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지던트 이블 - Resident 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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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지던트 이블> [2002]
- 좀비의 이빨을 피했다고 안도하는 당신. 정말 피했을까? 

 

 바야흐로 자본의 전지구적 포섭의 시대이다. 신자유주의라는 무적의 검을 든 맘몬신(물질/돈의 신)은 21세기 푸른별 지구를 난도질 한다. 광물을 캐고, 나무를 베고, 인간을 쥐어짜 잉여를 생산하더니 이제는 인간의 생체적 설계를 조작해 혁신을 이야기 한다. 맘몬은 윤리의 망토를 기만적으로 걸치고서 새하얀 허벅지를 내어 놓고 자극한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인간의 욕망을 이용한 맘몬의 실험장이다. 

 영화의 배경은 이렇다. 21세기 초 엄브렐러라는 제약회사(the Umbrellr Corporrtion)는 미국의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발전한다. 엄브렐러는 모든 가정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에도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또한 컴퓨터 의약 보건 분야에서 세계를 이끌어가는 공기업으로 거듭나고 고용인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막대한 자금은 무기기술(Military Technology), 유전실험(Genetic Experimentation), 생체병기(Viral Weaponry) 등으로 개발되어진다.(네이버 영화 참조) 

 지하의 거대한 유전자 연구소 ‘하이브’에서 어느 날 치명적인 바이러스(T바이러스)가 유출된다. 연구소를 통제하는 슈퍼컴퓨터 ‘레드퀸’은 연구소를 완전히 봉쇄하여 모든 직원들을 죽이고 인간에게 대항하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레드퀸’은 이 혁신적 바이러스의 유출을 막는 것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역할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바이러스는 인간의 유기체적 개조(유전자 조작/변형)를 가능하게 하는 것이었다. 즉, 인간을 좀비로 만들게 하는 바이러스다.



 
 인간을 좀비로 만드는 바이러스 따위가 왜 필요한가 싶겠지만, 당연히 완전 끌리는 일이다. 왜냐하면 일단 바이러스는 당연히 백신을 요구하게 되고, 이 백신을 독점하고 있는 회사는 돈방석에 올라선다. 그 바이러스가 인간에게 치명적일 수록 백신이 더 돈이 되는 것은 당연지사. 우라사와 나오키의 위대한 작품 <20세기 소년>에서는 심지어 바이러스와 백신의 놀음으로 ‘친구’에서 ‘신’으로 거듭나는 인물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게다가 과학적 혁신은 항상 군사적 혁신의 도구가 된다. 당신은 좀비와 전쟁을 하고 싶은가? 뭐? 화끈하게 지르고 싶다고? 자네, 너무 게임을 많이 한 것이 아닌가? 실전은 동전을 넣는다고 목숨이 늘어나고 어쩌고 하는 게 아니다. 그리고 뭘 모르나 본데 문제는 더 심각하다. 왜 당신은 좀비를 사냥하는 헌터일 것이라고 스스로를 상정하는가? 바로 당신이 총알받이의 좀비일 수도 있다. 좀비도 원래는 인간이었다. 

 이 영화는 바이러스에 노출되어 좀비가 된 인간들과 그에 둘러싸인 특공대들의 미션 수행의 에피소드를 담고 있다. 그런데 무엇이 ‘좀비’일까? 철학자 지젝은 인간은 모두 두 번 죽는다고 말한바 있다. 실제적 죽음과 신체적 죽음. 이것을 변주해서 말해본다면 우리는 두 번의 좀비화가 수행된다. 실제적 좀비화와 신체적 좀비화. 우리는 이 영화를 보면서 바이러스에 노출되거나 혹은 좀비에게 뜯겨서 좀비화 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느낀다. 하지만 이런 좀비화는 노골적으로 극단화된 신체적 노출에 다름 아니다. 어쩌면 우리는 이미 실제적 좀비화가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돈에 있어서 이미 노예다. “다들 그렇잖아, 사회가 이미 그런 걸”이라고 할 때, 우리는 그저 생각 없이 노동력을 팔고 상품을 소비하는 맹목적 욕망의 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피부가 떨어지고 해골이 살 위로 들어날 수록 더욱 좀비스러운 것처럼, 값비싼 장신구(악세사리)와 명품으로 몸을 치장할수록 더욱 좀비화되는 것은 아닐까?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중

