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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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조정래,『허수아비춤』
- 자발적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경제민주화’를 이루자.

 2010년의 마지막 날이다. 올해 서점가를 뒤흔든 책은 단연 마이클 샌델의『정의란 무언인가』라고 할 수 있다. 알라딘의 스타블로거 ‘로쟈’도 이 책을 올해의 책으로 추천했다1). 하지만 올해 초에 가히 ‘혁명은 이렇게 조용히’라고 할 만한 책이 있었다. 바로 김용철 변호사의『삼성을 생각한다』이다2). 그러나 지금도 이 책이 여전히 ‘조용한 혁명’을 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냐하면 이제는 이 책을 베스트셀러 코너에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조용한 혁명’의 지원군이 있다. 바로 조정래 작가의『허수아비춤』이다. 두 권의 책을 모두 본 독자들은 “『삼성을 생각한다』의 소설판이 바로『허수아비춤』이다.”라고 말하곤 한다. 서점의 베스트셀러 코너에서『삼성을 생각한다』는 치워졌지만『허수아비춤』은 그곳에 남아 계속해서 ‘재벌’에 대한 문제제기를 대중에게 던지고 있다. 올 한해 주요 키워드는 분명 ‘정의’였다. 하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한 키워드는 ‘재벌’ 그리고 ‘삼성’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정의’ 덕분에 ‘삼성’은 올해를 무사히 넘길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3).

『굿바이 삼성』에서 김용철은『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미국 사회의 현실과 당신이 말하는 정의란 어떤 관련이 있는가? 금융위기가 시작되자 은행 대출금을 갚지 못해 중산층 사람들마저 대거 집에서 쫓겨나는 현실에서도 정부와 의회가 위기의 주범인 월스트리트의 금융 부자들에게 막대한 특별지원금을 안겨주는 나라. 돈이 없으면 병원에서 쫓겨나거나 길거리에 버려지는 나라. 햄버거 가게에서 소년이 총 맞아 죽는 나라. 정의를 독점하고서 다른 나라에서 대량학살을 자행해도 이를 정당화할 수 있는 나라. 이런 현실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고 여러 가지 한계 상황에서 보다 정의로운 선택이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그의 강의는 하버드 대학생들이라는 미래 미국 사회의 메인스트림 집단을 벗어나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정의란 어떤 한계 상황과 맞닥뜨려 자신이 지닌 가치와 이념에 따른 선택이 최선임을 증명함으로써 확인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논쟁이 불필요할 만큼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는 경우가 더 많은 법이다. (48-49쪽) 

 나는 올 한해 가장 많이 팔린 책이『정의란 무엇인가』가 아니라『삼성을 생각한다』였다면 한국사회가 더 구체적인 담론의 장에서 실체적 대상과 맞대결 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아쉬운 생각이 든다. 철학적인 사유의 중요성은 명백하지만, 구체적인 현실의 고발에 비한다면 덜 위험할 수도 있다. 물론 각기 지향하는 목표의 층위가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단언하는 것은 다소 무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삼성을 생각한다』보다『정의란 무엇인가』가 훨씬 많이 팔리고 더 주목을 받았기에 대한민국의 기득세력과 권력층이 한결 안도했음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가 장정일은『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이렇게 까지 말한다. “무척 역설적이게도 이 열풍이 은닉한 더 중요한 의미는, 이 책이 100일 동안 총인원 100만 명을 동원했던 2008년 촛불 집회에서 얻은 정의의 경험을 망각하고, 무력증에 빠져버린 시민들의 자기 위안물로 부상했다”4)라고. 

 하지만 재벌의 범죄에 대한 고발, 경제민주화의 촉구는 조정래의『허수아비춤』을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되고 있다.  

 화염병을 앞세우고 가투에 몸 던졌던 그때 군부독재를 물리치는 ‘정치민주화’만 꿈꾸었던 것이 아니었다. 모든 사람들이 고루 혜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경제민주화’도 함께 꿈꾸었었다. 노동자들의 열성적인 노동에 힘입어 기업들이 성장하고, 기업들은 양심적으로 투명경영을 하고, 성실하게 세금을 내서 복지 제도와 함께 분배가 잘 이루어져 모두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치민주화가 시급했기에 경제민주화를 함께 내세울 수가 없었다. 단계적으로 실천하자고 했다. 그 유보의 세월 속에서 기업들은 거대 공룡으로 성장한 것도 모자라 분배와 반대의 길인 비자금 꿰차기에 나선 것이었다. (250-251쪽)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지 ‘경제민주화’를 이룩할 수 있을까?『허수아비춤』을 좀 더 들여다보자. 

