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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은 입문학이다
김보경 지음 / 현자의마을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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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독이란 글자 그대로 글을 소리 내 읽는 것을 말한다. 낭독을 생각하면 TV 역사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떠오른다. 서당에서 훈장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큰 소리로 책을 따라 읽게 하거나, 서재에서 선비들이 책을 소리 내 읽는 그런 모습이다. 공부 방법 중에는 책에 있는 글을 베껴 적는 필사도 있었겠지만, 낭독이 먼저 떠오르는 건 아마도 그것이 가장 효과적인 공부 방법이 아니었을까?

 

 

언젠가 읽었던 최진석의『인간이 그리는 무늬』에는 낭독에 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낭송을 하면 읽은 내용이 육체적인 감각을 건드려 내면화하게 됩니다. 육체적 내면화라고 할까요? 아는 내용이 육체화하는 것을 체득이라고 합니다. 터득을 해야 지식이 실천되겠지요. 체득되지 않은 지식은 머릿속에 잠시 머물다 사라져 버려요. 아무런 변화도 일으키지 못하지요.' 268p

 

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앞서 읽었던 책의 낭독에 대한 효과가 생각났다. 그와 함께 눈길을 끈 것은 'SBS 다큐멘터리' 내용이었다. 낭독에 관해 관심이 많았던 터라 TV 방송에서 '낭독의 효과'에 대해서 다루었다는 사실이 반갑고, 한편으로는 신기했다. 저자는 '북코러스'라는 이름의 독서 낭독 클럽을 만들었는데, 이 책은 4년 7개월 동안 지속 되어온 클럽에 대한 이야기와 낭독에 대한 저자의 고백이자 체험담이다.

 

 

"활자를 일으켜 세우다! 낭독이 하는 가장 기본적인 역할이자 눈에 띄는 효과다. 소리 내어 글을 읽는 행위는 책 속에 갇혀 있던 활자를 일으켜 세워 공간 속으로 뛰어들게 한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이 입체성은 다양한 모습과 역할로 읽는 사람에게 다가간다. 그것은 단어 하나의 의미에서부터 단락과 단락 사이의 맥락에 이르기까지 긴 호흡으로 깊이 있는 독서가 되도록 돕는 안내자와도 같다." 91p - 김지훈 (에디터)

 

책 중간중간에는 '북코러스' 회원들의 낭독 체험기가 실려 있는데, 첫 번째로 소개된 체험기 제목은 '낭독은 활자를 일으켜 세운다'였다. 낭독의 효과에 대해 이처럼 강렬하게 와 닿는 문구가 또 있을까? 책에 붙어있는 어떻게 보면 누워있는 활자를 일으켜 세운다! 활자를 의인화시켜 표현한 문장들이 신선했다. 낭독으로 일어난 활자는 읽는 사람에게 다가가고 깊이 있는 독서를 돕는다고 한다.

 

"책 속엔 수많은 세상이 녹아 스며들어 있다. 저자가 체험하고 상상한 일들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우리는 그 내용이 풍기는 의미와 영감에 탄복하면서 상상의 세계를 공유하게 된다. 그런데 저자의 감상과 의지를 좀 더 체감하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두뇌에 입체 정보를 공급하는 방법이다. 바로 책을 눈으로 읽지 않고 소리 내어 읽는 낭독이다." 96p - 이준정 (미래탐험가)

 

좋은 책을 읽을 때면 그 저자가 쓴 내용에 담긴 의미와 영감에 탄복하고, 기억하고 싶은 문구는 밑줄을 긋곤 한다. 그런데 좀 더 나아가 몸으로 느끼고 싶다면 그 방법은 낭독이라고 한다. 두 번째로 소개된 체험기 제목은 '마음을 일깨우는 시간들'이었다. 낭독의 효과를 설명하는 체험기들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낭독은 입체성을 가진다는 점이었다. 마치 묵독이 일차원이나 이차원에 머물렀다면, 낭독은 삼차원으로까지 나아간다는 말이 아닐까?