 
 세계의 수많은 석학들이 전지구적 양극화 앞에서 다시 윤리를 호출하고 있다. 하지만 소설가 이외수는 “인간다움이란 윤리관은 초등학교만 나오면 모두 마스터 한다”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니깐, 다들 다 까먹으셨겠지만 이웃과 더불어 사는 삶이 라던가 사람답게 사는 삶, 자연과의 조화 따위의 것들은 이미 우리가 다 배운 것들이다. 하지만 현실에 찌들린 어른이 되면서 이를 다 잊고 만다. 마음이 가난한 부자, 가난하기 때문에 윤리가 흔들리는 빈자. 우리는 그 사이에서 맘몬의 그늘 안에 꿇어 있다. 

 <20세기 소년>에서 바이러스를 만들던 과학자는 사회의 악이 아니었다. 그는 순수하게 연구에 몰두하던 천재 과학자였다. 하지만 그가 만들고 있는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사용되는지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그는 일이 벌어지고 나서야(수많은 사람이 죽고) 깨닫고 후회했다. 맘몬은 원래 숭고한 대상이 아니었다. 사람들이 그것을 숭고한 대상으로 취급했기 때문에 숭고하지 않은 것이 숭고해 진 것일 뿐이다. 사람보다 돈이 우선시되고 중요시되는 것이 정상적인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정녕 정합적이고 놀라운 철학적 통찰에서 기반 되는 윤리인가? 그렇지 않다. 당연하다고 생각되어졌던 것의 복권 그것이면 된다. 문제는 실천이고 어떻게 해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우리는 좀비의 이빨을 피하지 못했다. 이미 좀비가 되었기 때문에 몰랐을 뿐이다. 기업의 이윤추구에서 비롯된 유전자 변형식품을 내가 먹지 않으면 다 괜찮은 것인가? 그 식품들을 폐기해버리면 우리의 기업이 돈을 못 벌어들이니 우리의 국익에 혹은 나에게 손해가 될까봐 두려운가? 그래서 제3세계 사람들에게 먹이고서 안도하는가? 우리는 천사의 얼굴을 하고 악마의 실험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제3세계를 거대한 실험의 장으로 이용하고 있지는 않나? 

 카이스트의 안철수 박사는 사회의 모든 성공한 사람들은 실패를 감수한 수많은 사람들 덕분에 가능했다고 하면서 사회의 공공성의 회복을 역설한바 있다. 즉 나무에 달린 달콤한 열매를 딴 사람은 함께 경쟁하고 달려갔던 수많은 사람들의 자양분 위에서 맺힌 열매를 딴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개인이 독점적인 소유물로 취급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독점하려고 할 때 함께 달려갔던 사람은 굶주리게 되고 결국 맘몬의 손아귀에서 모든 인간은 나약해진다. 부자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난한 자가 존재하는 것이고, 물질적 소유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인간의 고통이 맘몬의 건강을 책임진다. 

 영화 <레지던트 이블>은 맘몬의 질주가 어떤 지경에 이르게 될지를 극단적으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그 극단은 결국 인간들이 자발적으로 맘몬에게 자신을 의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기업의 불법적 실험(돈이 되는)을 묵묵히 실천하던 최고의 연구자들은 가장 빠르게 좀비가 되었다. 신체적 좀비가 되지 않았다고 안심하지 마라. 맘몬 앞에 꿇어있다면 이미 실제적으로 좀비가 되어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맹목적으로 죽이는(무한경쟁) 일은 그만두자. 그리고 이제는 똑바로 쳐다보자.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이렇게 싸우게 만드는지를. 정말 나의 적이 너인가? 너의 적이 나인가? 아니다. 우리의 적은 ‘맘몬’이다. 맘몬을 우리가 꿇리지 못한다면 우리는 서로에 대한 맹목적 살인을 결코 중단 할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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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 King And The Clo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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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우리 함께 한 판 아니, 계속해서 놀아보세 

