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전,어린 민영의 이야기.

 

 민영은 수업 시간에 필기를 하는 내내 옆의 재은을 지켜보았다. 재은은 많이 피곤해 보였고, 옆 얼굴로도 알아볼 수 있을만큼 부어 있었다.

 "괜찮아?"

 쉬는 시간에 바나나 우유를 사서 재은에게 건네며 민영이 묻자, 재은은 말없이 웃으며 안대를 들어보인다. 눈 주변이 자줏빛이다.

 "그게 빨리 나아야 할 텐데..."

 둘은 말없이 바나나 우유만 마신다.

 "나... 그런 생각 가끔 해..."

 재은의 말에 민영이 고개를 든다.

 "난 15살인데... 15살 밖에 안됬는데... 15살 짜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게 힘들것 같으면... 더 살아도 힘들기만 한 건 아닐까..."

 민영은 순간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꿀꺽 삼켜버린다. 재은은 말을 잇는다.

 "그냥... 죽으면... 죽으면...끝나지 않을까..."

 민영은 얼른 고개를 돌리고 눈물을 닦는다. 그리고 애써 목소리 톤을 높인다.

"야! 네 말대로 너 아직 15살 밖에 안됬어. 우리 아직 60년도 더 살 수  있다고. 지금이야 우리 어려서 이렇게 밖에 못 사는 거라지만, 조금 있으면 다 괜찮아 질거야. 세상? 살기 나름 아니야? 너한테는 내가 있고, 나한테는 네가 있잖아. 힘을 내서 살면, 다 괜찮을 거야, 그치?"

 민영의 얼굴을 보는 재은의 얼굴 빛에 그제야 미소가 떠오른다. 민영은 재은의 손을 잡아준다. 또 눈물이 흐르는 걸, 두 사람은 고개를 돌려 모르는 척 한다.

 그렇게 쉬는 시간이 끝나고 교실로 돌아왔다.

 "야, 야, 너 소식 들었냐?"

 자리에 앉자마자, 앞 자리에 앉은 친구가 재은에게 소식을 전한다.

 "윤 서준 오빠, 자살 했대."

 민영과 재은은 충격을 받는다.

 "왜?"

 "모르지... 어쨌든 충격 아니야? 어떻게 해...서준 오빠..."

 반 아이들만 아니라 학교 전체가 술렁이는 듯 했다. 민영은 그대로 못 박힌 듯 앉아있는 재은의 모습에 안절부절했다. 매 교시 때마다 오시는 선생님들은, 학생이 공부는 안 하고 한낱 연예인 하나 자살한 거에  마음을 쏟는다고 호통을 치셨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재은은 민영에게 말도 없이 혼자서 학교를 빠져나갔다.

 

 재은의 집으로 몇 번이나 전화를 걸었지만, 민영은 친구와 통화할 수 없었다. 아니 재은의 식구 그 누구와도 통화가 되지 않았다. 민영은 자꾸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그제서야, 민영은 재은이 살고 있는 정확한 집 주소조차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 스스로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죽으면...끝나지 않을까...'

 오전에 학교에서 했던 재은의 말이 귓전을 맴맴 도는 듯 했다. 그 밤은 너무 길었다.

 '하나님...제발... 아무 일 없게 해 주세요... 제발...'

 민영은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그렇게 보내야 하는 그 밤이 너무 길었다.

 

 잠을 설치고, 그나마도 아침 일찍 일어난 민영은 바나나 우유를 사들고 학교로 들어섰다. 아직 아이들은 오지 않았다. 민영은 교실 불을 키고 자기 자리에 앉았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민영아!"

 재은이였다.

 "어, 뭐야? 너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재은은 그냥 까르르 웃기부터 한다.

 "당연히 친구 보려고 일찍 왔지."

 친구의 얼굴은 무언가 달라 보인다.

 "어? 이거 나 주려고 산 거야?"

 재은은 바나나 우유를 보더니 따서 한 입에 다 마신다.

"천천히 마셔. 그러다 체해."

 그러나 재은은 아무 일 없이 한 입에 다 마셔버렸다.

 "후아~. 살 것 같다."

 재은은 미소 띤 얼굴로 민영을 본다. 민영은 재은의 눈에 눈물이 맺힌 걸 그제야 본다.

 "민영아... 앞으로... 더 행복해야 해... 알았지?"

 민영은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재은은 말없이 민영을 와락 껴안아주더니 일어나서 나가버린다.

 "재은아!어디가? 재은아!"