 

 

"도호쿠대학교의 가와시마 류타 교수팀이 51명의 실험군을 6개월 동안 훈련시켜 47명 대조군과 비교한 전두엽 기능 평가 실험 결과에 따르면 낭독을 실시한 후 기억력이 20% 향상되었고, 낭독이 뇌를 워밍업시켜 뇌가 평소보다 활발하게 능력을 발휘했다. 낭독이 전두엽 기능을 향상시킨다는 결론이었다." 124p

 

다큐멘터리 방송 내용에서도 '낭독 시에는 묵독 조건 때와는 달리 듣기 관련 기능 영역과 운동 관련 기능 영역이 활성화된다.' 123p 고 말하고 있었다. 단순히 낭독이 개인적인 체험에서 이런 점이 좋고 저런 점이 좋다는 주장에서 더 나아가 과학적인 연구 결과를 가지고 그 효과에 관해서명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제는 더 효과적인 독서 방법인 낭독을 가능한 한 실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바른 독서의 가르침은 세속적 성공의 스토리를 들려주지 않는다. 올곧은 삶의 태도와 선악과 옥석을 가리는 이치만을 가르쳐준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읽고 '나도 독해져서 인정사정없이 약자 위에 군림하고 강자에게 빌어야지.' 따위의 교훈을 얻었다면, 그것은 오독이다. 약자의 공포심을 악용하는 군주의 나약함을 간파하여 공포에 굴하지 않는 강한 심장을 가진자가 되어야지 하고 깨닫는게 옳다." 167p

 

올바른 독서란 무엇일까? 나는 올바른 독서를 하고 있을까? 저자가 말하고 있는 올바른 독서의 가르침을 보면서 한편으로 떠오르는 생각은 인문학에 관한 높은 관심이었다. 인문학에 대한 관심은 여전히 식지 않고, 인문학 관련 강의나 강좌가 계속 호황을 맞고 있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인문학을 공부하는 목적은 무엇일까?

 

개인마다 나름의 이유와 생각이 다르겠지만, 그 목적이 단순히 '세속적인 성공을 위해서'라면, 또는 '너도나도 공부하니까 뒤처지지 않기 위해서'라면, 공부에 대해 다시 깊이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란 속담도 있듯이, 독서와 공부의 목적이 올바른 것이라야 그 결과도 올바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독서 낭독은 텍스트를 마음속에 고이게 하는 특이한 독서 방법이다. 고이면 흐르게 되어 있다. 흐르지 않으면 썩는다. 썩으면서 시야를 흐리고 관점을 흩트린다. 결국 사물이 어렴풋해지고 사람이 올바로 보이지 않는다. 흘려야 한다. 마음에 고인 텍스트를 흘리는 방법은 쓰기이다. 쓰기는 곧 사유의 한 방법이다. 사유하면서 쓰고, 쓰면서 사유하는 것이다. 사유는 해석이고 창조다." 293p

 

한 달에 한 편꼴로 아주 적은 숫자지만 지금까지 꾸준히 블로그에 글을 쓰고 있다. 독서 낭독은 곧 글쓰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저자의 말에 깊게 공감했다. 매번 낭독으로 독서를 해 오지는 않았지만, 책을 꾸준히 읽고 좋아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슨 글이라도 쓰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레 생긴다. 때로는 타인이 쓴 좋은 글들이 글을 쓰고 싶게 만드는 기폭제가 되기도 한다.

 

글을 쓰고 싶은 욕구가 생길 무렵, 나에게 기폭제가 되었던 것은 좋은 리뷰들과의 만남이었다. 그 이후로 용기를 내어 책을 읽고는 꼭 후기를 쓰기 시작했고, 글을 쓰면 쓸수록 사유도 조금씩 천천히 깊어짐을 느꼈다. 사유하면서 쓰고, 쓰면서 사유하게 되었다. 그래도 나에게 쓰기와 사유는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고, 한편으로는 재미있고 즐거운 시간이기도 하다.

