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연 소년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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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마요!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요! 당신들을 증오해요! 내 아들 시신만 두고 가요…… 장례는 내가 알아서 치를 테니까. 나 혼자. 당신네 그 알량한 군대 명예니 뭐니, 그딴 건 필요 없어….…글을 쓰세요! 진실을 알려요! 모든 진실을요! 나는 이제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요…… 평생을 두려움 속에 산 걸로 충분해요……
어머니

막사…..…벽에 포스터가 붙어 있었는데, 소련과 아프간의 견고한 우정을 선전하는 내용이었죠.…… 그런데요! 혹시 아내가 돌아올 수도 있을까요? 그럼 술을 끊을 텐데……… (술병을 손으로 잡는다.) 책과 보드카…… 이두 가지가 러시아의 비밀이죠……

(보드카를 또 따른다.) 보드카…… 책과 보드카… 이 안에 러시아 영혼의 비밀이 숨겨져 있으니 여기서 러시아애국주의의 근원을 찾아보시죠.

사실 나는 투르게네프의 「무무 를 눈물 없이는 읽지 못하던 사람이었어요.
전쟁터에서는 사람이 전혀 다른 사람이 돼요. 더이상 그 사람이 그 사람이 아니게 되죠. 우리가 언제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배운 적이 있던가요? 고등학교고 대학교고 늘 참전 용사들이 찾아와 어떻게 적을 죽였는지들려줬다고요. 모두 하나같이 깔끔하게 차려입은 군복에 메달 훈장들을달고 와서요.

이제 학생들에게 이렇게 강조해요(학교에서 일하거든요).
-너희가 옛날의 우리 같은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리고 아연관에 담겨 집으로 돌아오지 않기 위해서는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군대에 가기 전에는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에게서 삶의 지혜를배웠고, 군대에 가서는 중사들한테 배웠어요.

내가 성경에서 찾는 건 무엇인가? 질문들? 아니면 대답들? 그렇다면나는 과연 어떤 질문들과 어떤 대답들을 찾는 걸까? 사람은 자신 안에또다른 자신을 몇 명이나 가지고 있을까? 어떤 이들은 그게 여럿이라고믿고, 또 어떤 이들은 몇 안 된다고 확신한다. 사람은 문화라는 얇은 막을 한 꺼풀만 벗겨내면 이내 짐승의 모습을 드러낸다. 짐승의 모습은또 얼마나 될까?

...기세를 눌러놓고 입을 틀어막는 일은 가능하지요….…물론, 우리는 이런 일에 이미 익숙합니다. 다니엘과 시납스키가 심판을 받았고, 보리스 파스테르나크"가 파문을 당했으며, 솔제니친과 두딘체프 역시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썼으니까요.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결국 입을 다물 겁니다. 범죄로 가득한우리 시대 희생자들의 증언들 역시 더이상 나타나지 않을 거고요. 그렇게 된다면 우리 후손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요? 승전의 소식만 열심히 떠들어대는 자들의 달콤한 사탕발림?

그때, 5년 전, 그러니까 아직 공산당과 KGB가 득세하고 있었을 때저는 제 책의 주인공들을 핍박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일부러 이름과성들을 바꾸곤 했습니다. 저는 제 주인공들을 그 체제로부터 보호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가 보호했던 그 사람들로부터이젠 저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켜내야 할 것은 무엇일까요? 제 눈에 비치는 대로세상을 바라볼 작가로서의 권리입니다. 그리고 제가 전쟁을 증오한다.
는 사실이고요. 또한 저는 진실과 유사진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증명해야 하고, 예술에서의 기록문은 군정치위원회의 증명서도, 노면전차승차권도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야만 합니다.

‘다큐문학이 사실과 진실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점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지만 완전한 리얼리즘,
절대적인 진실이라는 것이 성립 가능할까요?
노벨문학상 수상자 알베르 카뮈의 말에 따르면, 완전한 진실은 사람 앞에 카메라를 세워놓고,그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는 순간까지 전 생애를 녹화한다면 성립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 대단한 영화필름을 찍겠다고 언제까지나 카메라만 들여다보며 일생을 바칠 사람이 있을까요? 만일 그런 사람이 있다 해도 그 사람은 겉으로 드러난 사건 뒤에 감춰진, ‘주인공‘ 행동의 내적 동기를 알아볼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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