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크 아웃을 하기 전, 그 남자는 잠시 밖으로 나왔다.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여행에 지쳐서였는지 지난밤은 잠도 잘 잤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을 누르던 외로움에서 조금 벗어난 느낌도 있었다. 그남자는 꿈 때문이라고 믿고 싶었다. 한국과 달리 인도에서는 'coffee house'라고 쓴 곳에서 몇 가지 메뉴의 음식을 팔기도 했다. 그 남자는 인도식 브렉퍼스트 메뉴인 '푸리'를 시켰다. 여행을 오기 전 가이드 북에서 추천해준 몇 몇 음식 중 꼭 먹어봐야겠다고 생각했던 메뉴여서이기도 했다. 푸리는 감자에 향신료를 넣어 볶은 것에 동글 납작한 반죽을 튀겨낸 빵과 함께 먹는데 잠을 잘자고 일어난 그에게는 꿀맛이었다. 식사가 끝난 후 커피 하우스를 나오기 전, 그 남자는 다이어리를 열어 앞으로의 일정들을 보았다. 이제는 이곳 데라둔에서 델리까지, 또 델리에서 봄베이까지, 그리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위한 일정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조금은 긴 여정일 수 있으나 그는 또다시 기대에 부풀었다.
그 여자는 탑승한 내내 잠을 잤다. 승무원이 몇 번 음료를 권했으나 그저 사양했다. 어떻게 해서든 아픈 걸 이겨야 해... 그 여자의 머릿 속에는 오로지 여행일정만 들어차 있을 뿐이었다. 그 여자는 수많은 밤을 편의점에서 보내면서, 그 시간동안 일하고 책 읽고 돈을 벌다가 6개월에 한 번 여행을 나오면 그 때마다 자신이 원하던 꿈을 이루는 거라고 여겼다. 그 여자에게도 10년 후, 20년 후의 꿈이 있었지만 아직 젊을 때, 모든 자기 또래의 여자들이 빨리 이루려고 하는 것들을 조금 느리게 이뤄가고 싶었다. 고등학교 때 읽었던 '독서불패' 중 가장 좋은 공부는 '독학'이며, 그 이후에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이라고 했던 퇴계 이황의 말처럼, 그녀는 과정이 아닌 스스로 공부할 수 있는 길을 택했다. 부모님 도움을 받고 평범한 대학생이 되서 살기보다는 20살 이후에는 자기 힘으로 살아야겠다고도 결심했다. 독서에 힘을 쏟고 여행을 통해 경험한 바를 토대로 좋은 글도 쓸 수 있을 거라고 늘 생각했다. 그런 그녀의 현재 인생에 누구를 사귄다거나 하는 계획은 없었다. 그동안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여자가 용기를 내기도 전에 그들은 다른 사람 옆을 채우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 짝사랑으로만 끝나버렸다. 피로가 풀려가는 느낌이 들자 눈을 떴다. 몸도 어느 정도 나은 것 같았다. 목이 탔다. 화장실도 가고 싶어졌다. 그 여자는 잠시 벨트를 풀고 일어났다.
델리까지는 버스로 이동을 했다. 워낙 외국인 관광객이 많은 곳이라 그들을 통해 버스를 탈 수 있는 곳도 알았다. 100루피면 싸게 갈 수 있는 버스가 있었지만 돌아가는 길에도 고생을 하고 싶지는 않아 조금 비싼 버스를 탔다. 그 남자는 사실 몰랐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기 전, '어떤 바람'이 그의 색을 바꿔놓을 줄을...
그 여자는 기내식을 나온 것을 모두 먹고 곁들여 나온 간식거리나 고추장은 따로 챙겨두었다. 앞좌석에 있던 중년 아저씨들이 고추장을 더 달라고 승무원에게 떼를 쓰는 것을 보고 웃겨 죽는다고 웃었다. 편의점에 있으면 가끔 중년 아저씨들이 와서 라면에 물을 부어 달라는 둥, 도시락을 데워 달라는 둥의 주문을 한다. 지금 저 승무원이 당하는 일도 자신의 입장과 비슷하다 여겼기 때문이다. 물론 안쓰럽기도 했지만 그 승무원이 여전히 그를 배려하는 모습을 보고 저건 배워야겠구나 싶었다. 음식이 좀 들어가고 잠도 충분히 자서였는지 몸도 많이 나아졌다. 이제 얼마 후면 봄베이 공항에 도착할 터였다.