 

"나는 '문학이란 깨달음으로 안내하는 모든 읽기와 쓰기'라고 정의한다. 몇 년 동안 독서 낭독 클럽을 운영하면서 마음에 아로새겨진 생각이다. 나는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문학다방 봄봄'을 오픈한 것은 아니다. 그저 어떤 신호를 보내고 싶을 뿐이었다. 문학이라는 장르가 잊혀져 가는 시대에 '문학'이라는 가치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만남을 잇고 싶다는 신호이다. 이런 신호가 외로운 등댓불이 아니라 호롱불이나 반딧불이어도 만족한다." 318-319p

 

저자는 책과 문학을 순수하게 사랑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 사랑이 글에서 뚝뚝 묻어져 나왔다. 그 사랑은 강렬한 열정을 낳았고, '북코러스' 독서 낭독 클럽을 만들었다. 김주영의 소설『객주』를 낭독하는 또 다른 독서 낭독 클럽을 낳기도 했다. 소설가 윤후명의 소설학당에 등록해서 소설 쓰기도 배운다. 저자에게는 열정이란 말도 부족할지 모른다. 일종의 사명감으로 자신의 집을 줄이고 자금까지 마련해서 인문학 카페 '문학다방 봄봄' 오픈에까지 이른다.

 

낭독은 여럿이서 함께 하면 더욱 효과적이라고 한다. '북코러스'는 만 4년 7개월간 18권의 책을 읽었다. 혼자 읽기 쉽지 않은 두껍고 어렵거나 고전인 책을 선정해서 매주 만나서 읽었다.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어떻게 모임이 계속 지속할 수 있었을까? 기존의 많은 독서 클럽이 책을 미리 읽고 와서 토론 하거나 생각을 나누는 것에 반해 이 클럽은 모임에 와서 함께 책을 낭독했다. 책을 미리 읽을 필요도 없고, 참가에도 전혀 부담이 없을 것 같았다. 연령대 또한 다양한 이 모임이 계속 지속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함께하는 낭독의 효과가 가장 큰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클럽 회원들의 낭독 체험기가 무척 인상 깊었고, 함께 낭독했던 책들이 저자의 리뷰 형식으로 소개되고 있었다. 리뷰 내용이 참 재미있었는데, 소개된 책들을 모두 낭독으로 읽어보고 싶은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내가 서울에 살았다면 이 독서 낭독 클럽의 문을 두드려 보지 않았을까?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부끄럽지만, 아직 한 번도 통독해 보지 못한 성경이나 신심 서적으로, 성당에서 여럿이 함께 낭독해 보는 모임이 있다면 정말 좋겠다는 점이었다.

 

낭독은 묵독과 비교하면 책을 읽는 시간도 더 걸린다. 소리 내 읽어야 하는 약간의 수고로움도 감당해야 한다. 함께 낭독하는 독서 모임에 참가할 수 없다면 혼자서라도 낭독하면 좋겠지만, 그것도 쉽지 않을지도 모른다. 읽어야 할 책이 많다면 그동안 익숙하고 편하게 느껴졌던 묵독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공공장소라면 낭독은 더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부터 읽는 책은 더욱 효과적인 독서 방법인 낭독을 꾸준히 실천해야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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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최민우 옮김 / 다산책방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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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어떤 삶을 사셨을까? 그분들이 있기에 현재의 우리가 있지만, 솔직히 한 번도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내 삶에 대해 생각하기도 벅찼기 때문이다. 당신들이 직접 살아온 얘기들을 들려주지 않는다면 잘 모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이 책은 말 그대로 '오베'라는 남자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무엇인가 불만스러운 표정에 화가 나 있는 듯한 얼굴을 담고 있는 책 표지는 그에 대해서 미리 이런 사람이라는 듯 설명해주는 듯하다.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삶을 짐작케 하고 자연스레 떠올리게 했다. 이야기는 '오베라는 남자..'로 시작되는 현재와 '오베였던 남자..'로 시작하는 과거가 서로 번갈아 가며 전개된다.

