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푼도 용서없다 동서 미스터리 북스 86
제프리 아처 지음, 문영호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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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여러모로 영화의 느낌이 많이 난다. 책을 좀 빨리 읽긴 하지만 2-3시간 정도의 짧은 시간을 들여 모두 읽었다는 면에서도 그렇고, 사기를 치는 자의 시점에서 사기를 당한 자의 시점으로 넘어가는 과정이나 복수의 수순이 모두 시간의 역전 없이 주욱 기술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하비의 인생 역정을 소개하는 부분은 모종의 다큐멘터리를 떠올리게도 한다. 실제로 90년에 BBC-파라마운트 합작으로 3시간짜리 TV 미니시리즈로 각색해 방영된 적도 있다는데, 비영어권에선 재방영은 고사하고 구경도 하기 힘들 물건이니 그냥 부러워만 할 수밖에. (검색해본 결과 영어권에서도 DVD는 커녕, VHS로도 나와 있지 않았다.)

대부분이 지금으로서는 거의 할 수 없는 사기 수법인듯 하지만 나름대로 귀여운 데가 있다. 등장인물마다 죄다 나쁜 짓을 하면서도, 왠지 미워할 수 없도록 유쾌한 것은 작가가 교묘하게 지금 설명하고 있는 인물의 관점으로 독자의 시선을 옮기기 때문인 것 같다. 사기극을 다룬 얘기 중에 이렇게 우호적인 분위기에서 진행되는 얘기도 그다지 많진 않을 것이다.

책소개에도 나와 있듯 생돈을 떼먹힌 걸 분개하고 복수를 궁리하는 것까진 필연적인 수순이었는데, 네 사람 모두에게 한 가지씩 계획을 연구해 세워 오라고 주문하는 것이 특이했다. 그로 인해 뭔가 틀어지지 않을까 하는 조바심까지 제공했으니까... 보통 '한번 속지 두번 속나' 라는 속언이 있을 정도로, 어떤 사람을 한번쯤 속이기는 쉬워도 4번을 속이기는 쉽지 않은 법인데. 나는 특히 4번째에 감탄했다. 수법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지만, 작중 내내 얼빵하던 캐릭터가 갑자기 뒤통수를 칠만한 계략을 걸었다면 매우 비현실적이지 않은가? 오히려 그의 얼빵함이 마지막 뒤통수 치기에 일조하게 된 걸 보고 작가의 이야기 솜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작가가 정치를 하다가 불운을 겪고 나서 일종의 도박을 거는 기분으로 쓴 처녀작이라는데 - 지금은 가장 잘 나가는 작가 중 한 사람이 되었지만 - 작가 초년생이라고는 하나 아마도 미스터리의 열렬한 팬이었을 것 같다고 느끼게 하는 부분이 꽤 있다. 이를 테면, 열차 안에서 만난 여승객이 '매우 재미있는 ****의 소설을 읽고 있다'든가 해서 특정 소설을 격찬한다든가, 다른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을 이름을 밝히지 않고 은근슬쩍 등장시킨다든가 하는 것. 이런 요소들은 단순한 미스터리 사랑의 표출로만 끝나지 않고, 구성의 복선과 맞아떨어지면서 마지막에 무릎을 치게 만들기도 했다. 여러 모로 유쾌하고 가벼운 복수극이니 일독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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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두 2004-04-28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너무 빨리, 너무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지막의 기막힌 아이러니가 더 재미있었습니다. 코믹 미스터리라 해도 좋지 않을까 생각되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