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oetry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감상] 시
- 나는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나는 어쨌거나 시를 쓰곤 했다. 내 놓을 만한 것은 못되었지만 어찌됐든 썼던 것이다. 나는 어쩌다 시를 쓰게 되었던가. 돌아보면, 나는 시를 쓸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를 울게 했던 장면, 그리고 그 사람들. 나를 화나게 했던 그 사건. 그리고 무력함의 환멸. 나는 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스스로를 달래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를 보면서, ‘시’가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음담패설과 뒹구는 시, 기술을 전수해 주는 교실 속의 시, 치장된 옷가지 위에 앉아있는 시, “죽어도 싸다”라는 소리를 듣는 시. 함께 영화를 본 친구는 나의 이런 태도가 시를 특권화 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 친구의 말이 맞다. 시는 찬란하고 아름다운 딴 세계의 것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우리들의 삶 속에서 피어난다. 하지만, 하지만, 그 삶이 도대체 뭐란 말인가. 

 영화 속 미자 할머니는 경기도의 작은 소도시에서 이혼한 딸이 맡기고 간 중학생 손자와 함께 살아간다. 생활보조금과 중풍 든 노인을 간병하며 받는 돈이 수입의 전부인 그녀는, 그럼에도 레이스 달린 옷과 모자를 즐겨 쓰고 꽃을 좋아하는 할머니이다. 그런 그녀는 평생에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시 쓰기를 하려고 한다. 그리고, 

 애지중지 키웠던 손자가 자살한 여학생의 강간범들 중 하나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또 그것을 돈을 통해 합의로 무마시키려는 손자 친구들의 아버지들을 만나고, 게다가 자신은 돈도 없고, 의사는 자신보고 치매에 걸렸다고 하고, 피해자의 어머니인 줄도 모르고, 태평하게 아름다움을 떠들고. 

 쫓아오는 삶의 바람은 꽃과 살구와 레이스를 흔들다. 그녀를 흔든다. 

 시는 어떻게 태어나는가. 미자 할머니는 더 이상 태평한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는다. 시 창작 교실에 미련을 갖지 않는다. 정(情)이라는 이름으로 기만하지도 않는다. 그녀는 죽은 소녀를 기어이 자신의 삶에 끌어온다. 함께 배드민턴 치던 손자가 경찰관에게 잡혀가도록 긁히는 마음을 견딘다. 그녀는 시란 꽃을 보고 쓰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부조리와 부도덕의 기만을 찢어 삶을 온전히 끌어안았을 때, 시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시 쓰기를 관둔지 꽤 오래 됐다. 사실, 관뒀다기 보단 쓸 수가 없는 지경이 되었다고 해야 한다. 나는 그 동안 문학 전공자가 되었고, 문학이론을 공부하고, 창작론과 창작기법들을 배워왔다. 예전에 썼단 시들을 보며 ‘손발이 오그라든다’며 그 시절을 부인하고 우습게 여기는 사이에, 나는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 되 버렸다. 왜 더 이상 시를 쓰지 않느냐는 물음에 “자기검열의 강화”를 말하곤 했지만, 사실은 ‘부조리와 부도덕의 기만’을 찢을 용기를 잃었다. 씁쓸하게 웃으며 “시는 돈이 안 되잖아?”라고 말하는 나는, ‘쓸 수밖에 없었던 그 마음’을 어디에 버리고 온 것일까. 

 자신이 작가이기도 했던 이창동은 <시>를 통해 ‘범람하는 화려한 색깔과 소리, 향기’ 속에 사는 우리에게 ‘시가 죽은 시대’란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돌아보게 한다. 화려함 속에 안도하고 있던 너와 내가  기만한 ‘죽음’을 보게 한다. 그새 벌써, 불편한 마음을 거절하고 다시 관성을 타고, 이 시대의 속도감에 빠지고 싶은 유혹이 든다. 

 나는 그 때의 그 마음을 찾을 수 있을까. 나는 다시 시를 쓸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감상] 조국·오연호,『진보집권플랜』
- 조국의 ‘진보집권플랜’을 둘러싼 논의들과 나의 입장


 확실히 조국의 ‘진보집권플랜’이 화제입니다. 지난 20일 동아일보 김순덕 논설위원은 조국을 ‘겉과 속이 다른 강남좌파’라고 비판했습니다. 외고를 비판하지만 자기 딸은 외고에 보냈다고 하면서 말이지요. 보수진영에서는 이를 재생산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에 대해 조국은 "나는 내속의 '위선'과 '언행불일치'를 직시하고 이를 고치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동아의 공격에 위축될 생각은 없다. 동아는 '강부자', '고소영'층에 대해서는 관대하면서 '강남좌파'할퀴기에 여념이 없다."라고 대응했지요.

