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양사 1
Reiko Okano / 세주문화 / 1997년 2월
평점 :
절판


1998년 11월에 보았던, 2차원의 인물에게 질투라는 걸 느껴본 최초의 만화였다. 질투의 주인공은, 에, 쑥쓰럽지만, 아베노 세이메이. 같이 만화보던 친구가 남기고 간 것을 우연히 들쳐봤다가 숨을 훅 들이키고 말았다. 물론 미나모토노 히로마사도 귀엽고 솔직한 2차원의 인물이지만 중성적인 매력이 솔직함보다 더 와닿는다고 해야 하나, 읽으면서 그 헷갈리는 대사보다도 자꾸 두 사람의 마스크에 시선을 고정하게 되고 만다. 

하긴 이 만화는 두사람 말고는 보통 사람처럼 생기질 않았다. 여자들은 눈썹을 민 다음 위로 올려 칠하고, 둘을 제외한 남자들은 앵란감자를 연상케 하고... 일본의 전통 회화의 구도를 의식적으로 흉내냈다는 걸 안 것은 좀더 훗날의 일이었지만 처음엔 조금 무서웠다. 게다가 한국판의 경우 복사나 가나 교정을 정말 대책없이 해서 상태가 끔찍하다. 오죽하면 작가(데즈카 오사무의 며느리인 것으로 유명하다)가 그 상태에 노여워하여 한국에는 라이선스 판을 내지 않겠다고 했다는 소문까지 돌겠는가.

처음 봤을 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방식이라는 게 어디선가 본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테면, 6권의 첫 이야기에서 세이메이(이하 S)와 히로마사(이하 H)의 대화를 보면

S : 저 사슴은 점을 칠 때 쓰는 신성한 사슴이야.
H : 그럼 저 사슴도 날 수 있단 말인가?
S : 자네는 너무 순진한 게 탈이야. :-P
H : (삐진다)
(갑자기 사슴이 마루로 날아서 S가 그려놓은 그림을 먹어치운다.)
S : 이런 이런 다 버렸군. -_-
H : 날 놀린 벌이야. ^.^ 마쿠즈가 슬퍼하겠군.
S : 이건 내가 연구하던 거야. -_-

(그래서 S의 태극과 음양오행에 대한 썰이 한참 흘러가고..)
H :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신비하군.
S : 근데 남에게 누설하지 말아줘.
H : 뭐? (뭘 알아야 누설하지.. )
S : 명색이 음양사인 내가 산가지나 부러뜨리며 놀고 있다면 체면이 뭐가 되겠나.
H : 알겠네.
S : 그렇다면 다시 첨부터 시작하지.

어쩐지 홈즈와 왓슨의 대화를 닮아 있는 거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헤이안 시대가 빅토리아조에 비견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얻어맞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름대로의 문화는 유지하고 있지만 사람들의 사고는 미신에 지배되어 있는 시대,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사건을 멋지게 해결하는 차갑지만 인간적인 음양사, 그의 술친구이며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독자의 심정과 그 이해를 같이하는 귀여운 히로마사군 (근데 이 친구도 귀신을 부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하는 엄청난 능력이 있다. 게다가 작가가 한 개의 이야기를 그에게 몽땅 할애하는 애정을 보여준다. 그런 면에서 단순한 왓슨역은 아닌데, 9권 넘어가며 그 아닌 쪽이 부각되고 나니 본래의 솔직하고 순진한 매력을 많이 잃어버려 아쉽다.)

게다가 세이메이군은 언제나 '모든 현상에는 인과관계가 있네. 나 자신도 그 인과의 한 부분이지.' 와 같은 말을 하고 다니며, 히로마사와 한바탕 쏘다닌 후에 어안이벙벙하는 히로마사(와 독자)에게 진상을 설명해 준다. 귀신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그 밑에는 셜록홈즈 이야기의 내러티브가 깔려 있는 것이다. 셜록홈즈라면, 국민학교 내내 사로잡혀 살았던 그 이야기, 맨날 똑같은 식의 이야기지만 변화하는 수수께끼와 캐릭터의 매력에 사로잡혀 어떻게든 구해보던 이야기가 아닌가.

오랜만에 걸작을 찾아내었다고 좋아했는데, 알고보니 내 대뇌 기저에 깔려 있던 오컬트 취미와 본격추리물에의 갈망과 맞아떨어진 것이었다고 생각하니 맥은 쫌 빠지지만, 중간 중간에 나오는 S & H콤비의 개그와 매력적인 사건, 풍수지리를 연상케 하는 주술과 음양도이야기, 헤이안 시대의 예술작품들을 연상시키는 깔끔하고 하얀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다. 특히 작가가 그림으로 은연중 부리는 개그는 진짜 황당하다. '날 또 놀렸지!' '그럼 처음부터 다시할까?' 하더니 첫 장의 그림을 다시 그리고 또 첫 대사 시작. 보다가 뒤로 넘어갔다.

히로마사의 동그래진 눈도 매력포인트. (불행히도 세이메이는 절대 그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톤 위에 또 톤깎기를 해서, 낮잠자는 헤이안 시대 일본인의 모습에 활엽수의 잘디잔 그림자를 드리울 만큼 세심한 그림에 0.0이나 T.T 같은 표정이 나타나는 거 자체가 개그다.

유감스럽게도, 9권 이후 세계를 구해야 하는(?) 세이메이의 역할이 거창해지고 이야기가 난해하게 흘러가면서 이런 자잘한 맛들이 많이 감퇴했다. 팬으로서 다시 세이메이와 히로마사가 한가로이 술을 나눌 수 있게 되도록 스토리를 조정해 줬으면 하는 발칙한 생각이 든다.


댓글(5)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panda78 2004-09-15 0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피리 불면서 제 흥에 겨워 우는 히로마사가 너무너무 좋아요. ^^

BRINY 2004-09-15 11: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히로마사의 동그래진 눈! ㅎㅎㅎ

물만두 2004-09-15 11: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모드 히로마사를 좋아하는군요. 저도... 짝퉁이라 좀 인쇄가 지저분하지만 읽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soyo12 2004-09-21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노무라 만사이 전 영화 속의 그 남자가 너무 좋아요 ^.~

Fithele 2004-09-21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그 남자 하나 건졌다고 영화관 나오면서 생각했습니다. 마지막에 전통춤 추는 거 너무 멋있었어요. 대구에서 봤는데, '달밤의 그대' 장면을 완전 들어내 버려서 나중에 히로마사가 오열하는 게 코미디가 되어 치를 떨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