 

 이 영화는 광대와 왕, 예술과 권력이 나란히 놓여 전개된다. 그런데 재미난 점은 광대가 오히려 ‘자유’로워 보이고, 왕은 속박되어 있는 듯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깐 광대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듯하나 자유를 가진 듯 보이고, 왕은 모든 것을 가진듯하나 자유를 가지지 못한 듯 보인다. 물론 이런 식의 독해는 비약과 오독의 산물이다. 광대라고 마냥 자유로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이라고 마냥 구속당해 있는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식의 이분법 자체가 폭력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내 할 말 하겠다. 나는 율법을 지켜야 하는(정제된, 정합적 글쓰기를 해야 하는) 왕이라기 보단 그저 얼치기 광대(잡글예찬자)이기 때문이다. 

 <왕의 남자>에서는 광대가 곧 광대다. 그리고 왕이 곧 왕이다. 그리고 자유는 이들이 사회적 위치에 따라 각기 부여된다. 가진 것 없이 떠도는 광대는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는 왕을 조롱하는 무대를 열수 있고 그 판 위에선 자신이 자유로운 왕이 된다. 반면 궁궐의 왕은 온갖 율법 속에 갇혀 있다. 뭐만 하려고 하면 “아니되옵니다. 그것은 선왕의 뜻과 어긋나며”라거나 “망극하오나 법도에서 벗어나는”이라는 소리를 듣기 일수다. 만약 그 딴지(따니)들을 무시하면 왕은 하늘이란 이름 앞에서 제거된다. 

 그렇다면 오늘 날 광대는 누구이며, 왕은 누구일까? 예술인이 광대이고, 대통령이 왕일까? 물론 그럴 수 있다. 예술인은 자본의 유혹을 이길 수만 있다면 자유로울 수 있다. 반면 대통령은 일단 그 시작부터가 굽신굽신에서 시작된다. 표 구걸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좌에 앉고 나서도 참모진과 여당, 야당의 잔소리에 휩싸여 지내게 된다. 물론 권력을 가진 자신에게 굽신굽신하는 자들 위에서 거드름을 피울 수 있고, 잔머리를 굴려 돈을 꼼칠 수도 있다. 만약 국민들이 말 안 듣고 개긴다(개개다)면 물대포를 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위태로워지고 스스로 자유를 옥죄게 된다. 

 그런데 사실 내가 여기서 하고픈 얘기는 그것이 아니다. 나는 오늘 날 모두가 광대 혹은 왕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헌법적으로 보장된 시민으로서의 권리 이야기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개인의 태도의 문제에서 말이다. 그러니깐 이 시대가 주입하는 논리-이를테면 무한경쟁과 자본의 추구 혹은 권력의 추구에 포섭되는 순간 그는 왕이 될 수 있다는 유혹에 매혹되어 자유의 포기에 이르게 된다. 세습으로서 달성되는 권좌의 시스템이 붕괴된 오늘 날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주체적 의지가 아닐까. 

 이렇게 생각한다면 중요한 것은 개인이 가지게 되는 직업이 아니다. 예술가도 자유를 잃은 왕이 될 수 있고 대통령도 자유로운 광대가 될 수 있다. 물론 직업군 자체에서 비롯되는 상대적 제약은 존재할 것이다. 다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에 대한 의지이다. ‘가지지 않을수록-자발적 가난’을 감당할수록 자유로울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온전한 자유 앞에서 도피하지 않으려는 굳은 용기가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물론 그렇다고 ‘거지야 말로 자유인이다’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자본주의 사회이고, 주린 배 앞에 자유는 사치가 된다. 우리는 결국 아슬아슬 한 줄타기 위에서 광대적 자유를 쟁취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체적 걸음인 광대적 삶은 권력(왕)을 이길 수 있을까? 아니, 권력을 유도할 수 있을까? 그러니깐 광대의 놀이판에 초대하여 함께 춤을 출 수 있을까? 만약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 때는 광대와 왕의 경계가 무너질 수 있을지 모른다. 줄타기 위에 군림하는 왕과 권력의 왕이 함께 자유를 누릴 수 있다면, 아침에는 모를 심고 점심때는 정책을 입안하고 저녁에는 막걸리를 마시며 시를 읊는 것이 가능한 사회가 올 수 있지 않을까. 