 조국을 둘러싼 또 다른 논쟁 중의 하나는 김규항과 진중권의 것입니다. 김규항은 조국을 비판하면서  본 책의 제목을 ‘<시민집권플랜> 혹은 <민주집권플랜>’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진보란 먹고사는 데 별 걱정이 없는 중산층 엘리트들이 자신들에게 필요한 변화를 대다수 인민들을 위한 변화라 과장하는 게 아니"며, "자신들에겐 충분한 변화더라도 대다수 인민들에게 근본적인 변화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두 저자가 주장하는 적극적인 선거연합을 통한 정권교체는 '대다수 인민들에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이지요.

 이에 대해 진중권은 "현재 진보정당은 집권 전망도 수권 능력도 없다. 이것이 철인좌파마저 모자 눌러쓰고 진보정당을 외면해온 바람에 생긴 빌어먹을 현실"이라며 정당 활동에 인색했던 김규항을 비판합니다. 그리고 선거연합에 대해서도 "지금 이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다가올 연합 속에서 되도록 진보의 가치를 많이 관철시키는 것이지, 그 연합에 딱지나 갈아붙이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고 주장합니다.

 저는 김규항의 주장이 이해됩니다. 그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우파 자유주의 정권임에도 끊임없이 ‘진보’의 탈을 쓰고 활개하여 진짜 진보가 망각되는 현실을 끊임없이 개탄했었습니다. 그렇기에 유시민과 손을 잡으려는 진보정당과 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게 극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지요. 하지만 진중권의 말마따나 현재의 진보정당의 현실 앞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는 다소 무기력해 집니다. 김규항은 진보의 정체성을 공고히 확립하고 그것을 타협적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사실 원론적인 말이지요.

 저는 선거연합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김규항의 말처럼 자유주의 우파에게 근본적 변화를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따라서 진보정당이 자유주의 우파에게 흡수되지 않는 방향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진중권은 "중요한 것은 공통의 가치를 마련하는 것. 유럽식 ‘사회국가’의 이념 아래 서민복지와 남북화해를 추구한다는 최저 강령에는 세 주체가 모두 동의하지 않을까?"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 선이 최소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선이 지켜진다면 분명 많은 민중들이 더 나은 삶의 조건을 획득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실상 문제는 이러한 진보적 가치가 과연 실질적으로 관철되느냐의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조국은 “남북 문제에서는 군축, 평화공존, 평화통일을 지향하고, 경제에서는 자유시장주의, 시장만능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모순을 직시하면서 시장에서 패자를 아우르는 정책을 추구하고, 양심·사상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위시한 각종 정치적 기본권의 확대·강화를 지지하는 것이 진보”라고 규정했습니다. 그리고 “계급적으로 보면 진보는 강자나 부자의 편이 아니라 약자나 빈자의 편”이고, “특권을 가진 엘리트의 편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편”이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서민과 보통 사람이 자존감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 수 있는 사회가 정의로운 사회라고 봅니다. 진보의 길이 곧 정의를 구현하는 길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저는 어디에 가서든 공개적으로 진보를 자처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조국은 강남에 살고 있고, 서울대 법대 교수고, 딸은 외고에 다닙니다. 김규항이 볼 때 조국은 ‘좌파’라고 하기에 많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조국이 또다시 ‘진보’를 오염시키게 될까봐 많은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김규항에게 조국은 “양심적 자유주의자”이상도 이하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판단이 조국을 유시민과 같은 선상에 놓인 것으로 파악되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지난 10년을 비판적으로 성찰한다는 의미에서 분명한 차이가 있지요. 저는 조국이 자유주의 정당이 아니라 진보정당과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가 표방한 진보가 우보단 좌에 가깝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가 제시하는 정책들도 대개 사민주의를 통해서만 수렴 가능한 것들이고요.