 

 꿈이었다. 현실 같은 꿈이었다.

 "민영아..."

 주변에서 아이들이 민영이에게 다가왔다.

 "민영아... 어떻게 해..."

 아이들 중 몇은 그의 곁에서 훌쩍훌쩍 울었다.

 "왜? 왜 그러는 건데?"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민영아... 재은이 죽었대..."

 눈 앞이 하얘졌다. 그렇게 민영은 정신을 잃었다.

 

 재은은 이틀 후 화장을 했다. 납골당에 안치될 때까지 민영은 재은의 가족과 함께 있었다. 그 뒤 어떻게 하루 하루를 보냈는지 몰랐다. 그 주말에, 민영은 바나나 우유 두 개를 사들고 학교 뒤 언덕으로 올라갔다. 점심 먹고 재은과 날 따습고 심심하면 오르던 언덕이었다.

 "...그래... 너 주려고 샀다...."

 민영은 바나나 우유 한 개를 따서 벤치 옆에 두었다.

 "먹어... 이 기집애야... "

 또 하나를 딴다.

"음... 맛있네... 음... 맛있어..."

 눈물이 나서 손으로 눈을 훔친다. 민영은 마시고 마시고 또 마셨다.

 "... 가니까 좋냐?... 그렇게 윤서준, 윤서준 하더니... 이렇게 가니까 좋아?...."

 민영은 옆자리에 놓아둔 바나나 우유까지 들어서 또 마신다.

 "기집애... 죽으면 끝이냐고?... 뭐가 끝이야...남아있는 나는 어떡하라고?... 어떡하라고?... 너 나뻐..."

 민영의 흐느낌은 이제 통곡이 된다. 가슴이 아파 가슴을 쥐어뜯는다.

"...허어엉...재은아...허엉...미안해...내가 못 도와줘서...미안해...미안해....허어엉...."

 

그 해, 민영은 학교를 그만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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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날, 모두 다 정신이 없었다. 그들이 본 그의 얼굴은 핏기 하나 없는 새하얀 얼굴이었다. 그는 땅이 꺼지는 듯 주저 앉아서 자신의 눈 앞에서 벌어지는 모든 현실을 믿을 수 없어했다.

  "서...서준아..."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그의 손을 잡았다. 자기 손보다 작고 손끝도 몽톡한데 피아노는 왜 그리 잘 치냐고 놀렸더랬다. 아니 아니, 처음 만나서 악수를 청하는 그의 손을 쥐던 그의 손은 땀에 젖어 끈적끈적했었다. 그런데 그 손은 메말라 있었다.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서준아..."

 그가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사후 경직이 풀리면서 쥐고 있던 손이 느슨해졌다. 그 손안에는 하얀 알약과 색색의 종이별이 함께 쥐어져 있었다.

 

 콘서트는 성황리에 끝났다. 수현은 자신의 콘서트에 최선을 다했다. 무엇보다 관객들은  10년 전 죽은 윤서준이 불렀던 곡과 함께 얼마 전 그를 추모하며 만든 곡에 애정어린 호응을 보냈다. 수현은

콘서트 후에 몇 몇 기자로부터 인터뷰 요청을 받았고, 관객들과도 사진 촬영과 싸인을 해주느라 바빴다. 그러나 그의 눈은 콘서트 시작 전부터 민영을 찾느라 더욱 분주했다.

 "축하해. 오늘 콘서트 굉장했어."

 콘서트장이 조금 한산해지자, 시현이 꽃다발을 수현에게 건넸다.

 "어...고마워..."

 지훈이 무언가 말하려고 왔다가 그냥 뒤돌아 간다.

 "저녁 먹어야지. 정리되는대로 스텝들 오라고 하고 우리는 먼저 가 있을까?"

 시현의 말에 수현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야. 난 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

 계속 주변을 두리번 거리던 그는 시현에게 먼저 가 있으라고 말하고 콘서트 장 입구로 내려간다.

 

 위엣쪽 관객석에서 민영은 그 모든 상황을 지켜본다. 직감적으로 수현이 자기를 찾는다는 걸 알았지만, 민영은 그를 보러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정 수현 씨.... 이제... 행복하세요?....'

 민영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린다.

'이젠... 아파하지 말고... 행복해지세요...안녕...'

 

 여기저기 돌아보았지만, 민영의 흔적은 없었다. 수현은 마음 한 구석이 허해진 기분이 들었다.