 

"그녀를 그리며 상상하는 것 중에서 가장 간절한 건, 정말로 다시 하고 싶은 건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집게 손가락을 접어 그의 손바닥 안쪽에 숨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녀가 그럴 때면 세상 어떤 것도 불가능한 게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워할 수 있는 모든 것들 중에서, 그것이 가장 그리웠다."102p

 

오베라는 남자는 지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한다. 그 이유는 6개월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를 무척 사랑하고 또 그리워하기 때문이다. 그녀를 다음 세상에서라도 다시 만나고 싶은 심정으로. 그녀가 얼마나 그리웠을까?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살아가면서 수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헤어진다. 그중에서 무척 가깝고 사랑했던 사람일수록 그 사람과의 헤어짐이나 죽음은 받아들이기가 정말 어렵다. 마치 건전지를 다 소모해버린 장난감 자동차가 멈추어 선 것처럼, 그 순간은 시간이 멈추어버린 것 같고 내 몸의 각 부분도 함께 기능을 멈추어버린 것 같다.

 

흐르는 시간은 약이 되기도 하지만 때에 따라서는 독이 될 수도 있다. 오베라는 남자에게 아내가 없는 6개월의 시간은 전혀 약이 되지 못했다. 오히려 하루라도 빨리 그녀 곁으로 가고 싶어하는 열망만이 깊어갔다. 그 열망은 끊임없이 자신을 버리게 하였다.

 

"주택은 공정했다. 공을 들인 만큼 값어치를 했다. 안타깝게도, 사람보다 나았다."129p

 

오베라는 남자는 열여섯이라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차례로 잃게 된다. 부모의 공백은 그에게 순탄치 않은 삶으로 다가왔다. 홀로 살아가며 그가 만나게 되는 사람 중에는 좋은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그가 겪은 시련과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들은 불행히도 사람을 점점 더 믿지 못하게 만들었다.

 

사람이란 존재가 같은 사람에게 신뢰를 두지 않는다는 사실은 무척 안타깝고 슬프게 들린다. 뉴스에서 들려오는 각종 범죄에 관한 소식은 세상은 험악하며, 사람을 함부로 신뢰해서는 안 된다고 끊임없이 말하고 있는 듯하다.

 

오베라는 남자 또한 동료로 인해 직장을 잃고, 사람을 믿어 사기를 당하고, 다른 사람을 구하려다 자신의 집마저 불타버리는 상황을 겪는다. 그리고 그에게 남은 것은 사람에 대한 불신만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그 불신은 그에게 사람이란 존재가 주택만도 못하는 믿음을 낳게 된 것은 아닐까?

 

"누군가 묻는다면, 그는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 자기는 결코 살아 있던 게 아니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그녀가 죽은 뒤에도."189p

 

소냐는 오베라는 남자를 있는 그대로 바라봐 주고 인정해준다. 그녀는 그를 따뜻하게 어루만져주고 사랑해준다. 그녀를 만남으로서 그에게 인생은 더는 전과 같지 않게 된다. '사람들은 오베가 세상을 흑백으로 본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색깔이었다. 그녀는 오베가 볼 수 있는 색깔의 전부였다.' 오베는 그녀를 통해 더는 세상을 흑백으로 보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그토록 사랑했던 그녀가 암으로 죽자, 그는 이제는 세상을 색깔로 볼 수 없었다. 다시 세상을 흑백으로 보기 시작한 그는 더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왜 그렇게 타인을 까칠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에게 유일한 사랑이었고 행복이었던 그녀를 잃은 상실감은 슬픔을 넘어 분노로 바뀌었을 것이다.

 

"마을이 외제차와 통계와 신용카드 빚과 기타 쓸모없는 것들과 더불어 잠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이렇게 오늘 하루도 망쳤다고, 그는 씁쓸하게 확인했다."202p

 

오베라는 남자는 오늘도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에 실패하고 만다. 이상하게도 항상 마지막 순간이 되면 누군가 자연스레 나타나서 방해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를 오히려 도와주어야 할 일이 자꾸만 생겼다. 그가 아내를 만나기 위해 다음 세상으로 가야만 하는 그 시간이 자꾸만 미뤄졌다.

 

그에게 있어서 망친 하루는 안 좋은 일이 일어나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의미 없이 보낸 하루가 아니라, 단지 이 세상을 떠나는 데 실패한 하루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집 주위 이웃들에게 하나씩 하나씩 좋은 일을 하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그가 성질을 부리고 화를 내며 까칠하게 이웃을 대하지만, 감정과는 별개로 그래도 투덜거리며 이웃들을 돕는다는 점이다.

