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설들
앙리 드 뤼박 지음, 곽진상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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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종종 삶에 질서와 의미를 부여하는 뿌리로 여겨진다. 하지만 나는 앙리 드 뤼박의 <역설들>을 읽으며, 그 뿌리가 흔들리는 낯선 경험을 했다. 익숙한 위로가 아닌 불편한 진실 앞에서, 신앙은 나를 감싸주는 대신 조용히 밀어냈다. <역설들>은 신앙의 본질을 '역설'이란 키워드로 관통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모순과 어긋남, 그 안에 숨은 진리를 드러내는 영성 철학서다. 짧은 아포리즘으로 구성된 문장은 모호하고, 다소 불친절한 인상을 주지만 그 울림은 오래간다. 나는 그 미로같은 문장들 속에서 자꾸 길을 잃었고, 때로는 막막함을 느끼며 주저앉기도 했다. 무력함이 찾아왔다. 출구조차 찾을 수 없는 공간에 홀로 남겨진 장님처럼, 바닥을 더듬고 헤매면서 스스로에게 되뇌였다. 끊임없이 흔들리고 무너지며, 내 안의 십자가를 발견하는 여정. 그럼으로 결국 고통과 죽음을 수렴하는, 눈부신 역설의 신비를 깨닫는 것. 이것이 바로 신앙이 아닌가.

행복해지는 유일한 방법은 고통을 무시하거나 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고통의 변모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너희의 슬픔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요한 16,20)
진정한 행복은 연금술의 결과일 뿐이다. p.180

<역설들>은 위로와 치유의 하느님을 말하지 않는다. 기존의 도식화된 구원 서사와는 달리, 뤼박은 명징한 깨달음을 주지 않는다. 움켜쥐려고 하면 모래알처럼 흘러내리고, 다가가면 무지개처럼 멀어지는 신앙. 인간이 매 순간 '감각적 확신'을 요구할수록, 하느님은 그들이 원하는 답을 주지 않으신다. 신앙은 정확히 그 지점에서 시작된다. 완전한 질서가 아닌, 혼란과 모순 한가운데에서 더듬거리는 것. 인간은 불완전한 존재다. 욕망과 실패와 유혹이 혼재된, 피조물. 그렇기에 신앙 역시 낯설고 어두운 심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걸, 뤼박은 강조한다. 진창 속에 몸을 담근 채 별을 동경하는 운명. 서글픈 역설의 이면이다.

더듬거리다가 그분을 찾아낼 수도 있습니다. 사실 그분께서는 우리 각자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 -사도 17,27-

뤼박의 <역설들>은 형이상학적 언어로 가득한, 불편한 책이다. 뤼박은 독자를 다독이며, 감싸주는 영성을 말하지 않는다. 존재의 심연을 침묵으로 해체하며, 낯선 신비를 마주하게 한다. 그는 나에게 익숙했던 하느님의 얼굴을 지워버렸다. 안전한 신앙 속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안주했던, 과거를 성찰하며 나는 이 책을 읽었다. 제때 원하는 답을 내려주지 않으시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회의와 불신이 고개를 들 때마다 나는 다시 이 책을 펼칠 것이다. 바닥부터 더듬거리며, 그분을 찾아내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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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움가트너
폴 오스터 지음, 정영목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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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우리가 본격적으로 이야기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의 용어를 정리할 필요가 있다는 것뿐이에요. 그래요, 물에 다시 뛰어들지 않았다면 애나는 지금 살아 있겠죠. 하지만 애나가 원하는데 물에 들어가는 걸 내가 막으려 하거나 그랬다면 우리는 30년 이상 함께 하지 못했을 거예요. 삶은 위험해요. 매리언, 언제라도 어떤 일이든 일어날 수 있죠.(중략)솔직히 나 자신이 불쌍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아요. 자기 연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는 않고, 왜 하필이면 나냐, 하고 하늘을 향해 신음을 토하지도 않아요. 왜 내가 아니어야 하나요? 사람들은 죽어요. 젊어서 죽고, 늙어서 죽고 쉰여덟에 죽죠. 다만 나는 애나가 그리워요. 그게 전부에요. 애나는 내가 세상에서 사랑한 단 한 사람이었고, 이제 나는 애나 없이 계속 살아갈 길을 찾아야 해요." p.41

🔖하지만 그녀가 이런 이해할 수 없는 내세의 삶, 의식적 비존재라는 이 역설적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해주는 존재는 그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태는 언젠가는 끝날 것이다. (중략)그녀가 확실하게 아는 것 한 가지는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는 연결되어 있으며, 자신이 살아 있을 때 이룩했던 깊은 연결은 죽어서도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죽으면 산 자가 죽은 자를 삶과 삶이 아닌 것 사이의 일시적 림보 같은 곳으로 계속 들어가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 자마저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죽은 자의 의식은 영원히 소멸한다.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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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나는 죽었다. 하지만 바움가트너의 감각 속에서, 그녀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는 부재를 인정하면서도, 아내와 공유했던 시간 속에 머문다. 그녀가 남긴 기록을 더듬고, 흘러간 세월을 복기하며, 기억의 층위를 하나하나 되짚는다. 그 손끝에서, 애나는 끊임없이 소환된다.
이때 존재와 비존재, 삶과 죽음의 경계는 흐려지고, 폴 오스터는 '눈부신 역설'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상실 이후에도 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는 사실은 ‘의식적 비존재’라는 사유로 드러나며,
주인공의 애도는 기억을 복원하는 행위로 이어진다.