 우리는 흔히 국민을 나라의 주인이라고 한다. 과연 그런가?(···) 투표권 행사. 남·여·유·무식을 불문하고 누구나 한 표씩인 권리. 그 권리는 법 앞에 만인 평등을 입증해 주는 동시에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것을 확실하게 확인시켜 준다. 그러나 이런 말이 있다. 선거는 지배 계급에게 주기적으로 지배와 억압에 대한 정당성을 선사해 주는 제도일 뿐이다. 프루동의 말이다.(···) 그들의 배신과 불의를 막기 위해서는 국민들은 또 다른 감시와 감독 조직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것이 바로 시민단체다.(···) 우리나라와 비슷한 인구를 가진 프랑스나 독일 같은 나라에는 5만여 개에 이르는 시민단체들이 활약하고 있다. 그 많은 시민단체들은 국민들의 생활과 직결되어 있는 모든 권력 기관들을 이중, 삼중으로 감시하고 감독한다.(···) 그런 튼튼한 구조 속에서 민주주의는 굳건해지고, 국민들은 나라의 진정한 주인이 된다.(···) 순수하게 국민 개개인의 돈으로 운영된다. 국민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시민단체에 회원으로 가입해 일정액의 회비를 낸다. 그 회비가 시민단체들의 맥박을 뛰게 하는 피가 된다. 그들은 하나만이 아니라 자신들의 관심에 따라 여러 개의 시민단체에 가입해 후원하기도 하고, 직접 자원봉사에 나서기도 하고, 어느 때는 시위에 참여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에는 시민단체가 몇 개나 있을까. 대충 2만여 개이지만, 생명력 있게 활동하는 단체는 2백여 개를 넘지 못한다.(···) 국민들의 참여 부족, 무관심 때문이다.(···) 우리가 선망하는 선진국에 이르기 위해서는 결속력 강한 회원들로 이루어진 5만여 개의 시민단체를 갖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하여 그 수많은 눈들로 정치권을 감시하고, 경제권을 감독하고, 법조계와 공직 사회와 언론계를 눈 부릅뜨고 지켜야만 비로소 전 사회는 맑고 깨끗해져 선진국의 문이 열리게 된다. 시민단체들의 활성화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열리는 유일한 길이요, 희망이다. (373-376쪽)

 다소 길게 인용했는데, 어쨌든『허수아비춤』에서 이야기 하는 중요한 방안 하나가 바로 ‘시민단체의 활성화’이다. 이는 너무나 명백한 것이다. 하지만 현재 우리사회가 구축해 나가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일단 ‘시민단체의 활성화’를 위해서는 각 시민들의 ‘적극적 사회참여’가 필요한데 이를 기대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우리도 활동하는 시민단체들이 있고, 2008년에는 뜨거웠던 촛불집회도 있었다. 하지만 촛불집회는 단발성에 그쳤고, 지속적인 감시와 견제의 힘은 잃었다. 그리고 우리의 시민단체는 시민들의 후원금을 적극적으로 받지 못하는 형편이다. 그리고 가장 큰 걸림돌은 아직 ‘시민단체’라는 것을 가까이에 있는 무엇, 그러니까 얼마든지 참여 가능하고 해볼 만한 것, 그리고 내가 해야 하고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인식자체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시민단체의 활성과 더불어『허수아비춤』은 또 하나의 카드를 제시한다. 

 우리는 지난 80년대에 피 흘려 ‘정치민주화’를 이룩했다. 이제 우리는 ‘경제민주화’를 이룩해야 할 시점에 와 있다. 그 경제민주화가 바로 모든 재벌들이 그 어떤 불법 행위도 저지르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강력한 무기를 뽑아 들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소비자로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권한인 ‘불매’다. 우리 모두가 힘을 합쳐 경제 범죄를 저지른 기업의 상품을 사지 않는 ‘불매운동’을 적극 벌이는 것이다.(···) 투표가 피 흘리지 않고 민주주의를 계속 신장시켜 나갈 수 있는 ‘정치혁명’이듯이, 우리가 단결한 불매운동은 기업들과 우리들이 모두 함께 행복해질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경제혁명’이다. (326쪽) 

 그 카드는 ‘불매운동’이다. 화자는 “가장 효과적인 ‘경제혁명’”이 바로 불매운동이라고 말한다. 소설 속 일광기업은 1조원의 비자금을 조성한 ‘범죄기업’이다.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 어마어마한 금액에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한국의 자랑이라고 들어왔던 삼성은 비자금의 액수가 10조에 달한다. 소설보다 현실이 더욱 가관인 것이다. 비자금 10조는 삼성의 직원들에게 돌아가거나 혹은 고객에게 돌아갔어야 하는 돈, 그리고 세금으로 납부되어 국가운영의 제정으로 충당됐어야 하는 돈을 빼돌린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을 정치인, 법조인, 학자, 언론, 공무원 등등에 “멕여”서 절대 권력에 올랐다. 삼성은 ‘돈이면 다 된다’는 맘몬의 가르침을 신봉하여 대한민국을 접수했고, 그것을 무력하게 보고만 있었거나 혹은 무심했던 국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내가 삼성불매운동을 지지한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한 뒤, 주위의 사람들에게 권면할 때면 자주 돌아오는 반응이 있다. “너는 삼성이랑 무슨 원수를 졌길래 그러냐? 그래도 우리의 국가대표잖아.” 내가 삼성에 대해 깊이 아파하는 이유는 그 동안의 삼성이 내게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나는 오랜 시간동안 삼성라이온스 야구팀을 열렬히 응원했었고, 영국 프리미엄리그 축구팀의 첼시가 삼성의 스폰서를 받는다는 이유만으로 팬을 자처했었다. 사랑하는 사촌형이 삼성 애니콜 연구소에 취업을 했을 때는 나 역시도 얼마나 자랑스러워하지 않았던가? 나는 삼성이 사랑받을 만한, 그리고 존경받을 만한 기업으로 탈바꿈되기를 꿈꾸기 때문에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다. “삼성과 한국이 함께 사는 길”이 바로 이 길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제각기 자기네 자신만을 위한 이기주의와 기회주의에 사로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기업과 법조계, 우리 기업과 언론 사이의 메커니즘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국민경제를 위하여······’ 하는 판결문이나 기사들을 정말 자기들을 위하는 것이라 믿을 뿐 아니라, 그 단순한 생각이 오랜 세월에 걸쳐서 반복됨으로써 집단 최면 상태에 빠져 있습니다. 그 두 가지 효과가 합쳐져 세상 사람들은 우리 기업에게 배신을 모르는 자발적 복종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416-417쪽) 