 

번드르르한 말과 좋은 표정과 미소로 남을 속이고 해를 끼치는 사람보다는, 때로는 무뚝뚝하고 화난 표정에 무서운 얼굴이더라도 남을 도와주고 이롭게 하는 사람이 더 좋고 정감이 가기도 한다. 오베라는 남자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에게 도움을 받은 이웃들도 그를 점차 좋아하게 된다.

 

매일 죽음을 준비하고 죽음을 시도하다가 이웃들로 인해 매번 실패하는 그 모습이 분명 웃음이 나오는 상황인데도 자꾸만 안타깝고 슬프게 느껴지기도 했다. 오베라는 남자는 결국 이 세상을 떠나는 데 성공한다. 자신이 이웃들을 위해 도와주어야 할 일들을 다 마친 후에야 떠날 수 있었다는 듯이.

 

그를 보면서 할아버지와 아버지 세대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한평생을 자신만의 신념을 지키고 묵묵히 또 최선을 다해 살아온 그의 모습에서 그 이유를 발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윤제균 감독의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라는 인물과 이 책의 주인공 '오베'라는 인물이 자꾸만 겹쳐져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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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이 필요한 시간 - 강신주의 인문학 카운슬링
강신주 지음 / 사계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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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살아가다 보면 다양하고 많은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누군가를 찾기도 한다. 그 대상은 종교의 유무에 따라 다양할 것이다. 자신이 믿고 있는 신이나 성직자가 될 수도 있고, 부모님이나 가까운 친구 또는 상담가나 멘토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한 가지를 덧붙인다면 책 속의 저자도 가능하지 않을까.

 

 

책 속의 저자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내가 만나고 싶을 때 언제든지 만날 수 있다. 단지 책을 펼치기만 하면 된다. 이 책은 감정수업을 읽고 저자를 다시 만나보고 싶어 저자의 다른 책을 찾아보다 읽게 되었다. 마치 우연히 마주친 매력적인 이성에 눈길을 거두지 못하고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듯이.

 

인문학 카운슬링이란 부제를 간판으로 내건 상담소에서 난 무려 48명의 동, 서양 철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책을 통해서, 삶을 살아가는데 겪게 되는 여러 가지 다양한 문제를 제기하고, 그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생각을 들려주고 있었다.

 

그의 성찰로 인해, 우리는 삶에서 겪는 모든 고통과 갈등이 어디로부터 유래했는지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맨얼굴을 드러내야 할 때 페르소나를 쓰거나, 반대로 페르소나를 드러내야 할 때 맨얼굴을 보여주려 해서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잊지 말자!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를 쓰는 일도 없다는 사실을. 페르소나에 지나치게 신경 쓰는 우리에게 맨얼굴의 관리는 매우 중요한 일이다. 39p

 

우리는 대부분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매일 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 관계의 수는 나와 만나는 타인의 숫자만큼 다양할 것이다. 그처럼 다양한 타인과 만날 때 우리는 가면, 즉 페르소나를 쓴다. 아마도 거의 페르소나를 쓸 필요가 없는 타인은 가족밖에는 없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집을 나서는 순간 페르소나를 쓰고 집에 돌아와서는 페르소나를 벗는 것이 아닐까.

 

페르소나는 나 자신이 만들어내고 꾸며내어야 하므로 항상 부정적인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쓰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써야만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에픽테토스 Epiktetos와의 만남을 통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페르소나와 맨얼굴을 동시에 가지고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더 좋은 것이니 가져야 하고, 무엇이 더 나쁜 것이니 버려야 하는 문제는 사라진다. 이전까지 나를 지배하고 있던 생각은 페르소나는 나쁘고 맨얼굴은 좋다는 것이었다. 어쩌면 이런 이분법적인 생각과 나 자신의 진정한 행복은 함께 공존하기 어려웠던 게 아니었을까.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앞으로 내가 고민해야 할 점은 페르소나와 맨얼굴 중 어떤 것을 언제 쓰고 또 드러낼지의 문제일 것이다. 마치 카드게임에서 어떤 카드를 내어야만 그 게임에서 이길 수 있을까를 생각하듯이. 물론 어떤 카드를 선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맨얼굴의 건강관리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지만.