콘서트를 끝낸 허무감이 우울함으로 밀려오기 전에 수현은 민영의 미소가 다시 보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의 콘서트에 오지 않았을 거라는 추호의 의심도 하고 싶지 않았다.

'어디 있는거야... 주 민영... 어디 있어?'

 "정 수현씨?" 

 뒤를 돌아보자 스텝 명찰을 건 남자가 꽃 다발을 들고 서 있었다.

 "어떤 여자 분이 이 걸 전해 달라시던데요."

 빨간 주름 종이로 감싼 노란 후리지아 한 다발이었다. 그 남자 스텝은 꽃다발을 건넨 뒤 돌아선다.

 "잠깐만요!"

 수현이 그를 불러 세운다.

 "이 꽃 다발 준 사람, 어디로 갔어요?"

 남자 스텝은 잘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수현은 그가 민영을 만났던 그 곳으로 뛰어가 본다. 그러나 그녀의 흔적은 없다.

 '..민영아...'

 그녀는 콘서트에 왔었다. 그리고 지금...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렇게 꽃만 남기고 가버렸다.

 '...민영아...'

 다시는 그녀를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직감한 그 순간, 수현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흘렀다. 아무 이유가 없는 듯 보였다. 그러나 수현의 눈물은 그렇게 멈추지 않았다. 10년 전 시현과의 이별 후 다시는 그럴 일 없을 것 같던 그의 가슴에,  또 한 번 찬 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듯한 느낌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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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상 하나는 비어 있었다. 아침에도 비어 있었고, 점심 밥을 먹을 때도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함께 도시락을 나눠먹을 때도 그 자리에는 선뜻 가서 앉지 못했다. 그렇게 수업이 끝났지만, 그 자리는 끝까지 비어 있었다. 담임 선생님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고 어영부영 종례도 끝났다.

 아이들은 수업이 끝나는 대로 청소도 하지 않고 교실을 나가버렸다. 그 누구도 청소당번인 아이들에게 핀잔을 주지 않았다. 외려... 누군가가 어린 민영 근처로 가려고 하면 막았다. 교실에는 이제 민영 혼자 남았다. 민영은 그제야 일어났다. 가방을 뒤져서 꽃 한 송이를 꺼냈다. 하루종일 민영의 가방 속에 있어서 거의 시들어있었지만, 민영은 그 꽃을 들고 그 하루종일 빈 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책상 위에 그 꽃을 얹어 두었다.

 '네가 좋아하는....'

 민영의 눈이 눈물로 가득찼다.

 '장미 꽃이야... 새빨간 장미꽃....'

 민영은 소리내서 울었다. 가슴이 아파서 두 손으로 가슴을 꼭 쥐고, 그렇게 울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 민영의 울음 소리만 크게 울렸다.

 

연습은 막바지로 접어들었다. 수현은 가끔 집에 갔지만, 그 때의 만남 이후로 민영을 다시 보지는 못했다. 민영이 물을 주던 화분은 잘 크고 있었다. 집에 들를 때마다 수현은 그 화분이 제법 자라고 있다는 것을 가늠할 수 있었다. 민영의 말은 사실이었다. 커피가 일상이 되었지만, 국화 차가 없는 하루하루는 뭔가 빠진 듯 이상했다. 덩달아 민영이 보고 싶을 때도 있었다.

 "요즘 좀 야위는 것 같아."

 연습에 지쳐 벽에 기대있는 그에게 시현이 커피 컵을 건넸다.

 "밥은 제 때 먹으면서 하는거야?"

 시현에 대해 감정이 정리 된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은 날마다 얼굴 봐도 불편하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그냥 하는 거지 뭐... 그냥..."

수현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다시 기댄 채로 눈을 감는다.

 "수현씨..."

 수현은 눈도 뜨지 않은 채 '응'이라고 답한다.

 "생각... 해봤어?"

 수현은 그제야 눈을 뜨고 시현을 바라본다. 수현은 시현이 자신에게 오겠다고 했던 그 때 답을 하지 못했다. 시현은 답이 없다는 걸 생각해 보겠다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되겠느냐고 물었고, 그 말에도 수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예전만큼 시현을 사랑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잊을 수 없었던 그 긴 시간이 수현에게는 시현에 대한 미련으로 작용했는지 수현의 마음은 흔들리고 있었다. 앙금이 가신 건 물론 아니었지만, 그래도 사랑했던 시간이 너무 길었으니까.

 수현은 다시 말이 없다.

 "여전히... 기다려야 하는거야?"

