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란 무엇인가
김영민 지음 / 어크로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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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대학교육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죠.

퀸틴 스키너(Quentin Skinner)가 말했듯이, 평가어는 해당사회의 의식을 반영한다. 그렇기에, 어떤 단어에 단순히 변화를 준다고 해서, 해당 사회가 곧 바뀌는 것은 아니다.

퀸틴 스키너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규범적인 평가어들의쓰임새에 의해 지탱되므로,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한 가지방법은 그 평가어의 적용 방식을 바꾸는 것이라는 취지의 주장을 한 바 있다. 실로 뛰어난 작가는 시대의 흐름을 예민하게 포착하여, 당대의 평가어를 재정의해내기도 한다. 이를테면,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통해 한때 미덕으로 높이 평가되던 관대함(liberality)이 사실 악덕일 수 있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한국 사회의 경우, ‘착함‘은 한때 높이 평가되던 미덕

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사회 일각에서는 ‘착하다‘는 말이미모, 재력, 지성, 학식 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그리하여 결국 내어놓을 것이 모나지 않은 성격뿐이라는 뜻으로 사용되곤 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런 추세가 가속화되면, 누가 소개팅에서 착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싶겠는가. 착함이 곧 무능함의 동의어가 되어가는 현상, 이것은 한국 사회가 흘러가는 어떤 방향을 지시하는 것일까.

"믿기지 않겠지만/갈등이나 고통없이 평탄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정말 있다./그들은 잘 차려입고/잘 먹고 잘 잔다./그리고 가정생활에/만족한다./슬픔에 잠길 때도/있지만/대체로 마음이 평안하고 가끔은 끝내주게 행복하기까지 하다./죽을 때도 마찬가지라 대개 자다가 죽는 것으로 수월하게 세상을 마감한다./믿기지 않겠지만/그런 사람들이 정말/존재한다."
찰스 부코스키가 지은 이 시의 제목은 외계인들>이다.

대충 숨 쉬며 산다고 해서 호흡의 달인이 되지는 않습니다. 공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공부하는 중에 한없이 편하다는 느낌이 들면, 뭔가 잘못하고 있을 공산이 큽니다.
평소보다 좀 더 무거운 지적 무게를 들기 위해서는 일정한 규율이 필요합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영화감독 타르코프스키는 주기적으로 정해진 일을 하면 기적이 일어난다고 말한

생계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업으로 삼은 이들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고충에 공감할 것이다. 끝내 제출하지 못한 연구 계획서에 썼던 문장이 뭐였더라? 예술가 패티 스미스가 한 말의 변주였던 것같다. "나는 왜 공부를 하는가? 그저 살기만 할 수가 없어서."

과학에만 정교하고 섬세한 구별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마르셀 프루스트도, 경험에 합당한 언어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 경험은 사라지게 된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독특한 경험에 맞는 섬세한 언어로 자신의 경험을 포착하지 않는 한, 그경험은 사라지고, 그만큼 자신의 삶도 망실된다.
섬세함은 사회적 삶에서도 중요하다. 섬세한 언어를 매개

나쓰메 소세키의 《쿠사마쿠라(草枕, 풀베개)》는 다음과 같은문장으로 시작한다. 산길을 오르면서 이렇게 생각했다. 이치를 따지면 모가 나고, 정에 치우치면 휩쓸리고, 고집을 피우면옹색해진다. 이래저래, 사람의 세상은 살기 어렵다." 사람의세상은 이처럼 살기 어렵다니, 《쿠사마쿠라》의 첫 부분은 왠지 단테의 《신곡》 첫 부분을 연상시킨다. "인생을 절반쯤 살았을 무렵, 길을 잃고 어두운 숲에 서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그 거칠고, 가혹하고, 준엄한 숲이 어떠했는지는 입에 담는 것

어렵게 손에 쥔 여유를 가지고 과감하게 험지(險地)로 떠나야 한다. 너무 안온한 환경에 자신을 방치해두면,
새로운 생각을 할 역량 자체가 퇴화해버릴 것이다.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유충 시절에 물속을 떠다니는 멍게는 뇌가 있지만, 성체가 되어 적당한 장소에 고착된 멍게는 자신의 뇌를 먹어버린다고 한다. 이제 안정되었으니, 떠돌아다니는 시절에나필요했던 기관을 폐기해버린다는 것이다.

그러한 서평을 다루는 서평지로는 영어권의 경우,
런던 리뷰 오브 북스(London Review of Books)>나 <뉴욕 리뷰오브 북스(New York Review of Books)〉 등이 있다.

그야말로 문예 공화국의 면모를 갖게 될 것이다. 이런종류의 서평은 이 세상에 대해 코멘트를 하기 좋은 형식이기도 하다. 사회에 대해 직접 비평하는 일과의 차이는 책을 매개로 비평을 수행하므로 메타(meta)적인 성격이 있다는 점이다.
메타적인 비평을 통해 사회 비평은 보다 입체적이 된다. 이런문화를 자랑스러워하는 미국의 영화감독 마틴 스콜세이지는〈뉴욕 리뷰 오브 북스>의 역사와 영향력을 다룬 50년의 주장(The 50 Year Argument)〉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했다.