 

어떻게 해야 이 네모난 얼음이 둥근 그릇과 소통할 수 있겠는가? 이 얼음이 네모남이란 고착된 자의식을 버려야만, 그래서 그릇의 둥긂을 수용할 수 있을 때에만 소통은 가능할 것이다. 네모남을 버리려면 혹은 버렸다면, 얼음은 반드시 물로 변형되어야 하거나 그렇게 되었어야만 한다. 55p

 

소통은 참으로 어렵다. 때로는 먼 이웃보다 나와 가장 가까운 가족과의 소통이 훨씬 어려울지도 모른다. 가족과의 소통에서 종종 발생하는 어려움과 그 해결 과정을 바라보면서, 이통 李恫과의 만남을 통해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첫째, 네모난 얼음이 둥근 그릇과 소통하려면 물로 변형되어야만 하듯이 내 마음도 내 자의식도 변화되어야 진정한 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타자와의 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변화보다 나 자신의 변화가 먼저일 것이다.

 

둘째, 소통이 어렵다고 해서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얼음은 물로 순식간에 변하지 않는다. 얼음이 녹아서 물로 변화하는 시간이 꼭 필요한 것이다. 그 시간은 기다림의 시간이고 인내의 시간일 것이다. 진정으로 관계가 좋아지기를 바란다면 어렵고 번거로우며 귀찮더라도 소통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통을 포기하는 순간 마음을 닫아버리게 되고 그 관계는 마치 건널 수 없는 강을 마주 보며 서 있는 두 사람처럼 더는 회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이 자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하고 겸허하게 그 결과를 초월자에게 내맡긴다면, 종교적 정신은 충분히 인문적 정신과 양립 가능하다. 그렇지만 종교적 정신은 치열한 성찰과 불굴의 노력을 하지 않으려는 나약한 정신으로 흐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어차피 최종결과는 초월자가 결정한다고 믿기 쉽기 때문이다. 70p

 

성당 주임신부님의 말씀이 떠오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하면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맡기십시오.’ 저자의 글과 신부님의 말씀이 통하는 순간이고, 저자와 신부님의 관점이 만나는 순간이며, 인문학 정신과 종교적 정신이 만나는 순간이 아닐까.

 

저자는 인문학과 종교가 만날 수도 있다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종교에 대한 저자의 관점에 온전히 찬성하지는 않지만, 종교적 정신이 나약한 정신으로 흘러갈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선 또한 온전히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인문학과 종교는 양립할 수 없는 걸까? 인문학책을 접하면서부터 시작된 고민이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순전한 무사유의 책임을 부과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부여되었던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그리고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강조한다. 155p

 

수많은 유대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었던 아이히만의 재판과 한나 아렌트 Hannah Arendt와의 만남을 통해 드는 생각은 세 가지였다. 첫째, 타인과 함께 살아가기에 나에게 주어진 삶은 온전히 나 혼자만의 삶이 아닐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둘째, 타인과의 삶 속에서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은 때로는 나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셋째,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사유를 멈추지 말아야만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삶을 살지 않을 수 있구나.’ 하는 점이었다.

 

물론 불필요한 사유로 나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피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혹 내 삶이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부정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면 그냥 넘어가지 말고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닐까? 저자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질문하고 있다. ‘지금 당신은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권력의 입장에서는 좋을 것이다. 현실에 치열하게 참여하는 실천가가 줄어들고 거리를 두고 냉소적으로 구경하는 방관자가 늘어나게 되니까 말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대중매체의 볼거리들이 기본적으로 소비를 촉진하기 위해서 주로 기능한다는 점이다. 볼거리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일수록, 우리는 대중매체에 쉽게 빠져들게 된다. 자본은 이를 이용해 우리의 내면에 신상품의 유행과 이미지를 각인시킨다. 결국 우리는 여가시간마저 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는 셈이다. 250p