 앎이 중요한 이유, 그리고 양심적 발언과 행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삼성이 우리를 먹여 살린다’라는 것이 거짓말임을 알기란 생각보다 쉽지가 않다. 왜냐하면 이미 광고료라는 생명줄을 붙잡힌 언론은 제대로 된 여론형성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고, 오히려 삼성의 중요한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주류 권력가들과 그에 기생하는 학자 및 기업임원들(그리고 근로자들) 역시 연기를 피우며 성 안의 실체를 감춘다. 그래서 나 같이 성을 기웃기웃하다가 우연히 성벽의 구멍5)을 통해 안을 본 사람만이 진실의 일면을 알 수 있을 따름이다. 나는 정말이지 큰 충격과 상처를 받았고, 심한 우려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 구멍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이고, 그 안의 진실을 보게끔 하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 나 혼자 그 진실을 알아봤자 별로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게 되고 경각심을 가지고 같이 고민하고 행동해야만 한다. 불매운동을 하는 것이나 시민단체를 활성화시키는 것 모두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할 때만이 힘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자발적 노예의 삶을 청산하고 ‘경제민주화’를 이제는 실현해나가자. 이것은 우리의 노예적 삶으로부터의 해방이면서,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 꼭 해결해야 할 숙제이다. 그리고 이 숙제는 ‘삼성’에서 시작할 수밖에 없다.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일들을 실천해 나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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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쟈는 이와 더불어 두 권의 책을 더 꼽고 있는데, 최근 베스트셀러 1위 자리를 공고히 지키고 있는 장하준의『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지젝의『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가 그것이다. 장하준의 책은 최근 의미심장하게 읽고 있는 중이고 지젝의 책은 리스트에는 꽤 오래 전에 올려두었는데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조만 간 시간을 내어 읽어보도록 해야겠다. 2)『삼성을 생각한다』는 언론사들의 광고거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입소문으로 베스트셀러에 올랐었다.
3) 물론 ‘정의’가 올해의 화두가 되어 유효한 측면이 분명 있다. 로쟈는 “가령 새해 예산안을 ‘날치기’로 강행처리하고서 여당 원내대표가 “대다수 국민들이 예산처리를 바랐고 이것이 국가를 위한 정의”라고 말한 것도 <정의란 무엇인가>가 유발한 ‘정의 담론’의 효과 아닌가. 비록 ‘국가를 위한 정의’와 ‘권력을 위한 불의’를 혼동한 감은 있지만 그의 발언에서 ‘정의’를 명분으로 내세워야 한다는 ‘사회적 압력’은 읽을 수 있다.”라고 의의를 밝힌바 있다. 나 역시 이러한 것에 공감한다. 하지만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로인해 밀쳐진 부분들 역시 살펴야한다.(로쟈의 블로그 참조)
4) 장정일이 프레시안에 기고한『정의란 무엇인가』의 서평 중 일부다. 서평제목은 ‘<정의란 무엇인가>에 반대한다.’이다.
5) 내게 그 구멍의 역할을 한 책이 바로『삼성을 생각한다』와『굿바이 삼성』이다. 물론 이외에도 좋은 저작들과 글들이 있지만, 일단 이 두 권을 꼭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국민은 나라의 주인인가. 아니다. 노예다. 국가 권력의 노예고, 재벌들의 노예다.(···) 그런데 정작 당신들은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 그것이 당신들의 비극이고, 절망이다.(···) 왜 그런 사태가 거듭 벌어지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세상 망칠 그 거대한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도 태봉그룹이 무죄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나라의 주인이고 이 사회의 주인인 국민과 대중들이 그 끔찍한 사건을 방관하고, 묵인했기 때문이다.(···) 긴 인류의 역사는 증언한다.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은 노예에게 자유와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노예 중에 가장 바보 같고 한심스런 노예가 있다. 자기가 노예인 줄을 모르고 노예와,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 고통과 비참함을 모르는 노예들이다. 그 노예들이 바로 지난 40년 동안의 우리들 자신이었다.(···) 우리가 그 어리석은 환상과 몽상과 망상에 사로잡혀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기업들은 더욱 신바람 나게 경제 범죄를 저지르고, 우리는 점점 더 비참한 노예가 되어 간다. (322-32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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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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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조지오웰,『나는 왜 쓰는가』
- 그렇다면, “나는 왜 쓰는가?”   