 진보신당 당대회에서 ‘독자파’가 압승을 했습니다. 저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민노당’과의 결합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분당이 될 수밖에 없었던 조건들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과 선거연대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당은 자신의 신념과 철학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이런저런 바람에 휘둘려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실천하고 현실 정치에 구현하기 위한 전략은 있어야 합니다. 선거 연합은 그러한 전략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선거 연합 없이는 진보정당이 자신의 뜻을 결코 현실화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흡수가 되는 것을 끝없이 경계하면서 연합의 ‘공동의 가치’에 진보적 가치를 이입하는 것에 힘을 써야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만약 진보적 가치가 관철되지 않는 상황에서 연합이 요구된다면 무조건 반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차이’만을 부각시켜 고립을 자처하는 것 또한 반길 수 없습니다. 앞으로 굵직굵직한 선거가 연달아 진행됩니다. 진보가 더 이상 자유우파의 동원 대상이 되지 않으면서도 국민들과 괴리되지 않게끔 함께 고민하여 현명한 걸음을 해야 할 것입니다. 현실이 그럼에도 저는 다시 한 번 기대해 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독서감상] 장하준,『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 세상에! 자유 시장주의의 절대적 우월성이 뻥이었다니!

 

 매번 궁금했던 것이 있었다. 나날이 경제성장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이, 그러니깐 조·중·동이 ‘경제적 무능’을 외치며 그렇게나 까대던 노무현 정부조차도 그 어떤 국가 남부럽지 않은 경제성장률을 달성했었는데도-성장률은 그러거나 말거나, 서민들은 절망의 거리로 내몰리고 있었다. 왜일까? 경제가 성장했다는 말은, 그만큼 국가가 부유해졌다는 말이 아니던가? 

 ‘양극화’라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신자유주의’가 배설한 숭고한 대상이라고 했다. 그러니깐 ‘양극화’자체는 문제라고 할 수 있지만, 대승적으로는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했다. 바야흐로 전지구화 시대였고, 양극화를 해소하기 위해 자본의 자유를 막는 순간 국가는 파산이 된다는 것이었다. IMF 세대인 나에게 그 말은 얼마나 무서운 말이던가! 자본은 의심의 여지없이 너무나 아름답고 숭고한 것이었다. 그렇기에 ‘양극화’는 ‘악’이라기 보단 필수불가결한 것이었다. 

 그러니깐 비정규직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고, 부자감세, 기업감세는 바람직한 것이었으며, 내가 88만원 세대가 되는 것은 그야말로 ‘게을러서 명문대에 가지 못한’, 그러니깐 명문대에 간 친구들이 3시간 10분만의 잠을 자고 문제집에 코피를 젖힐 때 무려 4시간 반이나 쳐 자며 문제집에 침을 흘리던 나의 게으름 탓이었던 것이다. 게으른 루저인 나는 88만원도 감사해야 하고 더 허리띠를 졸라매어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국가대표 기업의 이윤과 경쟁력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받쳐 자발적 착취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자에게, 국가대표 기업에게 더 많은 돈을 몰아주어, 그들의 파이가 더욱더 커져 언젠가 내게도 한 조각이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유일한 길이었다. 21세기는 “안녕하세요, 전지구적 시대입니다” 였고 “어라? 어라? 내 자유를 방해하는 거냐? 나 딴 나라로 가버린다? 친구들한테도 여기 물 안 좋다고 말해줘?”라고 하면 그나마 있는 ‘88만원’조차도 빼앗기기 때문에 “자본님, 죄송합니다. 저의 죄를 용서해주십시오.”라고 하며 연신 굽신굽신’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했다. 이건희 아저씨가 10조를 빼돌려도 우리는 의심 없이 그분을 존경하고 사랑해야 했다. 그분의 호통 앞에 고개를 숙이고 경청하며 죄를 뉘우쳐야 했다. 왜냐하면 그분은 대한민국에서 거의 유일하신 대자본의 사제이시기 때문이다. 

 복지국가 타령을 하는 야당, 특히 민노당과 진보신당은 대한민국을 망국으로 가게 할 주동자들이었다. 숙청해야 할 빨갱이들이었다. 노회찬과 심상정은 감히 삼성(이건희)의 비리를 파헤치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야말로 너무나도 낯뜨거운 신성모독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다가 자본이 다 빠져나가 나라가 망하면 어떻게 하냐는 말이다! 대(大)를 위해 사소한 범죄들(그러니깐 세금을 안내고, 국민들의 보험금을 떼어먹고, 불법상속을 하고, 사법부, 행정부, 집행부의 주요 권력자들에게 돈을 먹이고, 헌법이 보장하는 노조를 만들려는 노동자들을 자르고 광고자본을 가지고 언론 조작을 유도하는 등)은 눈감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던가! 