 놀이와 일의 구분이 애매모호해 지고, 광대와 왕의 구분이 애매모호해 지고, 가난과 부의 구분이 애매모호해 지는 자유의 세계. 그곳에서 그저, 먹을 수 있을 만큼만 생산하고 또 그것을 먹으며 한판 즐기고 놀다 가는 인생-멋지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우리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촛불을 들고 한 판 놀다가 물대포를 맞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 대포는 율법이 쏠 것이다. 하지만 뭐 어떠랴, 광대와 왕이 함께 까뒹구는 그 때, 세상은 바뀔 텐데. 
 

-아니라고? 그렇다면 바뀔 때 까지 한번 계속 놀아보자. 겁(무서움/두려움)은 개나 줘버리고.

 

* 추신.
-분명 대한민국에서 <왕의 남자>를 보았는데, 글을 쓰다 보니 화성, 목성, 천왕성을 지나 태양계를 안녕하고 결국 안드로메다에 도착해 버렸다. 달에서 토끼가 손을 내밀 때 잡았어야 했는데, 이런. 이제 나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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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 King K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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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킹콩>
- 킹콩과 그녀 사이에 존재하는 넘사벽 (오리엔탈리즘적 관점에서 본 킹콩)

 

 피터잭슨 감독은 개인적으로 상당히 좋아하는 감독이고 그 역량도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까야겠다. 그는 본 영화를 찍고 자신의 어릴 적 꿈을 이루었다고 밝혔다. 피터잭슨이 작은 소년이었을 때 보았던 살벌한 <킹콩>은 그의 손에 의해 사랑스러운 <킹콩>으로 재탄생했다. 본작은 상당히 성공적인 리메이크작임에는 틀림이 없고, 그가 어린 시절 영화를 향한 꿈을 키워줬던 작품에 대한 헌사로서의 의미도 있다. 하지만 <반지의 제왕> 시리즈에서 문제제기 되었던 요소를 똑같이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어쩌면 여전히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문제적이라고 지적하고 싶은 지점은 백인 외 인종에 대한 비현실적 그림이다. 또 오리엔탈리즘1) 타령이냐고, “고마해라 마이 묵었다아이가”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무감각하게 되풀이되는 풍경이야 말로 폭력을 지속시킨다. <반지의 제왕>시리즈는 판타지의 놀라운 장을 제시했고, 원작의 세계관을 훌륭하게 영화화해 냈다. 하지만 오리엔탈리즘의 혐의에서는 자유로울 수 없었다. 그리고 잭슨의 차기작인 <킹콩> 역시 그 혐의를 똑같이 물고 있다. 물론 잭슨은 ‘애당초 원작이 백인 우월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데, 나보고 어쩌라고’라며 항변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도 애정이 있어서 이러는 거고, 나 역시 침묵함으로서 암묵적 동의를 하고 있을 수도 없는 일이다. 

 학창시절 때 아메리칸 드림과 관련된 학습만화를 본 적이 있다. 학원에 수업시간보다 일찍 가게 돼서(세상에! 무슨 생각으로!) 우연히 보게 된 책이었는데, 인디언 사냥에 대한 내용이었다. 만화의 주인공은 당연히 용감한 탐험가이자 개척자인 미국인들이었고, 명백한 적은 인육을 먹는 더럽고 혐오스러운 괴물인 인디언들이었다. 어릴 적 나는 그 만화 속에서 미국인이 인디언을 죽일 때 기뻤고, 인디언에 의해 미국인이 죽을 때 슬펐다. 결국 미국인들이 인디언들을 무찌르고 아메리카를 개척했을 때 나 역시도 얼마나 의기양양한 기분이 들었던가! 하지만 알고 보니 이것은 명백한 사기였다. 아메리카 드림은 자신들의 침략과 수탈, 인디언 말살을 정당화하는 오리엔탈리즘 위에서 세워진 것이었다. 미국 인디언 멸망사의 기록은『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인디언은 결코 괴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부로부터 침략해온 괴물(미국인)로 부터 자신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자신들의 전통과 신념을 지키기 위해 처절하게 저항한 인간이었다. 