 


 언론 자유의 시대가 저물어 가고 있다.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다.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 모든 작가가 완전히 침묵하는 쪽을 택하거나, 아니면 소수의 권력층이 요구하는 마약만 만들어낼 때가 올 것이다. 나는 그런 상황에 맞서 싸워야 한다. 64쪽.

 나는 이 구절을 읽으면서 ‘삼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김용철 변호사가 양심고백을 한 저서다. 그는 검사 출신으로 삼성에 입사한 후 로비스트로 활동했었다. 김용철은 자신이 구속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공개적으로 삼성의 비리를 증언했다. 하지만 그의 양심고백은 언론의 의도적인 공작에 의해서 회피되었다. 이 책은 주류언론사는 말할 것도 없고, 진보적인 신문사라고 불리는 <한겨레>나 <경향신문>에도 광고를 실지 못했다. 심지어 <경향신문>의 고정 칼럼리스트였던 철학자 김상봉의 글이 이 책에 대한 서평이었다는 이유만으로 가위질을 당했다1). 오웰은 “영국에서 언론의 자유는 언제나 일종의 사기”였고 “마지막 순간에는 언제나 돈이 의견을 지배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것은 다름 아닌 바로 지금의 우리사회의 이야기였다. 

 그리고 조지오웰은 스페인 내전의 참전경험을 돌이켜 보며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잔혹함과 더러움과 헛됨을 생각하다보면 꼭 발설하고픈 유혹을 느끼게 되는 말이 한마디 있다. “이쪽도 저쪽도 나쁘다. 나는 중립이다.” 하지만 실제 상황에서 사람은 중립일 수 없으며, 누가 이기든 상관없는 전쟁 같은 건 없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거의 항상 한쪽은 다소 진보적인 쪽에 서고, 다른 쪽은 다소 반동적인 쪽에 서는 법이다.(···) 본질적으로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다. 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서민들의 대의는 어디서나 한층 강화됐을 것이다. 하지만 졌기 때문에 세계 각자의 불로소득자들은 만족스럽게 양손을 비빌 수 있었다. 그게 핵심이며,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 153쪽.  


 그의 이러한 발언은 우리의 지식사회를 되돌아보게 한다. 인문학자 이택광은 이렇게 말한바 있다. “한국에서 일어나는 이론 논쟁이란 대체로 텍스트에 대한 ‘엄밀한 독해력’을 겨루는 일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이렇게 의문을 제기했다. “현실의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여야 할 순간에 텍스트로 도망가서 상대방의 ‘학습 수준’을 거론하는 모습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리고는 이렇게 결론짓는다. “이론은 이렇게 위급할 때 위기를 모면하는 대피소가 아니라, 전장을 함께 누벼야 하는 무기다”라고. 조지오웰은 ‘중립’이란 단어의 기만성을 지적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본질적으로 이 전쟁은 계급 전쟁이었다.(···) 그게 핵심이며, 나머지는 전부 그 위에 뜬 거품에 불과하다.”라고. 그는 결코 숨지 않는다. 양비론을 방패삼지도 않고 거창한 철학 뒤에 숨지도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가?, 나는 어떠한가? 그저 거창하게 철학자나 이론가의 테제를 나열하면서 그 뒤에 숨어 있지는 않은가? 그것을 유식이라고 착각하고 있지 않은가? ‘엄밀한 독해’라는 명분을 대고 사실상 공부(혹은 책읽기, 글쓰기)가 현실과 더 없이 괴리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지오웰은 “생각이 언어를 타락시킬 수 있다면, 언어도 생각을 타락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수의 권력층이 요구하는 마약(같은 글쓰기) 만들기에 반하여 맞서 싸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또 우리에게 말하고 있었다.  


 조지 오웰은 “문학은 경험을 기록함으로써 동시대 사람들의 관점에 영향을 끼치고자 하는 시도”라고 명명했다. 이러한 특성은 문학에만 한정하지 않는다. 모든 글쓰기, 그리고 모든 예술과 교육, 이론, 담론, 말들이 다 그러하다. 그는 “어떤 책이든 정치적 편향으로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예술은 정치와 무관해야 한다는 의견 자체가 정치적 태도인 것”이라고 말한다. 나는 전적으로 이러한 견해에 공감한다. 강풀의 웹툰 만화나 혹은 서태지의 영상 밑으로 이런 댓글들이 많이 달리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정치 이야기를 하는 몰상식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지 좀 맙시다. 만화(예술)는 그냥 만화(예술)로만 좀 봅시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현실을 기만하는 것이 아닐까? 모든 창작자는 자신이 갖고 있는 이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 이념이 창작을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모든 텍스트에 대한 ‘정치적 시선’의 거둠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거나, 아니면 마냥 순진한 태도 일 뿐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의 글쓰기 철학을 이렇게 밝힌바 있다.  