 시현의 물음에도 수현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럼, 수현씨 마음 정해지는 대로 내게 말해줘.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말고. 음... 수현씨 콘서트 후에 말해주는 건 어때?"

 수현은 또 말이 없었고, 시현은 애써 웃음 지으며 수현에게 인사하고 연습실을 나갔다. 수현은 시현이 나간 문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시현에게는 그녀만이 남길 수 있는 향기가 있었다. 수현은 언제나 그 향기에 취해 있었다. 그래서 입도 떨어지지 않았던 것이리라. 수현은 일어났다. 무심결에 주머니에 손을 넣던 수현은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았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든 그는 휴대폰 고리만 남아있는 걸 발견했다.

 '아...그 부엉이...'

 수현은 연습실 구석구석을 이리저리 찾았다. 민영이 사다 준 부엉이 핸드폰 고리가 정말 고리만 남긴 채 어디론가 사라진 듯 했다. 연습실 안에는 없었다. 문을 열고 나오자 휴지통 근처에 눈에 익은 것이 들어왔다. 몇 번 밟히고 채였는지 때가 묻고 옆구리 쪽이 터져서 솜이 좀 삐져나온 부엉이가 바로 거기 있었다.

 '하아... 너 거기 있었구나...'

수현은 부엉이에게 묻은 먼지를 이리저리 털어냈다. 그러나 터진 부분 만큼은 보수가 힘들었다. 수현은 또 멍하니 자기 손 안의 부엉이만 내려다 보았다.

 

 노을이 지고 있었다. 정말 도시에서는 오랜만에 보는 노을이었다. 수현은 가만히 그 노을만 바라보다가 인기척에 옆을 돌아보았다. 민영이 바삐 걸어오면서도 수현에게 인사했다. 

 뛰어왔는지 민영은 잠시 앉아서 숨을 내리쉬었다.

 "무슨 일이에요? 바늘하고 실은 왜요? 혹시 체했어요?"

 가방에서 반짇고리를 꺼내며 민영이 연달아 묻는다.

 "잘 지냈어?"

 그런 그녀에게 수현이 웃으며 묻는다.

 "네? 아... 네... 그런데 이건 왜?.."

 수현은 실을 넣은 바늘을 빼서 들어보이는 민영만 물끄러미 보고 미소 짓는다. 민영의 얼굴이 또 발그레해진다.

 "이거..."

 수현은 그제야 부엉이를 내민다.

 "이게... 뭐요?"

 민영이 수현에게서 부엉이를 받아든다.

 "옆구리 터졌잖아. 꿰매달라고."

 민영은 부엉이와 수현을 번갈아 보다 웃음을 터뜨린다.

 "지금 저더러 이거 꿰매라고 부르신 거예요?"

 수현이 댓구 없이 웃자, 민영도 다시 웃어버린다.

 "이게... 왜 이렇게 됐어요?... 밟았죠?"

 민영이가 눈을 흘기자, 수현은 아니라고 하며 그저 웃는다. 민영은 처음 받을 때만큼 이쁘게 되지는 않을 거라며 부엉이 옆구리를 꿰맨다. 노을이 조금씩 지더니 주변이 조금 어두워진 듯 했다. 수현은 휴대폰 라이트를 켜서 잘 보이도록 민영의 손 근처에 비춰준다. 가로등 불빛이 하나 둘 씩 켜졌다.

 "...자, 이제 됐어요."

민영은 수현의 손에서 휴대폰을 받아들더니 직접 고리에 끼워주기까지 한다.

 "또 떨궈서 밟으시면 안돼요."

민영의 미소에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 했다. 수현은 휴대폰을 받아들고 주머니에 있던 것을 꺼낸다.

 "자, 내 콘서트 티켓."

 민영의 얼굴에 화색이 돈다.

 "와~. 정말 콘서트 하시는 거예요?"

 "..꼭 와."

 민영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인다. 자신의 콘서트 티켓을 자세히 뜯어보는 민영의 얼굴 옆으로 머리카락이 한 가닥 흘러내렸다.수현은 무심결에 그 머리카락을 쓸어서 귀 뒤로 넘겨주었다. 민영의 표정이 얼었다. 볼이 또 발그레해지는 것을 느낀다. 일순간, 어색한 기분이 든다.

"....차 한잔... 마실래?"

그 어색함을 깨고 수현이 묻는다. 민영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아니요. 이제 가봐야죠."

 민영이 표를 가방에 챙겨넣더니 일어난다.

 "또 무슨 일 있으면 전화주세요.그리고 콘서트에서 꼭 뵐께요."