 나는 경제성장을 했음에도 나와 나의 친구들, 그러니깐 서민들이 불안과 빚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이렇게 들어왔고 배워왔고 믿어왔다. 양극화는 필수불가결한 것이라고, 무한경쟁이 자본주의의 동력 그 자체이라고, 복지는 나라 망하게 하는 짓이라고-소련이나 북한 꼴 나지 않으려면 이를 의심 없이 믿고 맘몬의 신앙을 가져야 했다. 그런데, 그렇게 믿어왔는데, 장하준은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다고 이야기 해왔다. 장하준은 자유 시장 지상주의는 “허상”이라고 단언했다(“자유 시장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 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이다”). 그러니깐 ‘신자유주의’는 ‘양극화’를 대승적으로도 해결할 수 없고, 끊임없이 악화시킬 수밖에 없다고 했다(“아! 나의 파이조각!). 뿐만 아니라 ‘신자유주의’-금융의 무한 자유는 경제성장을 보장하지도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부자들에게 많은 세금을 거두어들여 이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배분하는 큰 정부는 경제 성장에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이야기를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 왔다. 부자들은 부를 창출하려는 의욕을 잃고,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름을 피우고 싶은 유혹이 강해진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작은 정부가 성장에 이롭다면 그런 정부를 가진 상당수의 개발도상국들은 잘 성장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의 경우 거대한 복지 국가와 높은 경제 성장률이 공존하고 있는데(복지 국가가 경제 성장을 촉진했다고 보는 사람도 많다), 이는 작은 정부가 항상 성장에 이롭다는 믿음에 문제가 있음을 잘 드러내 주는 예들이다. 338쪽.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진 것을 보았다. 부자에게 돈을 몰아주는 대표적인 국가인 미국이 가장 먼저 그리고 강하게 휘청였다. 아직도 그 후유증이 심각한 형편이다. 금융 천국이었던 두바이는 그야말로 망했다. 자본이 가장 자유로웠던 국가들이 가장 심각한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은 훨씬 튼튼한 힘을 보여주었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세율과 높은 복지 수준으로 악명(?) 높은 이곳의 국가들이 말이다. 자본의 무한 자유가 심각한 양극화의 원인이고 또 해소도 못해주는 것이라면, 게다가 더 심각하게는 경제 성장도 못시켜주는 것이라면 나는 도무지 이것을 지지할 필요가 없다. 자발적 착취의 대상이 될 필요도 없고, 폭력을 일삼는 자본과 불법을 일삼는 재벌을 숭고한 대상으로 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는 상위 1퍼센트의 부자가 아니며, 지구와 인간들의 파괴를 즐기는 악당 외계인도 아니다. 

 장하준은 “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온 자유 시장주의라는 고삐 풀린 자본주의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서 눈을 떠”라고 요청한다. 그리고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를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정부가 가진 한계와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지금까지 고안된 제도 중에서는 민주주의 정부가 사회적으로 제기되는 여러 상충된 요구들을 조정하고, 더욱 중요하게는 사회 전체적으로 복지 수준을 향상시키는 가장 우수한 장치”라고 단언한다. 따라서 “정부는 풍요롭고 평등하며 안정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데 더 큰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보고 우리가 너무나 많이 듣고 들어서 믿을 수밖에 없게끔 느껴지는 ‘자유 시장주의’의 방법론이 허상임을 알게 되어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금융 위기가 터졌을 때 왜 자본이 자유로운 국가가 더 치명상을 입고, 복지국가가 더 잘 버텼는지에 대한 의문이 다소간 해소되었다. 그것은 ‘자유 시장주의’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서 눈을 뜨기만 하면 아주 당연한 현상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양극화’가 문제임에도 ‘부자에게 돈을 더 몰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거짓말임을 너무나 명백하게 알게 되었다. 말로는 친서민이지만 행동은 한결같은 친부자인 이명박 정부의 집권 시기 때 왜 장하준의 책이 ‘불온서적’으로 낙인 찍혔는지를 알게 되었다. 장하준은 부당하게 부를 축적하고 서민들을 착취하는 자들, 부자 국가들, 기업들의 거짓말을 논증을 통해 증명해냈다. 