 1936년부터 내가 쓴 심각한 작품은 어느 한 줄이든 직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맞서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것들이다.(···) 지난 10년을 통틀어 내가 가장 하고 싶었던 것은 정치적인 글쓰기를 예술로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할 일은 내 안의 뿌리 깊은 호오好惡와, 이 시대가 우리 모두에게 강요하는 본질적으로 공적이고 비개인적인 활동을 화해시키는 작업이다. 297-299쪽.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내 작업들을 돌이켜보건대 내가 맥없는 책들을 쓰고, 현란한 구절이나 의미 없는 문장이나 장식적인 형용사나 허튼소리에 현혹되었을 때는 어김없이 ‘정치적’ 목적이 결여되어 있던 때였다.”라고. 
 

 그렇다면 나는 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있는 것일까? 나의 재능이 누구보다도 궁핍하다는 것이 증명되었는데도 말이다. 그렇다. 나는 처음에는 그저 행복을 생각할 따름이었다. 나의 행복과 내게 소중한 사람들의 행복 말이다. 행복은 함께 더불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더불어 사는 것’보단 ‘경쟁’을 말했고, 그것이 ‘옳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지게끔 강요당했다. ‘인간다움’이라는 것도 ‘비효율’과 ‘비합리성의 산물’이라는 판정을 받아 폐기되어야 할 것으로 강요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녕 ‘더불어 사는 것’과 ‘인간다움’이 폐기되어야 할 그 무엇이라고 판단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강요당하고 있고 그 육중한 무게와 소리 가운데 무력하게 끌려 들어가고 있다. 그 강요의 근원지, 마음의 유혹을 조장하는 마력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있는가? 그것은 물질의 신이자 자본 그 자체인 ‘맘몬’에 의해서 이다. 

 나의 쓰기는 ‘맘몬’과 맞서 싸우는 것이 되어야 한다. 맘몬에 대한 경고는 이미 2000년 전 예수가 한 것이다. 그는 수많은 비유를 들어 맘몬(그리고 억압하는 자들과 권력)에 대적했고, 사랑을 전파했다.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 나는 그의 정신과 실천을 계승해야 한다. 그 시작은 예수의 티셔츠를 팔거나 혹은 맘몬의 함에 돈을 넣는 대가로 천국행이라고 쓰여 진 티켓을 판매하는 짓(교회의 변질)의 중지를 요구하는 것에서 비롯될 것이다. 또한 동시에 맘몬의 사상을 전파하는 맘몬의 성전인 ‘삼성’을 비판하는 것이 병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이 ‘실천적’인 것이 되어야만 한다. 나의 읽기(공부)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대한 더 나은 이해를 위한 것이 되어야하지, 숨어들기 위해 방패들을 ‘콜렉션’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끝으로 가장 중요한 것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작위적이고 인위적인 사명에의 힘에 기댄 것이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모든 것이 ‘행복’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할수록, 남들도 다 자기처럼 생각해야 한다며 괴롭히기 십상”이 되는 함정에 빠져서도 안 된다. 더불어 산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을 지양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맘몬’에 대적하고 ‘사랑’을 말하여 존중된 인간다움 위에 더불어 살게 되는 것을 지향한 것. 그것이 ‘나는 왜 쓰는가’에 대한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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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개정신판
공지영 지음 / 오픈하우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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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감상] 공지영,『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당신의 걸음은 ‘무소의 뿔’ 같은 걸음인가요?

 본 소설은 결혼제도(가족의 구성)에서 비롯된 폭력으로 희생당하고 있는 세 여자의 이야기이다. 한 사람은 폭력을 거절하고 이혼녀가 되었고, 한 사람은 폭력을 감수한 일상의 지속을 감행한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폭력의 희생 끝에 파멸에 이르게 된다. 물론 이런 식으로 정리해버리는 것은 어폐가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폭력’에 대한 사유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사랑의 고갈, 일상의 부득이함을 인정하며 참고 살아가는 경혜는 결코 행복하지 않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잃지 않기 위해 이혼을 선택한 혜완도 역시 행복하지 않다. 사랑을 위해 자신을 희생함으로서 삶의 의미를 구축했던 영선은 결국 파멸에 이르고 말았다. 이들의 불행은 정녕 누구의 책임인가? 단순히 남편의 문제인가? 

 혜완은 선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세대의 남녀 갈등은 불가피 한 거야. 우리네 어머니들은 딸보고는 자기처럼 되지 말라고 하고, 아들에게는 엄마 같은 여자를 만나라고 했기 때문에 우리는 싸울 수밖에 없는 거”라고. 물론 그럴 것이다. 하지만 더 근본적으로는 사랑의 필연적 죽음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인류학자들은 결혼제도가 인간에게 있어서 더 없이 폭력적인 제도라고 평가한다. 인간의 본성(불특정 다수를 향한 욕망의 지속)과 너무나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는 것은 누구나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인간이 문명을 개척하고 사회를 만든 한 본성에만 의거해서 살 수만은 없다. 잘못된 제도는 고쳐져야 하지만, 그에 앞서 대안과 사회적 합의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갈되지 않는 사랑이란 것이 존재할까? 만약 그것이 전적으로 가능해서 서로에 대한 욕망의 지속이 유지될 수 있다면 결혼제도를 폭력적으로 흔드는 일이 예방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개의 갈등은 결국 서로에 대한 소원함에 있고, 그것은 자신의 법적 배우자로 부터 결핍을 느끼게 때문에 생긴다. 자신의 채우지 못한 욕망은 다른 곳을 향하게 된다. 그리고 그 외부로의 욕망의 분출은 폭력과 상처를 남긴다. 