한 개인이 공부할 때도 자신이 필요로 하는 자료를 잘 정리해두고, 자기 나름의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는 일이 중요하다. 어느 날 갑자기 책상 앞에 앉는다고 필요한 자료가 생기고아이디어가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분석적 방법에만 의존하는 분야라면 모를까, 대부분의 공부 분야에서는 늘관련 자료를 모으는 자세, 그리고 필요할 때 언제든지 사용할수 있게끔 정리해두는 습관이 필요하다.

질문은 연구뿐 아니라 토론의 경우에도 필요하다. 논문 발표에 따르는 질의 토론 시간은 그러한 질문을 위한 장이다.
질의 토론 시간에 얼마나 좋은 질문이 제기되느냐가 해당 연구 모임의 수준을 보여준다. 좋은 질문을 던지기 위해서는 일단 질문을 완성된 문장으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확고한 증거를 들이대며 상식을 전복하는 데 성공한다면,
역사가 당신을 기억할 것이다. 천동설을 비판하고 지동설을주장한 코페르니쿠스나 갈릴레오처럼.
혁신적인 주장은 엄밀한 증명을 특징으로 하는 과학의 영역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 왕〉에 나

오는 사생아 에드먼드는 사생아를 멸시하는 정실부인 자식들의 상식을 이렇게 뒤집어놓는다. "사생아가 비천하다고? 사생아는 자연스럽게 불타는 성욕을 만족시키다가 생겨난 존재이니, 지겹고 따분한 침대에서 의무 삼아 잉태된 정실 자식들보다는 낫지!"오, 어쩐지 그럴듯하다.

그러나 비판을 간명하게 한답시고 가능한 대안을 생략해서는 안 된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비판이나 비난, 불평만 하는 것은 어떤 바보라도 할 수 있고, 대다수의 바보들이 그렇게 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즉 가능하다면 건설적인 제언이나 대안을 제시해주는 것이 좋다.
동시에 상대방의 주장에 문제가 있다고 해서 자신의 대안이곧 타당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지성에 기반한 토론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먼저, 자기 견해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한다. 토론이란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만나서 하는 것. 견해가 없으면 토론이 아예 시작될 수도 없다.

그런데 그 요약이 그저해당 텍스트의 순서에 맞추어 기계적으로 이루어진 요약일필요는 없다. 참석자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마치 추리소설을 분석할 때처럼 내용의 재배치를 통한 텍스트 재구성을 시도해볼 수도 있다. 재구성을 잘하려면 텍스트의 구성 부분을명철하게 이해해야 할 뿐 아니라 토론자나 독자들의 이해를앞장서 돕겠다는 자비심이 있어야 한다.
결국, 발제를 위해서는 단순한 내용 요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 텍스트의 핵심 주장(thesis)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핵심 주장을 파악하려면 그 주장을 이루는 나머지 부분들의 역할을 분석적으로 해체 조립할 수 있어야 한다. 핵심 주장을 파악하고, 그 주장을 세부적으로 구성하는 하위 주장들을판별해내고, 그 주장들의 관계를 살피고, 그 주장들이 타당한근거를 가지고 있는지까지 고려해서 요약을 한다면, 그것은이미 단순한 요약을 넘어선 것이다. 발제를 위해 필요한 것은단순 요약이 아니라 이처럼 분석적인 요약이다.

그러나 단순 요약은 발제가 아니다. 단순 요약이 의미가 있으려면, 세미나 구성원들이 주어진 텍스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구성원들이 토론 대상이 되는 텍스트를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면, 아직 그 사람들은 세미나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것

어느 직업에나 이상적인 직업윤리가 있겠지만, 윤리 교육이란게 학교에서 교육해서 되는 일은 아니다. 교과서를 잘 읽어서윤리적 인간이 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나. 예비군 훈련에 다녀와서 갑자기 애국자가 되는 사람은 없는 것처럼, 윤리적인 인간이란 누가 주입시켜서 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럴 만한 환경에 놓여야 하는 것 같다. 전반적으로 삶의 어떤 예상치않은 국면 안에서 깨달음이 오는 거니까.

아마 여느 글과 다른 점이 있어서 즐겨 읽는다고 추측해봅니다. 현재 한국어로 통용되는 글 다수에 ‘깊은 빡침이 있고, 그분노가 다른 글을 쓰게 만드는 에너지가 되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대한 경험적인 지식이 쌓일수록, 세상은 모순이나긴장이나 혼란으로 점철되어 있다는 인식에 이르게 된다. 완벽하게 흠결이 없는 혁명가, 오직 탐욕으로만 이루어진 자본가, 오직 순박함으로만 이루어진 농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은, 도덕적이고 싶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던 혁명가, 너무 게을러서 탐욕스러워지는 데 실패한 자본가,
섣불리 귀농했다가 야반도주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을 자기 희망대로 단순화하지 않았을 때에야 비로소 그전까지는 보이지 않던 문제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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