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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뿐일지 몰라도 아직 끝은 아니야 - 인생만화에서 끌어올린 직장인 생존철학 35가지
김봉석 지음 / 한겨레출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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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봉석
출판사: 한겨레출판


 '인생만화에서 끌어올린 직장인 생존철학' 

 카피에 잔뜩 마음이 끌려서 서평단을 신청했다. 책을 받았을 때에는, 레트로가 유행해서일까. 선명한 형광빛 주황색 표지가 날 설레게 했다. 표지의 그림이 저자의 캐릭터화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그래서 뭐하는 분이지?'라는 의문이 표지로는 해소되지 않았다. 온순한 양의 탈을 쓰고는 세상에 달관한 듯한 무표정을 짓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면서도 그래서 오히려 '직장'이라는 소재와 잘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양의 탈을 저자가 쓴 직장인 생존철학 뭘까, 궁금증이 더해진다.

 책 소개를 보았을 때는 저자의 인생만화들에서 생존의 법칙과 인생을 이야기한다는 부분이 끌렸다. 나도 만화를 꽤 좋아하는 편이기에 더더욱. 목차를 펼쳤을 때, 저자가 구성한 목차인지 편집자가 구성한 목차인지는 몰라도, 제목과 구성이 괜찮다고 생각했다. 확실하게 주제가 나뉘어 있고, 그 주제에 부합하는 제목들. 약간 정신 사나운 빗살 무늬 디자인은 차치하고, 목차 내용은 잘 만들었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많지는 않았지만, 나도 직장에서 겪어 봤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인물과 상황들이 비슷한 면들이 있어서 "그래, 맞아! 그렇지!" 하며 격렬한 공감을 표하며 읽을 수 있는 에피소드들이 많았다. 에세이는 독자가 공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 1순위라고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한마디로 ☆대공감파티★였다. 정말 직장이란 '또라이 질량보존의 법칙'이 가장 정확하게 지켜지는 곳이란 말인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이 조금 씁쓸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킬 빌>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복수는 차가울 때 가장 맛있는 음식과 같다." (중략) 무엇을 식혀야 할까? 감정이다.

- p. 47


누군가 A를 이야기할 때 그것을 반대하면 논쟁이 시작된다. 그러나 A를 인정하면서 A+나 A'를 하자고 하면 대화가 시작된다. 직접적인 반대가 아니라 전체적인 것에 동의하면서 약간의 방법론에 변화를 주자는 것이니까.

- p. 61




 '이 두 가지는 내가 잘하지 못했던 것들이지.' 지난 시간을 떠올리며 어렸던 나를 돌아보고 같은 실수를 두 번은 반복하지 않아야겠다고 생각하게 하는 구절이었다.




누군가를 승진시켜야 할 때, 일을 못해서 쉬운 자리에 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혹은 무시하고, 꾸준하게 사고 없이 일을 잘해온 사람으로 평가하여 올린다. 일을 잘하는 사람은 그런 처사에 낙심 혹은 분노하며 회사를 그만둔다. 회사는 점점 일을 못하는 사람들만 남게 된다.

- p. 69


결국은 내가 살아 있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퇴사를 하는 것은 내가 살아남기 위한 시도다. 더 좋은 길이 있을 것 같다면 당연히 가야 한다. (중략) 조직에 계속 있으면 감정에 휩싸여 내가 망가질 것 같아서, 좀비처럼 그냥 떠돌고 반복적인 일만 할 것 같아서 그만두는 것이다. 퇴사는 죽음이 아니라 살기 위한 도전이다.

- p. 162~163




 이 구절들은 회사의 문제라고 생각했던 점과 도망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가 똑닮은 모습으로 서술되어 있다. 늘 도망치고 싶었지만 적확하게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 애끓였던 마음을 가장 명확하게 대변하고 있는 구절이기도 했다. 퇴사는 죽음이 아니라 살기 위한 도전. 그래, 정말 나에게는 그랬다.




다만 아는 것은 있다. 1화로 끝이 나는 이야기는 단편밖에 없다는 것을. 장편이라면, 인생의 페이지를 펼치기 시작했다면 아직 멀고 먼 에피소드가 남아 있다는 것을. 그때 실패하기를 잘 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 p. 97




 이렇게 모든 시간을 거쳐, 그래. 그때 그 회사를 선택한 게 나의 실패의 경험으로 남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때 실패하기를 잘했다고 나도 생각한다.