델리 공항에 도착한 그 남자는 공항 내 점포에서 기념품등을 사기로 했다. 어머니를 위해서는 독특한 모양의 목걸이을 골랐고, 아버지께 드릴 것으로는 코끼리가 박힌 넥타이와 연꽃 무늬핀을 샀다. 형과 자신, 남동생 삼형제를 위해 마직류의 인도식 셔츠를 집어들었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계산대 옆에 진열된 반지들이 눈에 들어왔다. 하얗게 빛을 발하는 은가락지들이... 그 남자는 은 가락지 두개를 집어들었다. 봄베이로 가는 내내 그 남자는 자신의 손에 낀 그 은가락지두개를 만지작 거렸다.
봄베이에 도착한 그 여자의 코에 커리 냄새가 휘돌았다. 와~ 내가 인도에 오긴 왔구나. 그 여자는 주위를 둘러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온통 까만 사람들이었고,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강한 후추향을 느꼈다. "꼬레아?" 여권을 보고 그 여자를 보며 도장을 찍어주는 그를 보고 여자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도무지 못 알아듣겠는 발음이다. 짐을 찾아서 그녀는 공항 내에 카페에 잠깐 앉았다. 서두르는 중에 일정을 진행하면 결과가 좋지 않다는 걸 몇 번의 여행을 거쳐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잠시 잠깐 숨을 돌리기로 했다. 인도식 커피는 우유향이 풍부하고 단맛이 강해 커피라기 보다는 커피우유에 가까웠다. 다이어리를 보고 그 여자는 택시부스에서 먼저 요금을 지불하고 지정한 택시를 타야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 여자는 커피를 마시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비수기는 비수긴가 보네. 우리 나라 사람처럼 보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구만' 그 여자는 다시 다이어리로 눈길을 돌려버렸다. 바로 그 즈음, 그 남자가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그 남자의 눈에 자그마한 동양 여자가 눈에 띄었다. '어느 나라 사람이지?' 그 남자는 카운터에서 커피를 시켰다. 인도카페는 한국만큼 다양한 커피메뉴를 갖고 있지는 않는듯 했다.
그 여자는 비어있는 줄 모르고 컵을 들다가 안을 보고 내려놓았다. 기지개를 켜던 그녀의 눈에 산악용 베낭을 멘 어떤 남자의 뒷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국 사람? 설마...' 그를 잠시 보던 그 여자는 자기의 베낭을 메고 일어났다.
컵을 받아들고 돌아서는 그 남자의 눈에 아까의 그 여자가 자기 베낭을 메고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여자는 모르겠지만 그 여자가 앉았던 자리가 괜찮은 듯 해 그곳으로 갔다. 자리에 앉던 그 남자는 의자 밑에 떨어진 책갈피 하나를 발견한다. 구슬이 박힌 독특한 모양의 스트랩이 달린 손수 만든 듯 보이는 것이었다. 스트랩 끝에는 작은 하트 모양 자물통과 열쇠가 달려있었고. 책갈피 앞면에는 초록색 풀섶에 별처럼 박힌 듯한 들국화 사진이 있었다. 그리고 뒤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나비는 아름다운 날개로 날아다니면서 땅과 하늘을 연결시켜 주지. 나비는 꽃에서 꿀만 빨아마시고 이 꽃에서 저 꽃으로 사랑의 씨앗을 날라다 준단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죠?-날기를 간절히 원해야 돼.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꽃들에게 희망을 중)' 간절히...나비가 되고 싶다...'
그 남자는 다시 들국화가 있는 사진을 보였다. 그 국화 속에 아까는 보이지 않던 나비가 보였다. 그리고...바람을 타고 국화향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