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찍을 쥔 오른손 동서 미스터리 북스 151
딕 프랜시스 지음, 허문순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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딕 프랜시스의 작품은 경마가 성행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선 정말로 낯선 소재를 다룬다는 점에서 일단 높은 점수를 받고 들어갈 만 하다. 마치 흑백처럼 대조되는, 백년 전에서 튀어나온 듯한 점잔 빼는 신사들의 암투와 그 뒤켠의 법보다 인맥과 주먹이 가까운 일꾼들의 세계. 기본적으로 그의 경마 이야기는 첩보물 혹은 하드보일드에 가깝다. 거칠고 사나운 말, 말을 닮은 사람들, 그리고 원초적 본능이 극대화될 수밖에 없는 뜨거운 경주에 끼어드는 흑막. 게다가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무쇠 같은 자들이니 딱 삼박자가 맞아떨어지긴 한다.

근데 물 건너 대쉴 해밋이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에서 느낄 수 없던 열광이 딕 프랜시스에게는 있다. 그의 작품을 접하는 것이 [흥분]에 이어 이번이 2번째인데, 독자가 불타오르게 되는 원인은 대충 세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탐정 자신의 내면 투쟁의 부각. 권말 해설에서 읽을 수 있듯이, 시드 하레이는 약간은 이례적인 탐정이다. 촉망받는 기수였다가 사고로 왼손 대신 의수를 달고 PI로 직업 전환을 하게 되었으며, 불구의 몸이 가질 수밖에 없는 본능적 공포심에 사로잡혀 있다. (이 점은 맥스 캐러도스처럼 장애인이면서도 초인(超人)에 가까운 탐정과 확실히 대별된다) 전통적인 영웅에겐 절대 용서되지 못할 일이지만, 그런 약한 면으로 인해 일을 완전히 망치고 나락으로 떨어질 뻔 하거나, 한 순간의 판단 착오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기도 하는 모습이 정말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어떻게 보면 독자는 "이 약한 탐정이 과연 무너질 것인가, 무너진다면 어떻게" 라는 비정한 호기심으로 끝까지 그의 행동을 지켜본다고도 할 수 있는데, 쓰레기가 될 위기를 극복하고 무쇠 같은 자로 거듭남을 보면서 일종의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둘째, 트릭을 영국 전통의 리얼리즘으로 잘 포장한다. [흥분]도, 이 소설도 모두 말의 심리적/의학적 특질을 이용한 트릭을 보여주기 때문에 독자는 일견 불가사의하게 느껴졌던 승부조작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듣고 무릎을 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 책에서 재미있는 건 문외한인 독자가 레이스 조작의 트릭을 추리하기란 불가능에 가깝지만, 다른 플롯에서 추리할 요소를 남겨 놓고 있다는 사실. 

마지막으로 낯선 규칙에 의한 모험의 요소. 이 책에서  주인공이 예기치 않게 기구 레이스에 참가하는 대목은 정말로 훌륭했다. 낯선 소재, 낯선 풍경과 어우러진 두 기이하기 짝이 없는 사내들의 대화가 감칠맛 나는 흥미를 주었다. 경마는 그나마 경험할 기회가 있다손 쳐도,  기구 레이스 얘기는 보도 듣도 못한 것이었다. 그런 세계를 글로 간접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흥미와 열광을 불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사고로 부상한 왼손을 아주 잃게 된 경위를 "사고 이후 다른 폭행에 의해" 라고 적어 놓았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는 이 책에선 밝혀 놓지 않았다. 혹시 전작 [Odds Against] (1965)에서는 밝혀져 있지 않을까? 생소한 경마 미스터리를 원문으로 읽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에 출판이 더 많이 되었으면 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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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6-09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하 동문입니다. 저도 시드 해리 무척 좋아하거든요... 시드 해리가 나오는 것만이라도 출판해 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panda78 2004-07-05 2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요! 딕 프랜시스의 팬으로서 그의 모든 작품이 나와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나오는 대로 다 살 텐데!

瑚璉 2004-08-06 15: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개인적으로 그의 최고 걸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longshot'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지만, 그래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작품입니다. 최근 딕 프랜시스가 지은 책들의 출간이 늘고 있는데 환영하며 좀 더 나와줘도 좋지 않을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