 이처럼 나는 이 책 전체를 무척 많은 공감을 하며 읽었다. 글쓰기를 업으로 살아가는 분이어서 그런지 술술 잘 읽히는 글들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재미있게 읽혔다. 미사여구가 없이 간결하고 담백하게 쓴 글이 가장 잘 읽히게 잘 쓴 글이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


 다만 책을 읽으며 오탈자도 발견했고, 비문도 간간이 눈에 띄었으며, 드문드문 부사나 접속사를 좀 더 활용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싶은 문장들도 있었다. (위에 인용한 책 속 구절 중에도 그런 문장이 하나 있다......) 주제 집약적이지 못하고 글과 상관없는 내용들이 군살처럼 남아있는 글도 있어 아쉽기도 했다. 이런 부분들을 보며 교정교열의 어려움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된다. 또, 책의 콘셉트가 인생 '만화'인데 영화 관련 일을 하던 기자 출신이어서 그런지 '만화'보다는 '영화' 이야기가 더 많은 것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있었다. 좀 더 콘셉트에 집중하는 책으로 만들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아쉬움이 없는 책은 아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직장 생활이 너무나도 고달파서 친구와 직장 흉이라도 보며 수다 떨고 싶은 기분이 들 때, 전투력이 너무 상승해 좀 낮춰야 할 위험성을 느낄 때, 가슴속에만 품어야 할 사직서를 상사의 책상이 품게 하고 싶을 때 그냥 한번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얼핏 가벼운 것 같지만 이 안에는 직장에서의 처세술도 있고, 인생도 있고, 관계도 있다. 읽다 보면 결코 가볍지만은 않은 에세이로 추천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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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누구니
이희영 지음 / 황금가지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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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희영
출판사: 황금가지


 이희영 작가의 전작인 페인트를 꽤 인상 깊게 읽었기에 이번 신작 '너는 누구니'에 대한 기대가 굉장히 높았다. 무엇보다 로맨스릴러라는 새로운 장르가 어떤 것일까, 짐작은 가지만 진짜 어떤 분위기일까 책이 오길 기다리는 동안 내내 들떴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각보다는 괜찮았고 기대보다는 별로였다고 말하고 싶다. 그래서 별점은 딱 중간인 3점.

 일단은 표지가 좀 쉽게 집어들기 힘든 책이었다는 점이 가장 크게 아쉬웠다. 양장인 책의 싸바리 일러스트가 오히려 독자의 심리적 접근성을 너무 높이는 느낌이었다. 표지만 보면 너무나 중학생쯤이 읽을 법한 청소년연애소설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었기에. 솔직히 말하자면 오프라인이라면 선뜻 집어 들기 약간 부담스러운 표지였다. 차라리 싸바리에 가려진 본 표지가 오히려 책 내용이나 제목을 더 잘 반영하는 느낌이었다. 꽃들과 유리조각의 조화가 로맨스릴러라는 신 장르를 엄청 잘 나타낸 표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펼치고는 편집에 대한 아쉬움이 있었다. 취향의 차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단어 잘리지 않게 하기 위해 줄바꿈 하는 부분이 가로로 꽉 차 있지 않는 편집이 굉장히 산만해서 싫어한다. 줄바뀜 되는 부분이 오직 단어가 잘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들쭉날쭉한 편집 때문에 읽는 내내 다음줄 내용이 헷갈려 몇 번씩이고 다시 읽고 또 다시 읽어야 하는 부분이 아쉬웠다.

 하지만 이런 외적인 부분들의 아쉬움을 넘어 내용은 굉장히 재미있고 흥미진진한 부분이 많았다. 작가님이 요즘 10대들의 말투나 관심사, 사고방식 등에 대해 얼마나 자료 조사를 열심히 하고 있는지 딱 알 수 있을 정도로 잘 표현되어 있다. 처음부터 숨가쁘게 내지르는 추리 소설도 좋지만 이 책과 같이 서서히 고조되어 가는 미스터리한 분위기도 꽤 긴장감 있어 매우 좋았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스토리를 풀어나가는 부분은 오로지 작가의 필력에 달린 부분이라 역시 잘 쓰시는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다만 중간 중간 약간은 지루한 부분들이 있었고 끝까지 집중하도록 만드는 미스터리함의 긴장감이 중후반이 좀 떨어지는 부분이 있었으나 충분히 재미있는 책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희영 작가의 다음 작품을 또 기대하게 만드는 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표지의 압박을 이기고 한 번쯤은 읽어보라 추천하고 싶은 책이기도 했다. 좋은 글을 써 준 이희영 작가께 감사하며 다음 작품도 기대한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그 녀석…… 깨어났어." - P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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썅년의 미학 썅년의 미학
민서영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저자: 민서영

출판사: 위즈덤하우스



 책이 간행되기 전부터 SNS에서 내용이 '사이다'라고, '내가 정말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다는 추천을 많이 보았다. 서평단을 모집한다는 공지를 보자마자 득달같이 달려가 신청한 이유였다.


 썅년의 미학.

