 손끝으로 비난하고 독자들에게 문학의 죽음을 탓하면서도, 눈 흐린 세상의 이익을 추수해가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다.

마루야마 겐지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침을 가한다. '진정 문학을 좋아한다면 그렇게 정치적인 일에 흥미를 보일 리가 없는데 말입니다. 혹시 그들은 문학을 발판으로 삼아 작가 이상의 무엇이 되려는 것이 아닐까요.'

존재를 삼켜버릴 것처럼 끝 모를 심연의 검은 눈을 가진 고독을 대해 고개 돌리지 않고 그를 응시하고, 반드시 필요한 것만을 섭취하여 조금씩 성장하며 열매맺고 새끼 낳는 자연으로부터 배우고, 인공의 빛과 물질과 관계에 현혹됨 없이 빛과 그림자를 적당히 취하며 늘 같은 자세로 한 발 한 발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 그의 뒷모습에는 구도자의 이미지가 겹쳐진다.

사실, 누구나 그럴듯한, 듣기에 멋있는 말을 할 수는 있다. 적당한 코멘트로 논란을 불러일으키며 이름값을 높여가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당장의 이익 앞에서 자신의 소신을 지켜낼 수 있는 사람만이, 그런 사람의 삶만이 우리에게 감동을 줄 수 있다.

비슷하지만 다른, 언뜻 같아 보이지만 결코 같지 않은, 사이비들이 진짜의 자리를 차지하고 목소리를 높이는 것이 너무나도 일상적이 되어버린 이때, 마루야마 겐지의 글은 우리 모두를 향한 청랑한 풍경 소리, 정신이 번쩍 나는 죽비소리와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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