 “너와 결혼한 이유는 너와의 연애 기간이 마침 결혼적령기에 이루어졌기 때문이야.”라고 누구도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대개의 경우 유효한 말이다. 만약 더 이른 시기에 연애를 했다면 그저 뜨겁게 사랑하고 헤어질 연인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마 보통은 그럴 것이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제도에 포섭된 그들은 연애의 시절처럼 쉽게 ‘안녕’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들의 인연을 이어주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제도의 강제에 의한 것이 되 버렸기 때문이다. 헤겔이 서둘러서 아이의 출산을 통해 변증법적 사랑의 갱신을 요청한 것도 사랑의 필연적 죽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은 시작과 함께 죽음을 향해 달려간다. 서로의 배려는 그 필연적 죽음의 지연을 가능하게 할지는 모르지만 죽음을 극복시켜주진 못한다. 따라서 최후의 보루는 ‘정(情)'이 된다. 

 인문학자 고미숙은 “시절인연”이라는 개념으로 사랑을 설명한 바 있다. 여기서 ‘시절인연’이란 “서로 다른 길을 가던 두 사람이 어떤 강한 촉발에 의해 공통의 리듬을 구성하게 된 특정한 시간대를 뜻”한다. 따라서 그녀는 “중요한 건 반쪽이를 향한 무한도전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짝을 찾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시절인연의 속성’이다. 그녀는 “사랑에도 엄연히 춘하추동, 사계절이 있는 법”이라고 단언한다. 즉, 사랑의 시절이 끝나는 것(사랑의 소멸)은 봄이 오면 후에 여름이 오는 것처럼 당연(자연스러운)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끝은 다음 ‘시절인연’의 가능성이 되기 때문에 축복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고미숙의 성찰은 남녀가 연애의 시절일 때는 충분히 유효하다. 하지만 문제는 결혼 이후이다. 결혼 이후에도 이러한 시절인연에 기댄다면 파경은 필연적인 귀결이 된다. 결국 고미숙은 결혼제도 자체에 대해 반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결혼제도는 ‘시절인연’을 원천적으로 막는 폭력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회적 동의를 얻지 못한 결혼제도의 부인은 더 큰 사회적 폭력으로 회귀된다. 그리고 그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직면해 있는 현실이다. 

 이혼을 해도, 결혼을 유지해도, 혹은 자신의 인생을 남편(배우자)에게 투사해도 불행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결혼제도의 파기에 대한 상상은 유의미하지만 지금의 우리에겐 안드로메다적이다. 결국 최선은 변치 않는 사랑이라는 환상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기적이 이뤄지길 기원하는 것인데 이 역시도 달나라 토끼스럽다. 결국 공지영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고 말한다. 물론 그 걸음은 결혼제도 밖에서의 걸음일 수도 있고, 안에서의 걸음일 수도 있다. 다만 중요한 것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는 것의 인지와 실천에 있을 것이다. 그 걸음은 주체적으로 자신과 타인의 관계를 구성해가는 힘에 의한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스스로가 단련되지 않는다면 항상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그(녀)와 손을 잡고 걷는 당신의 걸음은 어떠한가? ‘무소의 뿔처럼’ 그렇게 걷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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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감상] 연평도 사태와 <의형제>
- 국민의 통제만이 국가의 전쟁 욕망을 억제할 수 있다. 

  

 철학자 강신주는 “진정으로 전쟁을 종식시키는 방법은 국가 그 자체를 폐기하는 것”이라고 명명한 바 있다. 가라타니 고진도 “국가는 국가에 대하여 존재한다”라고 하면서 국가가 존속하는 한 전쟁은 불가피한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대한민국은 그런 국가의 존재론적으로 내재된 전쟁의 불가피성 위에서 휴전 중이다. 그리고 얼마 전 연평도 사태가 터졌다. 우리의 군장병 2명과 민간인 2명이 목숨을 잃었다. 한 전쟁학자의 말처럼 “전쟁을 종식시키는 유일한 방법은 전쟁이 인류를 종식시키는 일”인 것일까? 우리에게 북한은 무엇인가? 우리에게 국가는 무엇인가?  




 연평도 사태가 터졌고 나는 두려웠고 또 분노했다. 북한은 과연 우리의 형제인가? 장훈 감독의 <의형제>는 북한 간첩과 국정원 요원의 우정을 다루고 있다. 북한 간첩과 국정원 요원의 우정 말이다. 세상에, 이래도 되는가? 빨갱이를 때려잡아야 할 국정원 요원이 빨갱이와 우정을 쌓는다니! 오, 마이 갓. 의형제란다. 그래서 한 보수논객이 이 영화를 평하면서 “국가안보를 위협하는 위험하고 불순한 영화”라고 혀를 찼나보다. 