수현도 고개를 끄덕인다. 민영은 그렇게 발걸음을 돌린다. 몇 걸음 가다 돌아보고 또 인사한다.

 수현은 그렇게 멀어지는 민영을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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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준은 그에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늘어진 테이프 음처럼 그의 목소리는 선명히 들리지 않았다. 그는 계속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그 아이들의 눈이 저를 볼 때가 행복했어요, 형..."

 서준의 손에는 종이로 접은 별이 꽉꽉 들어찬 유리 병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 나를 생각하고 무언가를 만들었다는 걸 생각하면 가슴이 꽉 차오르는 것 같아요."

 그는 그저 그의 이야기를 들었지만, 정말로 그가 지금 그렇게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아니면 과거에 그런 이야기를 했던 것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을 뿐이다.

 "....형,..."

 그는 서준의 표정 속에 온화하게 흐르는 무언가가 떠오르는 것을 보았다.

 "... 행복해 져요..."

 촛점이 맞지 않을 때처럼 그의 모습이 뿌옇게 흐려진다.

 

 수현은 잠이 완전히 깼지만 눈을 뜨지는 않았다. 아침이 이미 밝았다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천천히 눈을 뜨자 천정이 눈에 들어왔다. 오랜 만에 잠을 푹 자서 피로가 많이 풀리는 듯 했다. 시계를 보자 9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지훈에게 전화를 걸어 픽업을 부탁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래도 아침인걸 뭐... 조금 더 여유부려도 괜찮겠지.... 수현은 그 자리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가스렌지에 물을 올리고 국화차 통과 다기를 꺼냈다. 그 때 초인종 소리가 났다.

 "누구세요?"

 지훈이나 아침 일찍 찾아오는 민영 이외에는 찾아올 사람이 없다. 답이 없다.

 "...누구세요?"

 재차 묻자 드디어 반응이 온다.

 "....수현 씨... 나야."

 시현이었다. 수현은 그 자리에 못 박은 듯 서있었다.

 "....수현 씨..."

 수현은 그제서야 현관 문을 열어준다.

 "어제 몸이 안좋았다고 그래서 와 봤어. "

 수현은 그저 시현을 바라본다. '또 무안하게 쳐다본다.' 라고 말할 것처럼 시현이 입을 열려는 찰나, 주전자에서 물이 다 끓었다는 듯 '뿌우우-'소리가 났다. 수현은 뒤돌아서 부엌으로 들어가버린다.

 "커피?"

 시현이 그의 뒤를 따라와 수현에게 묻는다.

 "나도 한 잔 줄래?"

 그러나 그녀의 눈에 띄는 것은 국화차 통과 찻잔 뿐이다. 시현은 국화차 통과 수현을 번갈아 본다.

 수현은 말없이 꽃차를 우린다. 시현도 더 말하지 않는다. 차를 따르고 그저 조용히 마실 뿐이다.

 "수현씨."

 그녀가 먼저 입을 연다.

 "나... 수현씨한테 다시 가도 돼? "

 수현은 말이 없다.

 "나한테....기회 한 번 더 줄래?"

 수현은 늘 그랬던 것처럼 시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민영은 어린이집을 나왔다. 발이 채 떨어지지 않는 듯, 다시 뒤돌아보다가 천천히 발걸음을 떼었다. 한 코너만 돌면 수현의 집이었다. 민영은 걸으면서 자신의 가방에서 물병을 꺼냈다. 그녀의 눈에 수현이 보였다. 수현은 누군가와 함께 있었다. 민영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아직 안 나가셨나?'

 수현과 함께 있는 사람은 여자였다. 예쁜 여자였다. 민영은 어제 일을 떠올리고 그냥 씁쓸하게 웃었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민영은 천천히 걸으면서 휴대폰으로 메시지을 남겼다.

 '밖에 화분에 물 좀 주세요.'

 

 수현은 시현을 보내고 집에 들어와서야 민영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메시지를 유심히 보던 수현은 다시 밖으로 나왔다. 그녀의 메시지는 조금 전까지 여기 있었다는 확신을 갖게 했다. 그러나 민영의 인기척은 어디에도 없었다. 기분이 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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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은은 그 곳에서 비를 맞고 있었다. 민영은 노란 가로등 불 빛 아래서 처연히 비를 맞고 있는 재은의 모습에 놀랐다.

 "너 뭐하는 거야? 온통 다 젖어서."

 우산을 씌어주자 재은은 그제야 민영을 돌아본다.

