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
김연자 지음 / 삼인 / 2005년 6월
평점 :
절판


 

   11월 26일에 열린 ‘제 3회 성폭력 생존자 말하기 대회’에 관한 기사를 보았다. 지면으로 전해지는 고통만으로도 내 가슴이 너무나 아프고 시렸다. ‘여자’라는 이름을 지닌 모든 이들 중 “난 ‘피해자’가 아니야”라고 말할 수 있는 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성폭력, 성희롱, 근친강간, 가정폭력이란 이름 안에 자신의 경험을 미처 언설화하지 못하고서 그냥 자신만의 아픈 경험으로 가슴에 묻고 죽어간 이들이 또 얼마나 많을까?

 

   지난 달에 만났던 '최진이' 씨(북한이주여성, 『국경을 세 번 건넌 여자』저자) 역시, 남한 사회에 와서야 자신이 어릴 적에 경험했던 일이 바로 ‘성폭력’이었다는 것을 알았다고 했다. 결국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언어화할 수 있는 도구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더더욱  여성주의는 여성의 경험을 해석할 언어를 만들어 나가는 운동이라 정의 내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아메리카 타운 왕언니 죽기 오분 전까지 악을 쓰다’는 여성주의에 관한 인식을 한 단계 무르익게 하는 책이 분명하다. 그녀는 가난과 전쟁 한 가운데서 태어났다. 그리고 세 살 적에 친아버지로부터 버림받았고, 11살 때는 친척오빠에게 성폭행을 당한다. 사춘기 시절 여자친구와의 우정과 사랑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한 군인으로부터 또다시 성폭행을 당한다. 그 후 그녀의 자존감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결국 거리를 방황하게 된다. 그러다가 부녀 보호소, 동두천, 송탄, 군산 아메리카 타운으로 옮겨다니며 기지촌 25년간의 생활을 이어나간다.

 

   그녀의 고통스런 몸은 ‘대한민국은 군대’임을 여실히 보여주는 장이 된다. 전쟁으로 인한 가난과 외로움, 친족과 군인으로부터의 성폭행, 자그마한 주장이나 울부짖음도 빨갱이로 몰아가는 유신체제, 버스 안내양으로 생활하면서 경험한 여성노동력의 착취, 아버지로 상징되는 자유당의 부패, 미군을 붙잡아 두려고 정부가 앞장서서 마련한 기지촌, 달러를 버는 애국자라 부추기며 보건증을 발부하여 여성의 몸을 통제하는 국가, 기지촌을 둘러싼 한미관계는 우리의 일그러진 근대사와 여성의 몸을 통해 이루어지는 일상의 폭력들을 그대로 드러낸다.

 

 

                           

 

 

   그녀에게 그 고통의 터널을 빠져나오는 것은 피를 쏟는 또 한번 죽음을 각오한 힘든 과정들이었다. 그리고 아직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그녀를 가장 괴롭혔던 것은 기지촌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는 점이었다. 그로인해 자신을 더욱더 질책하고 자학했다. 그리고 탈성매매하기까지 걸렸던 10여 년의 시간과 기지촌 생활 25년간을 되돌아보면서 그녀는 “왜 그토록 달라지지 않았을까?”, “왜 평생 분노를 부등켜안고 있었을까”하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그녀는 조심스레 자신이 찾아낸 지점들을 고백한다. “매춘은 정신질환에서 오는 병이다”. “사랑받지 못하고 존중받지 못해 생긴 마음의 병, 모질고 가혹한 환경 속에서 앓게 된 병”이라고 한다. 또 그래서 더더욱 “연민과 아픔만으로는 기지촌의 삶과 매매춘 문제를 온전히 풀어나갈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 부분에서 나는 너무나 맘이 저렸다.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음은 자신을 자학하는 원인으로 작동했고, 어릴 적 성폭행은 자신을 지켜주지 못한 어머니와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확장되어 갔고, 그것이 평생토록 자신을 괴롭히게 된다. 저자가 아버지의 죽음과 함께 또 아흔을 넘긴 어머니에게 자신의 어릴 적 성폭행을 털어놓았을 때 그때서야 비로소 깊은 상처가 치유되어가는 것을 보게 된다. 그때가 바로 그녀의 나이 예순이었다.

  

 

   그런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정신병’이란 이름으로 규정지었다. 사실 그녀가 정의내린 그 정신병이야말로 사회구조적인 성차별이 만들어낸 병이다. 생물학적인 아버지의 버림을 넘어 남성 가부장제에서 버림받은 존재들 그 모두가 자신의 언어를 갖지 못해 속앓이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 여성들은 그 모두가 정신병자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되묻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왜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고.

 

   ‘정희진’은 “아는 것은 타인을 지배하는 힘이거나 권력에 도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상처받는 일이어야 한다. 안다는 것, 더구나 결정적으로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삭제된 역사를 안다는 것은,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페미니즘의 도전' 에서)”고 말한다. ‘정희진’의 날카로움이 나를 긴장하게 만든다.  ‘아는 것은 실천의 시작이며, 실천은 아는 것의 결과’라는 말을 좌우명처럼 안고 살아온 나에게, 성매매에 대해 아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되물어 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가 앓을 수밖에 없는 정신병 역시 “연민과 아픔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저자의 지적은 내게 또다른 과제로 안겨온다. 

 

    우리가 추구하는 여성주의는 자신들을 행복하게 만들진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상식’에 대해 도전하는 일이며, 새로운 언어를 통해 자신의 경험을 발설할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리고 “무지로 인해 보호받아 온 자신의 삶에 대한 부끄러움이 동반되는 일이며, 사회에 대한 분노, 소통의 절망 때문에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래서 더더욱 나는, 저자의 경험에, 용기에, 실천에 존경을 보낸다.

 

 

 

                           

 

   물론 이로 인해 그녀의 삶이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오히려 상처가 더 깊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의 경험과 드러난 것의 간극은 새로운 ‘낯설음’이 되어 그를 더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세상을 향해 말하기 시작한 그녀는 이제 이전의 그녀와는 다르다. “말한다는 것은 묘사하는 행위가 아니라 개입하고 헌신하는 실천”이며 그녀는 이미 상처에서 태어난 새로운 언어를 가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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