 그런데 이들은 어쩌다 서로의 마음을 열 수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국가주의를 넘어선 휴머니즘에서 비롯됐다. 국정원 요원인(이었던) 이한규(송강호)와 공작원 송지원(강동원)은 각자의 이해관계 속에서 함께 일을 하게 된 상황에서도 서로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견제한다. 하지만 그러한 팽팽한 긴장감은 서로에 대한 이해를 통해 완화되어 간다. 그 완화 장치 중 하나가 가족이다. 국가에 몸 받치다 가족을 잃은(혹은 버림받은) 이한규와 역시 국가에 몸 받치다 가족과 떨어지고(그리고 위험에 처하게 만들고) 고립된 송지원은 사실상 국가적 폭력 아래 피차일반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서로의 이념이 아닌 서로의 인간성을 보면서 위태로웠던 살생의 유혹에서 벗어난다. 
 

 연평도 사태가 터지고 연신 시끄럽다. 여당과 보수진영의 “강경대응”타령, 야당의 “정부 무능력”타령, 국민들과 네티즌들의 “이를 가는 분노”타령. 이야 말로 완전히 ‘스테레오 타입’식의 반응 아닌가? 장병들의 죽음과 민간인들의 죽음은 이런 스테레오 타입의 연주아래 개죽음이 된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는 말이 아니라 냉철하게 이 사태의 핵심을 살피고 실질적인 대책이 나와야 한다. 그래야지만 소중한 생명의 참혹한 소실이 진정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미학자 진중권은 이번 사태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 문제제기를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문제의 원인은 정치적인 데에 있는데, 해법은 자꾸 군사적으로 제시하려는 현정권의 접근방법엔 근본적 오류가 있다. 양측의 강경대응은 서로 상대를 제 뜻에 맞게 움직이려는 데에 있을 텐데, 현재 북한은 미국과 남한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미국과 남한은 북한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럼 한쪽에선 제재의 수위를 더 높이고, 다른 쪽에선 도발의 수위를 더 높이고. 제재든, 도발이든, 수위만 더 높이면 상대가 굴복할 거라 믿는 모양인데, 거기서 문제는 악순환에 빠져드는 것이다”라고. 바로 이 지점에서 고민해야 한다. 위정자들과 정치인들의 뻔한 말들과 북한에 대한 분노의 감정으로 고양되어 욕설을 내 뱉기만 하는 국민들의 반응은 그저 무책임한 자기위안일 뿐이다.



   
도대체 왜 남북한의 지도자들은 대화하지 않는가? 국민들은 왜 대화를 촉구하지 않는가? 국지전이 발발하면 그저 분노에 휩싸인 채 얼굴만 붉히고들 있는가? 그럼 뭐 어쩔 생각인가? 전면적이라도 할 생각인가? 한반도가 피에 덮여야지 속이 풀리는가? 왜 그런 자해(自害)를 요청하는가? 서해안에서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지는 이유(빌미를 제공하는 이유)는 남북한이 제대로 합의하지 못한 북방한계선(NLL)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갈등은 쉽게 해소될 수가 없다. 군사적 요충지라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계속 이렇게 있을 것인가? 전쟁이라는 것이 국가의 내재적 요인이라면 결국 국가를 통제함으로서 방지해야 한다. 2007년 10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에서 북방한계선(NLL)에 공동어로구역과 평화구역을 조성하는 서해평화협력지대 설정에 합의한바 있다. 하지만 현 정부 들어 남북대화가 중단되면서 진척을 갖지 못했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만나고 대화해 나가면서 실질적인 협의들을 만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반도의 전쟁 위험을 줄일 수 있다. 아무리 북한이 비상식적이라고 생각되어지고 원수 같이 여겨지더라도 그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외면한다고 해서 사라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통일, 혹은 한반도의 평화는 전적으로 우리의 숙제이다.

 <의형제>에서 공작원과 국정요원의 우정은 상호 신뢰가 쌓이면서 가능했다. 그리고 그 신뢰는 관찰과 대화와 이해에서 비롯됐다. 물론 개인의 화해와 국가의 화해는 엄연히 다르다. 하지만 관찰과 대화와 이해가 기반 되지 않는 화해란 연기(演技)이자 사기(詐欺)일 뿐이다.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한반도 평화에 대한 논의 없는 “국민을 위한 대북정책” 역시 마찬가지다. 국가 통제의 몫은 국민이다. 국가의 폐기는 아직 준비되지도 않았고, 오지도 않았다. 결국 통제만이 대안이다. 통제에 실패한다면 국가적 폭력아래 국민은 무력할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를 위한 지도자들의 만남을 촉구하자. 그리고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사안들을 만들게 요구하자. 국가적 흥분에 동조하는 방식은 국가의 폭력에 자발적으로 동의하는 짓이다. 국가 너머를 꿈꾸면서 동시에, 국가통제에 힘을 기울이자. 평화는 국가가 제공하지 않는다. 국민의 국가통제만이 평화를 구축할 수 있다. 장병들과 민간인들의 죽음을 개죽음으로부터 구해내자.

+덧)
제가 좀 격양된 심정으로 썼습니다. 이번 사태에 따른 장병들과 민간인들의 죽음은 사실 결코 개죽음이 아니지요. 다만, 이렇게 스테레오 타입 식의 소리만 듣다가 이번 사태가 어물적 넘어가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서 좀 과격하게 표현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저도 대한민국의 남자이자 예비군으로서 이번 사태에 대해 그리고 국지전의 반복과 북한과의 대립 앞에서 절실한 심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서정우 병장, 문광욱 이병 그리고 김치백, 백복철 씨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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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
- 관념의 자켓을 벗고, 모험을 해보자. 친구의 손을 잡고서. 지금 여기서부터. 