 "민영아...."

 비로 젖은 재은의 얼굴이 퉁퉁 부어있다.

 "왜 그래?"

 재은의 얼굴은 비로만 부은 건 아닌 듯 했다.  

 "뭐야? 너 얼굴 왜 이래?"

 재은은 그저 울며 민영에게 안긴다. '

 "뭘 잘못했니?.... 왜 맞고 그러니?..... 너 잘못했다고 때리면 도망이라도 가지 그랬니?..."

 그렇게 말을 잇고 있는 민영의 목소리도 같이 울고 있었다. 재은의 울음소리만큼이나 빗소리도 더욱 거세졌다.

 

 다기 박물관이라 해도 많은 종류의 다기가 전시 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늑한 분위기에 마음도 편안해지는 듯 했다. 수현은 민영의 잔에 차를 따라 주었다.

 "처음보다는 많이 편해지신 것 같네요."

 "뭐가?"

 "국화차요..."

 수현은 말없이 자기 잔에도 차를 따른다.

 "그런데... 여긴 왜 온거야?"

 "왜요?"

 "내가 찾아내기 전에는 여기 같이 올 일 없다고 했잖아."

 수현의 말에 민영이 풋 웃어버린다.

 "그 말을 지금도 기억해요?"

 수현은 댓구 없이 그저 웃는다. 민영도 더 말을 하지 않고 차를 식혀 마신다. 이제 주위는 완전히 어둑어둑 해졌다. 조명이 그닥 밝지 않은 실내에 향초만 그들이 앉은 테이블 가운데서 약간의 밝음을 더할 뿐이었다. 민영이나 수현이나 흔들리는 촛불로 인해 서로가 흐릿한 그림 같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국화차 별로이지 않으셨어요?"

 민영이 묻자 수현은 그저 웃는다.

 "원래는 커피 좋아하시는 것 같던데."

 수현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민영도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는다.

 "익숙해지니 커피보다 낫지 않아요?"

 "글쎄."

 사실, 국화차가 익숙해진 건 사실이지만, 수현이 좋아하는 메이플 시럽 라떼만큼 인상적이지는 않다고 수현은 속으로 중얼 거렸다.

 "선생님께 커피는 익숙한 일상 같을 걸요. 그런데 이젠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어떤 일 처럼 국화차도 그럴 것 같네요."

 "무슨 뜻이야?"

 "저요"

 민영의 볼에 붉은 빛이 든다.

 "너 뭐?"

 민영은 그저 웃는다.

 "오늘... 저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수현은 민영의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 그녀를 보다가 자신의 귓불도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 그냥.."

 "보고 싶으셨던 건 아니구요?"

 수현은 말없이 그녀를 본다.

 "매일 아침 드셨던 밥도 생각나고... 제가 괴롭혀 드렸던 시간도 생각나고... 아닌가요?"

 민영의 눈에 예의 그 장난기가 서려있다. 순간 수현은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민영은 늘 생각지도 않았던 어떤 경우, 그러니까 늘 당황스러워 할 만한 어떤 일을 만드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 것 같다고 수현은 생각한다.

 "합숙하신다고 100일 애인되주기 약속도 그만 접으셨던 분이 저한테 갑자기 보자시니까 이상하잖아요."

 "아..."

 수현은 별 말 없이 민영을 바라본다. 부인할 수 없었다. 민영의 말이 다 사실인 것도 같았다. 그러나 인정하기 싫었다. 귀로부터 느끼던 뜨끈한 기분은 볼에까지 전이되는 것 같았다.

 "저 중학교 때, 자주 가던 떡볶이 집이 있어요. 전 하루 걸러 하루는 꼭 가서 친구랑 떡볶이를 나눠 먹었어요. "

 민영은 재은을 떠올렸다.

 "지금 와서 보니 다른 떡볶이 집도 맛있었는데 전 꼭 거기만 갔어요. 안 가면 이상했으니까."

 민영은 수현과 눈을 마주치고 다시 활짝 웃는다.

 "선생님도... 그렇죠?..."

 수현은 한 호흡을 쉰다.

 "손..."

 민영은 눈을 동그랗게 뜬다.

 "손... 잡아 봐도 될까?"

 수현이 민영에게 그의 손을 내민다. 민영은 피아노 연습 중에 자기 손을 얹었던 그 때 이후, 다시 닿아 보지 못했던 그의 손을 잡았다. 민영의 손에서 온기가 났다. 수현은 가만히 그녀의 손을 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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