 피터잭슨의 <킹콩>에서 주인공 일행들이 해골섬에 들어갔을 때 그들은 개척자인가, 침략자인가?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원주민들은 살육자인가, 침략으로부터 자신들을 지키려는 방어자인가? 그리고 애당초 눈깔을 뒤집고 미친 짓거리만을 일삼는 그들 자체가 존재 가능한가? 오리엔탈리즘에 빠지는 함정이 바로 몰이해에 있다. 타인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소통의 불능은 당연한 귀결이다. 오로지 병신으로만 취급되는 원주민은 서구의 우월적 태도에서 잉태된 허상에 불과하다. 에드워드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성찰을 가하고 마빈 해리스가 문화 인류학적인 통찰2)로 상대적 문화의 이해를 돕고, 헬레나가 진정한 ‘미래’적 성취는 무엇에서 비롯되는지를 살펴도3), 여전히 강력한 파급력을 가지는 헐리우드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오리엔탈리즘을 재생산하고 있다. 

 영화를 보면 킹콩조차도 좀 그렇다. 물론 나라도 그 정도라면 혹하겠지만, 킹콩은 원래 재물을 받으면 해골이 널 부러진 곳으로 가서 재물의 사지를 찢어 버렸다. 하지만 우리의 여주인공은 예쁘고 몸매도 좋아서 그런지 킹콩은 그녀에게 그냥 훅 간다. 원주민의 해골이 널 부러진 바위 위에서 킹콩의 사랑을 받는 그녀는 자연히 백인의 미적 우월을 드러낸다. 결국 킹콩은 다른 백인의 남자의 품에 안기게 될 그녀를 위해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하고 그냥 훅 간다. 물론 그 과정은 너무나 낭만적이고 드라마틱하지만, 백인이 아닌 존재가 백인의 아름다움에 천착할 때는 그 힘의 압도적 강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추락으로 귀결됨을 명백히 드러낸다. 사실상 킹콩과 그녀 사이에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4차원의 벽)이 있었던 셈이다. 영화는 그 넘사벽 때문에 감동을 자아내지만 현실은 그저 냉혹하다.



 사실 이 영화를 이렇게 깔 생각은 별로 없었다. 나 역시 눈물을 흘리며 이 영화를 봤고, 너무 짠했던 순간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잭슨은 나에게 “헐~ 너는 그렇게 재밌게 봐놓고, 이제 와서 이러기냐?”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의 사소한 딴지(따니)에 ‘열폭쩐다’고 규정한 사랑하는 친구 덕분에 이렇게 글을 쓰게 됐다. 물론 그 친구 말대로 나의 글은 그저 한 유색인종의 ‘열폭(열등감 폭발)’일수도 있다. 그리고 이 영화에서 오리엔탈리즘은 지엽적인 문제기도 하다. 하지만 발언하지 않음으로서 작동하는 ‘암묵적 동의’ 역시 경계하지 않을 수 없다. ‘암묵적 동의’야 말로 폭력의 지속을 가능하게 하는 주요한 정당화 기제가 아니던가. <킹콩> 영화에 흑인 1명이 주요한 역을 수행했다고 해서 오리엔탈리즘이 해소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야 말로 ‘눈 가리고 아웅’이지 않나? 피터잭슨의 팬으로서 그가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통렬한 반성과 성찰을 통한 넘어서기가 가능해지기를 간절히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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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기존의 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은 서양의 작가, 디자이너, 예술가들이 동양문화의 여러 측면을 묘사하거나 모방하는 것을 이르렀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스트"란 말은 이러한 활동을 하는 사람과 동양을 연구하는 학자를 이르는 전통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20세기 학자 에드워드 사이드가 그의 논쟁적인 책 『오리엔탈리즘』을 내놓으면서 그 의미가 완전히 달라졌다. 그는 이 저서에서 오리엔탈리즘을 18~19세기에 유럽 제국주의적 태도로 형성된 동양에 대한 적대적이고 우월적인 시각의 서양 예술과 학술 및 사조를 이를 때 이 용어를 썼다. 즉, 그에게 있어 '오리엔탈리즘'은 동양 문화와 사람에 대한 근본적이면서도 왜곡된 서구의 해석을 뜻하는 것이었다. 사이드의 이러한 통찰은 서구가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죄악을 어떻게 정당화시키는지를 고발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오리엔탈리즘은 지속적으로 재생산 되고 있다.
 