 

 영화 <업>은 모험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험은 관계를 동반한다. 영화의 주인공 칼에게 모험심을 심겨준 영웅은 찰스 먼츠이다. 나에게도 그런 존재가 있다. 그가 바로 서태지다. 수능시험만이 절대적 진리인양 취급되던 나의 학창시절에 그는 도발적인 메시지를 전했다. “좀 더 비싼 너로 만들어 주겠어. 네 옆에 앉아 있는 그 애보다 더. 하나씩 머리를 밟고 올라서도록 해. 좀 더 잘난 네가 될 수가 있어.”(교실이데아) 서태지는 수능시험과 대학이라는 것이 내재하고 있는 폭력을 고발했다. 그리고 그런 가르침에 “됐어!”를 외쳤다. 나는 서태지의 노래를 들으며 모험과 혁명을 꿈꿨지만, 수능을 치고 대학에 진학했다. 나는 현재 대학원 재학 중이고 서태지는 자퇴한 중졸 학력자다. 나는 여전히 위태로운 현실 앞에 모험을 뒤로 미루고 있고, 서태지는 여전한 모험의 항해를 하며 나를 유혹한다. 

 영화 속에서 칼은 함께 모험을 꿈꿨던 소꿉친구 앨리와 함께 살면서 여생을 보낸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앨리는 칼의 곁을 떠난다. 이후 칼은 그녀의 사진과 대화를 하고, 그녀와의 추억이 깃든 집에만 기거한다. 가끔 어릴 적 꿈을 떠올리고, 모험을 위해 만들었던 일지를 만지작거리지만 그의 문은 굳게 닫혀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러 뱃지를 달고 있는 꼬마 러셀이 칼을 방문한다. 또 하나의 뱃지인 노인돕기 뱃지를 얻기 위해서다. 칼은 자기를 귀찮게 하는 러셀을 따돌리려 한다. 한편, 칼의 동네는 재개발로 공사가 한창이다. 칼은 자신의 집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지만 쉽지가 않다. 결국 그는 떠나기로 결심을 한다. 수많은 풍선을 집의 손에 쥐어주어 함께 모험을 떠난다. 앨리가 만든 모험의 일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모험 약속 지켜줘서 고마워요. 이제 새로운 모험을 하세요. -사랑하는 앨리” 

 그런데 이 여행에 의도하지 않았던 일행이 생긴다. 바로 러셀이 함께 왔던 것이다. 칼은 러셀을 귀찮게 여기지만 나중에는 그의 모험의 방향을 바꾸는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칼은 그렇게나 집착했던 자신의 집 대신 러셀의 손을 잡는다. 러셀은 칼이 집을 잃어버릴 때 진심으로 안타까워한다. 칼이 부인과의 추억이 깃든 집을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칼은 이렇게 말한다. “저건 그냥 집일뿐이야.” 칼은 부인과의 사별 후 스스로 고립된 삶을 살아 왔다. 그는 그저 수많은 자물쇠로 문을 단단히 할 뿐이었다. 하지만 그 단단했던 고립을 비집고 러셀은 기어들어왔다. 칼과 러셀의 모험은 새로운 관계들을 형성했고, 각기 다른 성장의 기회를 제공했다. 칼은 고립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계를 만들 수 있었고, 러셀은 ‘모험이 그려진 뱃지’가 아닌 ‘진짜 모험’을 경험할 수 있었다. 

 


 나는 ‘교실이데아’에 매료되었음에도 학교를 그만두지 못했다. 왜냐하면 ‘모험 일지’ 조차도 준비되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서태지는 ‘음악을 향한 모험’이라는 일지가 준비되어 있었다. 그리고 실천할 수 있는 열정이 있었다. 그저 막연한 꿈으로는 결코 ‘자퇴’라는 실천에 이를 수 없다. 서태지에게 있어서 “날 바꿨던 어떤 답안지”(울트라맨이야)는 강요당한 무력한 젊음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는 제시된 ‘답안지’가 ‘사기’임을 깨달았기에 기어이 일상을 부수고 모험에 뛰어 들 수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뛰쳐나와 골방에서 함께 기타를 두들기던 친구들이 있었기에 항해가 가능했다. 나는 지금 모험 일지를 만들고 있다. 그리고 함께 항해를 할 친구들을 고대하고 있다. 아니, 어쩌면 이미 항해가 시작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글을 쓰고, 모임을 만들고 발언의 시간들을 가지는 것, 그 자체도 한편의 모험이지 않을까.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여러 가지로 해석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일이다.”라고. 이 말을 조금 변주하면 이렇게 말 할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 사람들은 모험을 여러 가지로 생각만 해 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모험을 체험적으로 시행하는 것이다.’라고. 아무리 생각을 많이 해도, 실제로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아무리 많은 모험 뱃지를 모아도 진짜 모험을 체험하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관념의 자켓을 벗고, 모험을 해보자. 친구의 손을 잡고서. 지금 여기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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