 

나와 직접 관계가 없다면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에게 무관심한 것이야말로 방관자가 아닐까. 그 말에 가시를 찔린 듯 아픈 것은 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매체를 통해 수많은 사건과 사고를 접할 때마다 기억하고 안타까워하는 것은 그래서인지 잠시뿐이다. 대중매체도 그렇지 않을까? 빨리 방관자라 되라는 듯 다른 한쪽으로는 수많은 볼거리로 우리의 눈과 귀를 뒤덮어 버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장 강력하고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당연히 자본이다. 자본과 손잡고 있는 대중매체이기에 우리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약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 대중매체는 우리를 소비하도록 유혹한다. 그럼으로써 돈은 자신의 지배를 더욱 공고히 하며 이를 통해 더욱 강력하고 큰 힘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만 할까? 대중매체와 담을 쌓고 살아갈 수 없다면 적어도 올바른 시각을 가지고 이를 식별해서 바라볼 줄 아는 눈이 꼭 필요할 것 같다. 대중매체의 볼거리들 뒤에 숨어있는 거대한 자본의 논리에 세뇌당하지 않으려면. 저자는 방관자보다는 실천가가 되라고, 구체적인 현실 세계에 지속해서 개입하여 현실감각을 키우라고 조언한다.

 

사랑은 몸으로, 즉 실천으로 표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그의 고난과 고통을 기꺼이 대신하려는 마음에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사랑이란 말은 하나의 미사여구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282p

 

진정한 기독교인이란 어떤 것일까? 시몬 베유 Simone Weil의 삶과 만남을 통해 드는 생각이었다. 신약성경야고보 서간 326절 말씀이 떠올랐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이듯 실천이 없는 믿음도 죽은 것입니다.’ 믿음이란 것이 단순히 믿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믿음에 실천이 뒤따르지 않고 그 믿음대로 삶을 살지 않는다면, 야고보 사도의 말씀대로 그 믿음은 이미 죽은 것이 아닌가. 사랑 또한 그 실천이 뒤따르지 않는다면 마찬가지일 것이다.

 

신약성경마태오 복음서 2234절에서 40절에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가에 대한 율법교사와 예수님의 대화가 나온다. 예수님은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으로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고 하시고, 이어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하시면서, ‘둘째도 이와 같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다는 말은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어느 것이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둘 다 큰 계명이고, 결국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같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줄곧 말하면서도 이웃을 제대로 사랑하는 실천이 많이 부족한 것 같다. 내게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말은 저자의 표현대로 그저 하나의 미사여구로 전락한 것은 아닐지.

 

책이라는 공간을 통해서 만난 동, 서양 철학자들과의 시간은 참으로 즐거웠다. 각각의 철학자와 만나는 시간이 짧기에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관심이 있는 철학자와 더 만나보고 싶다면 그들의 책을 읽어볼 수 있도록 마지막에 참고 도서를 더 제시하고 부연 설명을 친절하게 달아 놓았다.

 

몇몇 철학자들은 더 만나보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고, 내 마음속에 그들의 책을 담아 두었다. 처음에는 어렵게만 느껴졌던 철학자들과의 만남은 저자를 통해 좀 더 쉽게 다가왔다. 마치 타인과의 첫 만남에 공존하는 어려움과 약간의 불편함이 그 자리에 함께한 지인으로 인해 좀 더 편하게 느껴지듯이.

 

제대로 직면하고 싶지 않거나 피하고 싶어서 더는 생각하고 질문하지 않는 것들에 대한 저자와 철학자들의 불편한 목소리는 마치 날이 선 칼처럼 날카로웠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만나게 된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쉽게 찾지 못할 때 도와줄 누군가를 찾는다. 어쩌면 그때 책 속의 저자와 다양한 철학자들 또한 그 대상 중의 한 명이 될 수도 있고, 나에게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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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
정대식 지음 / 크리스챤출판사(카톨릭) / 200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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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영성서적입니다. 신앙생활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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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누구예요? 알콩달콩 우리 아기 교리 1
고수산나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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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들에게 좋은 교리책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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