2) 마빈 해리스는 외부에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전통을 갖고 있는 민족조차도 실상 그들의 역사와 생활상을 살펴보면 정당한 이유가 있고, 오히려 그 전통에 의해서 지속가능한 사회를 구축한다고 분석한바 있다. 대표적으로 『문화의 수수께끼』에서는 굶어 죽어도 소를 먹지 않는 힌두교 전통의 인도를 문화 인류학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3) 헬레나 노르베리-호지는 그녀의 저서『오래된 미래』에서 인류의 진보에 대한 역설적인 성찰을 한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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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 Josee, the Tiger and the Fi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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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다시 조제를 만나게 돼서 너무 다행이다


 이 영화는 이누도 잇신의 2003년도 작품이다. 나는 사람들이 찬양하는 작품은 대게 챙겨보려고 하는 타입이라 이 영화도 예전에 봤었다. 그런데 사실 그렇게 감명 깊게 보진 않았기에 별 기억을 갖고 있지 않았다. 다시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내 측근들의 찬양과 그런 내 기억의 거리 때문이다. 그러니깐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너무 좋게 봤던 영환데 나는 심드렁했었기에 ‘도대체가 뭣 때문이지’라는 심정이 들어서 다시 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지금에 난 이 영화가 너무나 좋아졌다.  

 

 일단 이 영화는 제목부터가 가관이다.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이라니. ‘이건 뭐 어쩌라고’라는 심정이 든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조제’는 영화 속 주인공의 이름(가명)이다. 물론 본명은 아니고 『1년 후』의 작가 프랑스와즈 사강의 소설에서 따온 것이다. 조제는 선천적으로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다. 그녀는 할머니와 둘이 사는데, 할머니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감추려 든다. 할머니는 그녀에게 “너는 아프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처럼 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라고 한다. 조제는 자신의 골방에서 할머니가 주워 온 책을 읽으며 세상을 그린다. 그리고 사람이 다니지 않는 새벽녘에 할머니에게 떼를 써 산책을 나간다. 세상을 향해 뛰쳐나가고 싶지만, 육체적 연약함과 할머니의 억압이 그녀를 골방에 가둔다. 후에 그녀의 연인이 된 츠네오가 말한다. 외로웠겠다고.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그다지 외롭지는 않아.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단지 아주 천천히 시간이 흘러갈 뿐” 그녀는 자신을 물고기라고 상정하고 유유자적 헤엄치는 모습을 골방에서 꿈을 꾸며 그 시간을 견뎠다. 