 대한민국을 위해, 우리는 방향을 바꿔야 한다. “더 잘 규제된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를 살펴야만 한다. 우리는 오히려 자본을 통제하여 더 역동적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실패한 국가를 쫓는 어리석은 짓을 멈춰야 한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기 위해 유통하는 이데올로기를 부수고, 서민이 잘 사는 행복한 국민의 나라-대한민국이 되기 위해 나가야 한다. 금융과 자본을 투명하게 운영할 수 있게끔 하고, 복지국가를 지향(그러한 정당을 지지하고)하고,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을 비롯한 ‘복지’와 ‘규제’에 강한 국가로부터 배우고, 우리나라에 맞게 변형해서 이식해야 한다. 

 나는 이제 ‘삼성’교에서 받은 세례명을 폐기할 것이고, 빨갱이라고 부르는 자들의 욕설이 아닌, 좌파의 진짜 소리를 들어볼 것이다. 패배주의적이고, 체념적이었던 나와도 안녕을 고하고, 이제는 희망을 가지고 작은 손을 들어 보겠다. 이젠 ‘내가 말해야 하는 23가지’를 위해 노력하겠다. 상위 1퍼센트와 하위 1퍼센트가 절친한 친구가 될 수 있을 그 날을 고대하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진보집권플랜 - 오연호가 묻고 조국이 답하다
조국.오연호 지음 / 오마이북 / 2010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대한민국의 내일을 위해 고민하신다면 이 책은 정말 필독서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파이더맨 2 - Spider-Man2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감상] 스파이더맨2
- 우연한 사태의 발발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 그리고 갱신. 

 

 어떠한 사태가 발발했을 때 그것이 사후적으로 주체에게 긍정적으로 다가온다면, 사태의 전적인 우연성은 필연성으로 둔갑한다. 바디유는 사랑을 예로 들어 이러한 둔갑을 설명한다. 사랑은 자유롭게 떠돌던 각각의 남녀가 전적으로 우연한 만남의 계기로 발생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지는 연인은 자유롭게 서로를 선택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필연적 만남으로 둔갑된다. 그래서 서로의 사랑을 가능하게 했던 선택의 자유는 소실된다. 결국 그들은 자신들의 만남이 전적인 우연에 의해, 그리고 서로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해 이루어 진 것임을 스스로 잊어버린다. 우리는 그동안 자신들의 사랑을 운명이라고 여겨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들의 시절인연이 끝나는 날이 오면, 자유에의 욕망은 다시 복권된다. 

 스파이더맨은 전적으로 우연에 의해 탄생했다. 소심하고 심지어는 왕따 학생이었던 피터 파커는 실험실에서 짝사랑을 쳐다보고 있다가 거미에게 손등을 물렸다. 그리고 그는 스파이더맨이 됐다. 스파이더맨이 된 그는 자신의 영웅적 사명을 가지고 도시의 평화를 위해 한 몸 바친다. 그러니까 전편인 <스파이더맨>의 마지막 순간에서부터 2년 동안 주구장창 영웅 노릇을 해왔다. 하지만 그의 삶은 도시가 얻게 된 평화와는 상반된 길을 걸어왔다. 도시 안에서의 사건·사고에 신경을 쓰느라 아르바이트에서는 번번이 쫓겨나고, 학교 수업도 제때 맞춰가기 힘들다. 그 뿐이랴, 사랑하는 여자의 공연에도 가질 못하는 지경이다. 

 그러다보니 영웅으로서의 자신에 대한 회의를 갖게 된다. 영웅으로서의 정체성에 혼란이 온 것이다. 그는 거미옷을 쓰레기통에 쳐 넣어 버린다. 그리고 그의 손목은 더 이상 거미줄을 제공하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선택이 피폐해진 그의 삶을 복원시킬 수 있는 것일까? 아니다. 그러지 못했다. 그는 결국 다시 거미옷을 집어 든다.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금 확보한 그의 손목은 거미줄을 다시 생성해 낸다. 그런데 이러한 정체성의 혼란은 영웅만의 특별한 고뇌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자신의 소명과 신념을 갖는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삶의 짐이 그러한 소명과 신념을 끊임없이 회의의 유혹으로 이끈다.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게 되면, 이 시대의 속도감에 속수무책이 되어 ‘나의 의지와는 무관한 것 같은 나의 삶’이 굴러가게 된다. 피터 파커는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깨닫고, 그 일에 대한 가치를 인식하는 순간, 거미의 능력을 되찾고 날아오르게 되었다. 