제목부터가 엄청나게 강렬하다. 욕으로 쓰이는 말이 당당하게 제목이 되어 책 전면에 인쇄되어 있는 것부터가 이 책이 어떤 얘기를 늘어놓을지 감히 짐작되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래서 더 정감이 가는 제목이라고 말하고 싶다. 두 번째로 마음에 든 부분을 꼽아보자면, 단연 표지였다. 페미니즘 도서로 분류되는 책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홍색 일색인 것들이 나는 꽤 불편했다. 분홍색을 여자의 색으로 정의한 사회가 이상한 건 분명하지만, 그래서 모르는 사람들은 더욱더 접근을 꺼리게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부 남자는 그저 '여자의 색'인 분홍색이라 무작정 싫어하고, 일부 여자 역시 '여자의 색'이라 싫어하는 사람이 많다. '여자의 색'이라고 폄하 당하기 때문에 분홍색을 좋아할 수도 있는 취향이 미리 거세당한 느낌이 있다. 스스로 분홍색 알레르기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나 역시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그런 의미의 연장선으로 분홍색 일색이지 않은 표지가 좋았다. 그리고 컬러에 대한 감상을 떠나, 후작업 된 홀로그램박이 너무 예쁘고 가름끈이 있는 양장본이라는 점이 더없이 나의 취향에 맞아 좋았다.


 표지에 한없이 감탄한 후 드디어 표지를 열었다. 서밤님의 서평에 속으로만 좋아요 백만 개를 보내며 목차로 넘어갔을 때, 나는 설레는 동시에 울컥하는 마음을 도저히 감출 수가 없었다. 그저 목차만 보아도, 내가 하고 싶었던, 앞으로도 하고 싶은 말들이 가득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여자로 태어나서. 내가 살아온 일수보다 더 많이 생각했던 그 말. 제목들을 가만히 보는 것만으로도 작가님이, '그동안 너도 살기 힘들었지?'라고 위로해 주는 느낌이었다.


 잠시 딴 얘기를 조금 하자면, 나는 책 읽는 속도가 매우 느린 편이다. 글자를 하나하나 매우 꼼꼼하게 읽는 편이기 때문이다. 만화책 한 권을 읽는데도 1시간이 넘게 걸린다. 그런 내가 이 책을 1시간만에 읽었다. 재미있고, 통쾌하고, 시원했다. 명치에, 머리에, 온 전신에 평생 얹혀있던 하고 싶은 말을 못해 쌓인 울분이 쑥 내려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째서 이 책이 그렇게 많은 추천을 받았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예의와 호의를 헷갈리지 마세요.  

- p. 20



 이 책을 통틀어 가장 좋았던 문장이었다. 여자에게 늘 싹싹하고 상냥하게 말하라고 가르치고 강요하면서, 왜 그렇게 언행을 하면 다들 날 좋아한다고 착각하느냔 말이다. 난 이런 걸 두고 늘 속으로 '지가 그렇게 행동하라고 했으면서 이제와서 X랄이야.'라고 생각했었다. 사람의 면전을 앞에 두고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이제 나는 이 문장을 통해 면전에서도 당당하게 불편하다고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얻었다. 


 사실 좋았던 내용을 꼽자면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이 책은 깊은 공감을 주었다. 하나하나 모두 언급하기엔 무리가 있어 한 문장만 인용해 보았지만, 기회가 된다면 꼭 이 책을 모두가 읽어보길 바란다. 단순히 '사이다' 내용이라서 추천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다. 물론 그런 내용이기 때문에 나처럼 하고 싶은 말 못하고 냉가슴 앓는 사람들에게 대리만족을 줄 수 있는 이점도 분명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책은 비슷한 억압을 받으며 살아온 여성들과, 그런 여성들을 늘 '여자는 속을 알 수 없다.'며 비하하는 남성들, 모두가 읽어보았으면 좋겠다. 이 나라 인구의 반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알 수 있는데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물론 그런 현실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는 사람들에게 말이다.


 얼마 전 페미니즘 드라마라며 후려치기 당하기도 했던 한 드라마가 지하철 쩍벌남에게 대처하는 여주의 모습을 방송했을 때, SNS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했었다. 저건 어디까지나 드라마이며 현실에서는 어떤 보복을 당할지 모르니 여자들이 절대 저렇게 행동할 수 없다고. 사이다만 보여주면 다냐고 비난했었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다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남에게 피해를 끼칠 수 있다는 걸 '인지'조차 하지 못하고 산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먼저 너의 행동과 말에 불쾌감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라는 걸 알리는 것부터 차근차근 시작하는 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첫 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 말이다.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딱 하나다.

 "그저 '사이다'면 또 어때? 속 시원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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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애의 마음
김금희 지음 / 창비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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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금희

출판사: 창비



 매일 들고 다니며 읽고 또 읽고 또 읽느라 책이 이미 너덜너덜해져 인증샷을 찍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김금희 작가의 경애의 마음은 재미있는 책이었다.