 호랑이는 조제가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이다. 그녀는 사랑하는 남자가 생기면 호랑이를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눈물이 난다던 츠네오와 몸을 섞은 후 그와 함께 호랑이를 보러갔다. 역시 호랑이는 무서웠다. 하지만 츠네오가 있었기에 괜찮을 수 있었다. 나는 이들의 사랑을 보면서 두려운 마음이 생겼다. 조제는 이제 호랑이는 그럭저럭 견딜 수 있게 됐다. 가장 무서워하던 호랑이를 말이다. 하지만 “그다지 외롭지는 않아. 애초부터 아무것도 없었으니까”의 그녀는 이제 전적으로 의존하고 기대는 그가 생기고 말았다. ‘이제 가장 무서운 것은 바로 이 사랑의 죽음, 이별이 된 것이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조제는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츠네오와의 의미심장한 첫 여행의 조개껍질 위에서 몸을 섞은 후 이렇게 말한다. “난 너와 세상에서 가장 야한 일(섹스)을 하려고 물속에서 올라온 인어(물고기)야”라고. 그리고 잠든 그에게 이렇게 말한다. “언젠가 그를 사랑하지 않는 날이 올 거야. 그리고 언젠가는 나도 당신을 사랑하지 않겠지. 우린 또 다시 고독해지고...모든 게 다 그래. 그냥 흘러간 1년의 세월이 있을 뿐이지” 조제는 나로서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아름다운 사랑의 순간에 이미 츠네오의 자유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바디유는 사랑의 함정에 대해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무수히 많은 사람들 중 그가 나를 사랑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그의 자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그는 마찬가지로 나를 떠날 자유 역시 가지고 있다. 그래서 바디유는 사랑을 “두 사람의 경험”으로 보았다. 하지만 사랑에 빠진 남녀는 자유에서 비롯된 사랑의 시작을 망각한 채 영원이라는 허상을 쫓게 된다. 바로 내가 그런 허상을 쫓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조제는 사랑의 시작을 기억하고 있었다. 자유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흘러간 1년의 세월”이 될 그 순간들을 몸에 새기고 있었다. 

 밴드 넬은 이런 사랑의 존재론적 의미를 음악에 담은 적이 있다. “지쳐 버려서, 놓아버리면, 우린 스쳐가는 사람처럼.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각자의 삶을 살아가겠죠. 수많았던 웃음과 눈물은 모두 그저 추억이라는 제목을 지닌 한 편의 수필 되어, 기억의 책장 그 어딘가 남게 될 테고 시간이 흘러 갈 수록 그 위엔 먼지만 쌓여가겠죠.” 너무나 사랑했던 그 뜨거웠던 삶이, ‘그저 흘러간 1년의 세월’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지점은 한 편의 수필이 된 기억의 책 위에 먼지가 쌓이게 되는 순간에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조제는 수필이 쓰여 지고 있던 그 때 이미 이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조제가 강한 마음의 소유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오롯이 자신의 삶에 서 있었다. ‘자유로부터 도피1)’하지 않는 그녀는 매번 자유로부터 도피해 사랑이란 이름의 품속으로 숨어들었던 나를 부끄럽게 했다. 그녀는 자신을 물고기로 비유했다. 그런데 제목을 다시보라. 물고기가 아니라 ‘물고기들’이다. 조제가 하반신 마비라서 물고기인 것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심해의 기억을, 외롭던 시간들을 흠뻑 갖고 있다. 우리가 바로 ‘물고기들’이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작가 박민규는 인간은 일상을 살아간다고 한다. 다만 그 일상이 삶이 되는 시간이 있는데 그 시간이 바로 사랑을 하는 시간이다. 하지만 사랑이란 존재론적으로 시작과 동시에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우리는 사랑을 하면서 더욱 깊어져 간다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가장 아름다운 그 순간이 이미 죽음의 확정을 판정받는 시간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서로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다. 박민규의 파반느 역시 ‘신체적 죽음’을 통해서 삶과 일상의 위태로움을 견뎌낼 수 있지 않았던가.



 
 조제는 그가 없는 시간으로 돌아왔을 때, 그러니까 삶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왔을 때도 여전히 요리를 하고 ‘쿵!’하며 바닥을 내려온다. 사랑의 종결은 비극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오히려 조제는 성장이라 말한다. 내가 이 영화를 지금에 봤을 때, 이전과는 전혀 다른 울림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나의 사랑을 향한 ‘자유로 부터의 도피’가 내 사랑의 역사였기 때문이다. 조제는 이런 나를 무심히 쳐다보며 “그럼 너도 다리를 잘라”라고 말한다. 내가 얼마나 나를, 그리고 너를 인정하지 못했는지 통감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리를 자를 수 있을 만큼 강한 존재도 아니고, 매번 불안해하며 사랑의 둥지를 도피처로 삼으려 드는 나의 유약함이 단박에 해결되지도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다시 조제를 만나게 돼서

