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하나는 비어 있었다. 아침에도 비어 있었고, 점심 밥을 먹을 때도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나눠먹을 때도 그 자리에는 선뜻 가서 앉지 못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지만, 그 자리는 끝까지 비어 있었다. 담임 선생님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영부영 종례도 끝났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는 대로 청소도 하지 않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그 누구도 청소당번인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지 않았다. 외려... 누군가가 어린 민영 근처로 가려고 하면 막았다. 교실에는 이제 민영 혼자 남았다. 민영은 그제야 일어났다. 가방을 뒤져서 꽃 한 송이를 꺼냈다. 하루종일 민영의 가방 속에 있어서 거의 시들어있었지만, 민영은 그 꽃을 들고 그 하루종일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그 꽃을 얹어 두었다.
'네가 좋아하는....'
민영의 눈이 눈물로 가득찼다.
'장미 꽃이야... 새빨간 장미꽃....'
민영은 소리내서 울었다. 가슴이 아파서 두 손으로 가슴을 꼭 쥐고, 그렇게 울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민영의 울음 소리만 크게 울렸다.
연습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수현은 가끔 집에 갔지만, 그 때의 만남 이후로 민영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민영이 물을 주던 화분은 잘 크고 있었다. 집에 들를 때마다 수현은 그 화분이 제법 자라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민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커피가 일상이 되었지만, 국화 차가 없는 하루하루는 뭔가 빠진 듯 이상했다. 덩달아 민영이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요즘 좀 야위는 것 같아."
연습에 지쳐 벽에 기대있는 그에게 시현이 커피 컵을 건넸다.
"밥은 제 때 먹으면서 하는거야?"
시현에 대해 감정이 정리 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날마다 얼굴 봐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냥 하는 거지 뭐... 그냥..."
수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기댄 채로 눈을 감는다.
"수현씨..."
수현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응'이라고 답한다.
"생각... 해봤어?"
수현은 그제야 눈을 뜨고 시현을 바라본다. 수현은 시현이 자신에게 오겠다고 했던 그 때 답을 하지 못했다. 시현은 답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 말에도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만큼 시현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그 긴 시간이 수현에게는 시현에 대한 미련으로 작용했는지 수현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앙금이 가신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랑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으니까.
수현은 다시 말이 없다.
"여전히... 기다려야 하는거야?"
시현의 물음에도 수현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럼, 수현씨 마음 정해지는 대로 내게 말해줘.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고. 음... 수현씨 콘서트 후에 말해주는 건 어때?"
수현은 또 말이 없었고, 시현은 애써 웃음 지으며 수현에게 인사하고 연습실을 나갔다. 수현은 시현이 나간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현에게는 그녀만이 남길 수 있는 향기가 있었다. 수현은 언제나 그 향기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입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리라. 수현은 일어났다. 무심결에 주머니에 손을 넣던 수현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든 그는 휴대폰 고리만 남아있는 걸 발견했다.
'아...그 부엉이...'
수현은 연습실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찾았다. 민영이 사다 준 부엉이 핸드폰 고리가 정말 고리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진 듯 했다. 연습실 안에는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휴지통 근처에 눈에 익은 것이 들어왔다. 몇 번 밟히고 채였는지 때가 묻고 옆구리 쪽이 터져서 솜이 좀 삐져나온 부엉이가 바로 거기 있었다.
'하아... 너 거기 있었구나...'
수현은 부엉이에게 묻은 먼지를 이리저리 털어냈다. 그러나 터진 부분 만큼은 보수가 힘들었다. 수현은 또 멍하니 자기 손 안의 부엉이만 내려다 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정말 도시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노을이었다. 수현은 가만히 그 노을만 바라보다가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았다. 민영이 바삐 걸어오면서도 수현에게 인사했다.
뛰어왔는지 민영은 잠시 앉아서 숨을 내리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바늘하고 실은 왜요? 혹시 체했어요?"
가방에서 반짇고리를 꺼내며 민영이 연달아 묻는다.
"잘 지냈어?"
그런 그녀에게 수현이 웃으며 묻는다.
"네? 아... 네... 그런데 이건 왜?.."
수현은 실을 넣은 바늘을 빼서 들어보이는 민영만 물끄러미 보고 미소 짓는다. 민영의 얼굴이 또 발그레해진다.
"이거..."
수현은 그제야 부엉이를 내민다.
"이게... 뭐요?"
민영이 수현에게서 부엉이를 받아든다.
"옆구리 터졌잖아. 꿰매달라고."
민영은 부엉이와 수현을 번갈아 보다 웃음을 터뜨린다.
"지금 저더러 이거 꿰매라고 부르신 거예요?"
수현이 댓구 없이 웃자, 민영도 다시 웃어버린다.
"이게... 왜 이렇게 됐어요?... 밟았죠?"
민영이가 눈을 흘기자, 수현은 아니라고 하며 그저 웃는다. 민영은 처음 받을 때만큼 이쁘게 되지는 않을 거라며 부엉이 옆구리를 꿰맨다. 노을이 조금씩 지더니 주변이 조금 어두워진 듯 했다. 수현은 휴대폰 라이트를 켜서 잘 보이도록 민영의 손 근처에 비춰준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씩 켜졌다.
"...자, 이제 됐어요."
민영은 수현의 손에서 휴대폰을 받아들더니 직접 고리에 끼워주기까지 한다.
"또 떨궈서 밟으시면 안돼요."
민영의 미소에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 했다. 수현은 휴대폰을 받아들고 주머니에 있던 것을 꺼낸다.
"자, 내 콘서트 티켓."
민영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와~. 정말 콘서트 하시는 거예요?"
"..꼭 와."
민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자신의 콘서트 티켓을 자세히 뜯어보는 민영의 얼굴 옆으로 머리카락이 한 가닥 흘러내렸다.수현은 무심결에 그 머리카락을 쓸어서 귀 뒤로 넘겨주었다. 민영의 표정이 얼었다. 볼이 또 발그레해지는 것을 느낀다. 일순간, 어색한 기분이 든다.
"....차 한잔... 마실래?"
그 어색함을 깨고 수현이 묻는다. 민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아니요. 이제 가봐야죠."
민영이 표를 가방에 챙겨넣더니 일어난다.
"또 무슨 일 있으면 전화주세요.그리고 콘서트에서 꼭 뵐께요."
수현도 고개를 끄덕인다. 민영은 그렇게 발걸음을 돌린다. 몇 걸음 가다 돌아보고 또 인사한다.
수현은 그렇게 멀어지는 민영을 바라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