 너무 한낮의 연애에 이어 두 번째로 읽어보는 김금희 작가의 글은, 극중 인물이 살아온 인생의 희노애락을 담담한 문체로 풀어내는 것이 너무나 나의 취향이었다. 그래서일까. 상수의 시점에서는 내가 상수가 된 것처럼, 경애의 시점에서는 내가 경애가 된 것처럼 그들의 인생 굴곡에 울지 않는 그들을 대신해 울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시련과 괴로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여전히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 따뜻한 마음의 위로를 한아름 받은 것 같았다. 책을 덮자마자 생각했다. 참 다정한 책이었다- 고.



 상수와 경애의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번째는 회사의 눈엣가시들이다. 상수는 낙하산이다. 사장의 아버지와 상수의 아버지의 친분으로, 영업 실적이 좋지 않음에도 회사에 오래 남아 있고 팀장대리라는 선뜻 무엇인지 이해가지 않는 직책을 맡고 있다. 경애는 노조 파업의 참가자다. 그러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제출한 사표를 돌려받지 못했음에도 운좋게 회사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지 않고 남게 된 주임이다. 

 두번째는 오래 전 화재 사고로 잃은 친구 은총이다. 경애와 은총은 영화 동호회에서 만난 사이다. 각각 피조와 E라는 닉네임으로 만난 그들은 이야기를 하고 함께 영화를 보며 한겹한겹 감정을 쌓아간다.



사실 나는 그런 얘기를 하기도 했어, E에게.

자자고?

자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뭐라 그랬어?

그러면 아주 따뜻하겠네, 라고 했어. 얼마나 따뜻할까, 하고. 한동안 따뜻하다는 말을 쓸 수가 없었어, 기억이 나서. 어떤 말은 그렇게 기억에 빼앗기는 것 같았어, 쓸 수 없었어. 

- p. 157



은총에 대한 경애의 마음이 앞에서 보여줬던 것보다 깊었다는 것을 여기서 깨달을 수 있었다. 그런 친구를 잃었을 때. 같은 현장에 있었음에도 본인만 '운이 좋아' 살아남았다는 생각밖에는 할 수 없을 때. 미성년자가 음주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추모가 아닌 욕을 먹어야 했을 때. 경애의 마음은 어땠을까. 담담하게 이야기 하고 있지만, 그 상실감, 고독감, 죄책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임이 분명했다. 상수와 은총은 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영화제작 캠프에서 만난 사이다. 짝사랑 하는 상대가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친한 사이. 은총이 죽고 상수는 그의 사서함에 남겨진 메시지들을 들으며 운다.



그리고 여자애가 내는 숨소리만이 들리더니 끊을 때쯤 되어서야 미안해, 하고 겨우 한마디를 내놓았다. 미안해, 나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그래서 눈을 먼저 네가 있는 곳에 보낼게.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달그닥 소리가 나며 녹음이 종료되었는데 상수는 긴 침묵 끝에 여자애가 내놓은 그 말이 지금까지의 누구의 애도보다 슬퍼 오래도록 울었다. 

- p. 109



30대면 아직 젊은 나이임에도 그의 삶에 죽음으로 인한 상대의 부재가 많다는 것이, 경애의 마음뿐 아니라 상수의 마음에 대한 생각도 해보게 했다. 



 이 소설의 주인공 두 사람은 견디고, 견디고, 또 견딘다. 사랑하던 친구의 부재를 견디고, 압박하는 회사를 견디고, 폭력적인 가족을 견디고, 사랑의 상처를 견디고, 엄마의 부재를 견디고... 인생을 견뎌내는 방식은 조금 다르지만, 어쨌든 두 사람은 끊임없이 이 모든 것을 견뎌내고 살아가려 한다. '언니는 죄가 없다'라는 상수의 페이스북 페이지 이름처럼, 그들에게는 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어떻게든 이 모든 것을 견디고 살아간다. 이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내려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그 감정선을 가만히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 켠에 큰 위로가 되는 책이었다. 



 책을 다 읽은 지금, 그렇게 살아내고 있는 경애와 상수에게, 그리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이 시대의 모든 '견디는 인생들'에게 敬愛를 표하고 싶어진다.



어떤 말은 그렇게 기억에 빼앗기는 것 같았어, 쓸 수 없었어.

그리고 여자애가 내는 숨소리만이 들리더니 끊을 때쯤 되어서야 미안해, 하고 겨우 한마디를 내놓았다. 미안해, 나는 아무래도 늦을 것 같아...... 그래서 눈을 먼저 네가 있는 곳에 보낼게. 그리고 수화기를 내려놓는 달그닥 소리가 나며 녹음이 종료되었는데 상수는 긴 침묵 끝에 여자애가 내놓은 그 말이 지금까지의 누구의 애도보다 슬퍼 오래도록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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