‘너무나 다행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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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에리히 프롬은 인간이란 존재는 온전한 자유가 주어졌을 때, 불안해하기 때문에 자꾸만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고 했다. 그 도피처는 국가일 수도 있고, 파시즘일 수도 있고, 종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사랑도 마찬가지이다. 온전한 자유는 인간이 견디기 힘든 것이지만 그럼에도 그 자유를 가져야 한다고 프롬은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 도피는 항상 자신의 제거와 대상과의 권력적 관계화가 관철되기 때문이다. 나느 조제가 그 자유를 오롯이 버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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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할 수 없는 비밀 - Secret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말할 수 없는 비밀>
- 말할 수 없는 사랑은 말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것이고 결국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된다.

  솔로생활이 길어져서 그런지 요즘 들어 멜로영화나 연애소설 따위가 너무 보고 싶어졌다. 현실에서는 작동하지 않는 사랑이라는 감성을 다른 매체를 통해 대리 실현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말할 수 없는 비밀>은 나의 욕구를 충분히 충족해 주었다. 함께 사랑에 빠지게 해줬고, 또 같이 울게 해주었다. 

 이 영화는 멜로영화계의 수작이라며 네티즌들의 찬사를 받아왔던 작품이다. 그 찬사의 요란함이 내가 이 영화를 보게 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은 영화였다. 오히려 허술한 설정과 과도한 전개가 이루어졌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가 특별히 사랑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작품 속 주인공들의 매력지수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이를테면 이 영화는 ‘보면 사랑에 빠지게 되는 지수’가 최상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이 남자라면 여자주인공이었던 계륜미에 흠뻑 빠지게 되고 여자관객이라면 주걸륜에게 흠뻑 빠지게 된다. 

 영화의 완성도를 떠나 이 영화가 내게 던져준 화두는 제목 그대로 ‘말할 수 없는 비밀’에 대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말할 수 없는 사랑’을 가진 사람의 아픔이 내 가슴에도 닿아와 울었다. 말할 수 없는 사랑은 말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것이고 결국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된다. 우리는 모두 축복받는 사랑을 하고 싶지만, 사랑은 결코 그렇게만 되질 않는다. 사랑은 그 만큼의 행복을 주지만, 또 그 만큼의 아픔을 주기도 한다. 

 ‘말할 수 없는 비밀’이었지만 혹여 말할 수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미래에서 사랑을 하게 되었다는 계륜미의 고백은 그녀가 미친년이 되게 했다. 하지만 그녀가 진정 진실에 대해 말해줘야 했던 사람은 주걸륜이었다. 애당초 이 영화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끌어안고 있었고, 결국 비극으로 치닫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그에게 솔직했더라면 다른 사랑의 가능성을 꿈꿀 수 있지도 않았을까. 결국,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계륜미는 주걸륜을 죽음으로 인도한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물론 죽음만이 이들의 사랑을 가능하게 한 유일한 길이었을 것이다. 

 또 하나 지적하고 싶은 것은 그녀를 미친년으로 만든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녀는 어쩌면 솔직한 고백이 자신을 미친년으로 규정하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그녀의 사랑을 더욱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되게 했는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도 나의 절친한 친구가 와서 “서비야, 나 ‘시크릿’이라는 피아노를 치고 20년 후로 가서 사랑에 빠졌어.”라고 한다면 사실상 대략 난감이다. 그러고 보면 사랑은 그 자체가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그저 사랑을 믿고 싶다. 

 말할 수 없는 사랑은 말할 수 없는 사람에 대한 것이고 결국 말할 수 없는 비밀이 된다. 하지만 그 말할 수 없음이 사랑하는 당사자를 향한 것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사랑은 함께 하는 것이고 그 사랑은 서로 간의 신뢰 위에서만 온전한 꽃을 피울 수 있다. 자신을 가장 아프게 하는 것, 슬프게 하는 것, 눈물 나게 하는 것. 그것을 사랑하는 사람과 공유했으면 좋겠다. 만약 그것이 사랑을 부서뜨릴지도 모를 그런 것이라 하더라도, 아니 그런 것이라면 더욱더-그 사람에게는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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