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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평점 :
삶을 살아가다 보면
다양하고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기도 한다. 그
대상은 종교의 유무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이나 성직자가 될 수도 있고,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구 또는 상담가나 멘토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책 속의 저자도 가능하지 않을까.
책
속의 저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내가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단지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은 『감정수업』을
읽고 저자를 다시 만나보고 싶어 저자의 다른 책을 찾아보다 읽게 되었다. 마치
우연히 마주친 매력적인 이성에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듯이.
‘인문학
카운슬링’이란
부제를 간판으로 내건 상담소에서 난 무려 48명의
동, 서양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을 통해서, 삶을
살아가는데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의 성찰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맨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 페르소나를 쓰거나, 반대로
페르소나를 드러내야 할 때 맨얼굴을 보여주려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를
쓰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우리에게 맨얼굴의 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39p
우리는 대부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매일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관계의 수는 나와 만나는 타인의 숫자만큼 다양할 것이다. 그처럼
다양한 타인과 만날 때 우리는 가면, 즉
페르소나를 쓴다. 아마도
거의 페르소나를 쓸 필요가 없는 타인은 가족밖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을 나서는 순간 페르소나를 쓰고 집에 돌아와서는 페르소나를 벗는 것이 아닐까.
페르소나는 나 자신이 만들어내고 꾸며내어야 하므로 항상 부정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쓰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에픽테토스 Epiktetos와의
만남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좋은 것이니 가져야 하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이니 버려야 하는 문제는 사라진다. 이전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던 생각은 페르소나는 나쁘고 맨얼굴은 좋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이분법적인 생각과 나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함께 공존하기 어려웠던 게 아니었을까.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앞으로 내가 고민해야 할 점은 페르소나와 맨얼굴 중 어떤 것을 언제 쓰고 또
드러낼지의 문제일 것이다. 마치
카드게임에서 어떤 카드를 내어야만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듯이. 물론
어떤 카드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맨얼굴의 건강관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지만.
어떻게 해야 이 네모난 얼음이 둥근 그릇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이
얼음이 네모남이란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래서
그릇의 둥긂을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네모남을
버리려면 혹은 버렸다면, 얼음은
반드시 물로 변형되어야 하거나 그렇게 되었어야만 한다. 55p
소통은 참으로 어렵다. 때로는
먼 이웃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소통이 훨씬 어려울지도 모른다. 가족과의
소통에서 종종 발생하는 어려움과 그 해결 과정을 바라보면서, 이통
李恫과의
만남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네모난
얼음이 둥근 그릇과 소통하려면 물로 변형되어야만 하듯이 내 마음도 내 자의식도 변화되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타자와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변화보다 나 자신의 변화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소통이
어렵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얼음은
물로 순식간에 변하지 않는다. 얼음이
녹아서 물로 변화하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고 인내의 시간일 것이다. 진정으로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란다면 어렵고 번거로우며 귀찮더라도 소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을
포기하는 순간 마음을 닫아버리게 되고 그 관계는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을 마주 보며 서 있는 두 사람처럼 더는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겸허하게 그 결과를 초월자에게
내맡긴다면, 종교적
정신은 충분히 인문적 정신과 양립 가능하다. 그렇지만
종교적 정신은 치열한 성찰과 불굴의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나약한 정신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차피
최종결과는 초월자가 결정한다고 믿기 쉽기 때문이다. 70p
성당 주임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저자의
글과 신부님의 말씀이 통하는 순간이고, 저자와
신부님의 관점이 만나는 순간이며, 인문학
정신과 종교적 정신이 만나는 순간이 아닐까.
저자는 인문학과 종교가 만날 수도 있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종교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온전히 찬성하지는 않지만, 종교적
정신이 나약한 정신으로 흘러갈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선 또한 온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인문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인문학책을
접하면서부터 시작된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155p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아이히만의 재판과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와의
만남을 통해 드는 생각은 세 가지였다. 첫째,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에 나에게 주어진 삶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타인과의
삶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은 때로는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셋째,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사유를 멈추지 말아야만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물론 불필요한 사유로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혹 내 삶이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저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권력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실천가가 줄어들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방관자가 늘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의 볼거리들이 기본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볼거리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우리는
대중매체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내면에 신상품의 유행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결국
우리는 여가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250p
나와 직접 관계가 없다면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관심한 것이야말로 방관자가
아닐까. 그
말에 가시를 찔린 듯 아픈 것은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할 때마다 기억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래서인지 잠시뿐이다. 대중매체도
그렇지 않을까? 빨리
방관자라 되라는 듯 다른 한쪽으로는 수많은 볼거리로 우리의 눈과 귀를 뒤덮어 버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히
자본이다. 자본과
손잡고 있는 대중매체이기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
대중매체는 우리를 소비하도록 유혹한다. 그럼으로써
돈은 자신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며 이를 통해 더욱 강력하고 큰 힘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대중매체와
담을 쌓고 살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이를 식별해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꼭 필요할 것 같다. 대중매체의
볼거리들 뒤에 숨어있는 거대한 자본의 논리에 세뇌당하지 않으려면. 저자는
방관자보다는 실천가가 되라고,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해서 개입하여 현실감각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사랑은 몸으로, 즉
실천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의 고난과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려는 마음에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말은 하나의 미사여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282p
진정한 기독교인이란 어떤 것일까? 시몬
베유 Simone Weil의
삶과 만남을 통해 드는 생각이었다. 『신약성경』
야고보
서간 3장
26절
말씀이 떠올랐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이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믿음에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그 믿음대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야고보
사도의 말씀대로 그 믿음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사랑
또한 그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약성경』
마태오
복음서 22장
34절에서
40절에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온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고
하시고, 이어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하시면서, ‘둘째도
이와 같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다’는
말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 다 큰 계명이고,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줄곧 말하면서도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는 실천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내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저자의 표현대로 그저 하나의 미사여구로 전락한 것은 아닐지.
책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만난 동, 서양
철학자들과의 시간은 참으로 즐거웠다. 각각의
철학자와 만나는 시간이 짧기에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철학자와 더 만나보고 싶다면 그들의 책을 읽어볼 수 있도록 마지막에 참고 도서를 더 제시하고 부연 설명을 친절하게 달아
놓았다.
몇몇 철학자들은 더 만나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고, 내
마음속에 그들의 책을 담아 두었다. 처음에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철학자들과의 만남은 저자를 통해 좀 더 쉽게 다가왔다. 마치
타인과의 첫 만남에 공존하는 어려움과 약간의 불편함이 그 자리에 함께한 지인으로 인해 좀 더 편하게 느껴지듯이.
제대로 직면하고 싶지 않거나 피하고 싶어서 더는 생각하고 질문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저자와
철학자들의 불편한 목소리는 마치 날이 선 칼처럼 날카로웠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쉽게 찾지 못할 때 도와줄 누군가를 찾는다. 어쩌면
그때 책 속의 저자와 다양한 철학자들 또한 그 대상 중의 한 명이 될 수도 있고,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