 <스파이더맨2>의 적은 피터 파커가 존경하는 과학자였다. 옥토퍼스 박사는 원래 악이 아니었다. 그는 존경 받을 만한 훌륭한 과학자였다. 따뜻한 감성을 지니고 있었고 비범한 지성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과학적 성취를 맹신하는 바람에 사랑하는 아내를 잃게 되었고, 스스로의 존재가치를 지속하기 위해 악에게 항복하고 괴물이 되었다. 피터 파커는 자신이 특별히 존경했던 사람을 적으로 삼아야만 했고, 싸워야만 했다. 통제되지 못한 인간의 욕망은 존경의 대상에서 괴물로 순식간에 전이되게 만들었다. 그런데 천재 물리학자이자 낭만적인 가장인 옥토퍼스는 역시 천재성을 갖춘 과학도이자 헌신적인 연인인 피터 파커와 겹쳐진다. 우연에 의해 영웅이 된 피터 파커와 우연에 의해 아내를 잃은 옥토퍼스는 명백한 선과 악의 극단에서 싸움을 벌이지만, 한편으로는 또 다른 자신의 가능성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피터 파커와의 싸움 끝에 옥토퍼스는 결국 참회에 이르게 된다. 옥토퍼스는 도시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이 탄생시킨 거대한 인류 진보의 가능성이자 오판의 결정체였던 에너지와 구조물을 끌어안고 스스로 수장되는 길을 선택한다. 그는 자신의 맹신에서 비롯된 심각한 오판을 인정하고 정체성의 혼란에서 벗어났을 때, 따뜻한 감성과 비범한 지성의 그로 돌아올 수 있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 그러니까 <스파이더맨2>에서 정체성의 재구현을 시행하는 대상은 피터 파커와 옥토퍼스 뿐만이 아니었다. 바로 옥토퍼스와 피터 파커의 싸움에 휘말리게 된 시민들이 그 대상이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서 고군분투 하다가 혼절한 스파이더맨을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가만히 바닥에 눕힌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이 거미 영웅이 자신들의 아들, 딸보다도 어리고, 평범한 소년임을 알게 된다. 그들은 영웅에게 일방적으로 무언가를 요구했던 자신들을 되돌아보며 부끄러워하고 미안함을 가진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영웅의 일에 전적으로 끼어들 수는 없다. 그들의 손목에서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중은 영웅의 영웅적 활약을 폭력적으로 부추긴다. 하지만 그럼에도 시민들은 영웅의 소명과 신념에 동력을 준다. 그리고 그 동력은 이해를 통한 지속가능성의 갱신이다. 

 바디유는 우연에서 비롯된 사태의 발발이 제공하는 정체성의 혼란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사랑에 빗대어 설명했다. 그는 우연의 상황에서 주체의 자유적 선택이 사건을 의미화하며 정체성의 갱신을 구축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스파이더맨2>에서도 이러한 우연과 정체성의 혼란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그 혼란의 끝에 갱신에 이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사실상 삶에서 우연은 계속적으로 발생하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우연적 사태로 인한 정체성의 혼란도 계속된다. 결국 자신의 소명과 신념에의 의지가 자유로운 선택의 척도가 되어 갱신을 유도한다. 물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소명과 신념 또한 재구축된다. 

 <스파이더맨2>가 정체성의 매끈한 정립을 구현하며 끝나는 듯 보이지만, <스파이더맨3>에서 더욱 천착되는 분열적 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삶의 지속과 정체성의 흔들림은 함께 가는 것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우리도 되돌아보면 끊임없이 변화해오고 갱신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소명과 신념의 폐기는 손목에서 더 이상 거미줄이 생성되지 못하게 하는 자신의 파괴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소명과 신념의 폐기는 정체성의 재구축을 실패로 만든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유의해야 하는 것은 우연한 사태로 인한 정체성의 흔들림을 인정하고 똑바로 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행위에서 재구축이 시작된다. 피터 파커와 옥토퍼스는 그렇게 재구축되었다. 그리고 우리도 지금껏 그렇게 재구축되어 왔다. “더 이상 변하기 싫지만, 머물 수가 없어”(아이들의 눈으로)라고 서태지는 노래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소명과 신념(변하기 싫은 가치관)을 간직한 채, 어떻게 변화(갱신)해 나갈 것인가가 아닌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