애나가 남긴 기록으로 그녀의 소멸은 유예됐다. 감각의 수면 위로 떠오른 아내.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바움가트너는 살아간다. 삶과 죽음,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를 지워가며 홀로 서 있는 바움가트너.
그 쓸쓸한 여정에 스며든 한 줄기 빛이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 닿기를 기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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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만나는 북유럽 동화 - 노르웨이부터 아이슬란드까지 신비롭고 환상적인 북유럽 동화 32편 드디어 시리즈 6
페테르 크리스텐 아스비에른센 지음, 카이 닐센 그림, 서미석 옮김 / 현대지성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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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시절,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다. 주말을 제외하면 얼굴조차 보기 힘들 정도로. 어쩌다 함께 시간을 보낼 때도 있었지만, 늘상 언성을 높이며 다투시는 부모님 때문에 동생과 나는 자리를 피하는 순간이 많았다. 잔뜩 핏대를 올려 아빠를 비난하는 엄마와 집안이 떠나갈듯 고함을 지르던 아빠. 동생은 울음을 터뜨렸고, 나는 그런 동생을 애써 달래며 함께 작은 방으로 피신했다. 우리 남매의 유일한 방공호였던 공간으로.
그리고 어깨를 맞댄 채 비디오를 봤다. 어둑한 밤하늘 아래 웅크린 고양이들처럼.

거실 귀퉁이에 매달린 벽시계가 무겁게 울리고, 고막을 찌를 듯 날카롭게 울리던 소음이 간신히 잦아들어 낮은 속삭임으로 이어질 때 동생은 안도하듯 눈을 감았다.
어느새 방으로 들어온 엄마가 잠든 동생을 침대에 눕히고, 꺼질듯한 한숨을 남긴 채 부엌으로 갈 때까지 나는 멍하니 화면만을 바라봤다. 나는 온몸으로 가시나무를 끌어안은 한 여자의 얼굴을 응시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표정을 지켜보던 눈망울엔, 커다란 이슬처럼 부풀어오른 슬픔이 맺혔다. 열린 문 틈 사이로 스며드는 서늘한 정적 속에서 규칙적으로 이어지는 동생의 숨소리, 그 평온한 숨결을 호흡하듯 화면 속 여자는 모든 것을 비워낸 얼굴로 눈을 감는다. 침묵의 그늘이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아름답다. 그토록 사랑했던 아들을, 그와 공유했던 세월을 떠올리며 기도하듯 맞잡은 두 손.

지상에 홀로 남은 그녀의 삶은 한 작가의 손끝에서 영원으로 거듭났으며, 숱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수많은 이들의 심금을 울리는 이야기로 남았다. 슬픈 꿈에서 막 깨어나 현실로 돌아오는 순간의 멍한 감각. 그 아련한 여운을 고스란히 간직한 안데르센. 나는 어릴 때부터 안데르센을 비롯한 북유럽 동화 특유의 느낌이 좋았다. 마치 전쟁을 치르듯 살벌한 눈빛으로 대치하던 부모님, 그들을 피해 은밀한 방공호로 몸을 숨겼던 어린 남매. 오프닝 곡과 대사까지 달달 외울 정도로 끊임없이 재생했던 비디오, 이야기에 몰입하는 그 순간만큼은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막연한 공포와 슬픔에 무방비로 노출됐던 유년기를 어루만지듯, 장막처럼 떠올랐던 오로라. 그 신비스런 빛깔이 나는 좋았다. 손등으로 떨어졌던 눈물처럼, 영롱한 빛깔이.

성인이 된 지금, 이제 와 다시 그 이야기를 읽을 때면 그때 느꼈던 감각들이 어릴 적보다 훨씬 선명하게 다가온다. 뚜렷한 형상조차 갖추지 못했던 슬픔이 제각각의 이름으로 말을 건네는 느낌. 저마다의 빛깔과 향기를 부여받은 슬픔, 그 얼굴들을 확인하듯 나는 책장을 펼친다. 허공 속 먼지로 흩어진 그날의 소음들과 엄마의 붉은 눈시울을 떠올리며. 그리고 이젠 더 이상 들을 수 없는 아빠의 목소리를.

슬픔의 마지막 이름을 이제 나는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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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망 10 (반양장) 대망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박재희 옮김 / 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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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센코쿠 시대, 격랑의 전장을 누비던 세 명의 영걸이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중심으로, 오다 노부나가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일대기를 담은 야마오카 소하치의 <대망>은 중국의 <삼국지>와 쌍벽을 이루는 12권 분량의 대하 역사 소설이다.
화려한 지략과 병법, 능란한 처세로 난세를 평정했던 두 걸출한 인물,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그늘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이에야스는 항상 뒷전에 밀려 그들의 영광을 지켜보는 이인자로 머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절대 낙담하지 않았다. 볼모로 잡혀 온갖 수모를 겪었던 어린 시절은 '인내'라는 굳건한 토대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에겐 인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노부나가와 히데요시의 뛰어난 기량을 인정하고 기꺼이 고개 숙여 순종했지만, 그 이면에는 예측불허의 속내가 존재했다. 폭주하듯 맹렬한 속도로 타오르는 두 영웅을 숭배하기 여념이 없었던 사람들은 이에야스를 까맣게 잊어버렸다. 개중엔 조롱하는 무리도 존재했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다만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을 뿐이다. 오랜 세월, 침묵과 인내로 수양을 거듭했던 그는 깨닫는다. 지금은 묵묵히 내실을 쌓으며 인종(忍從)이란 거대한 탑을 쌓아야 하는 때라는 걸. 조급한 야망보다 인내에 근간한 깊은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매 순간 인내와 끈기로 쌓아 올렸던 탑은 결국 하늘의 뜻과 맞닿았고, 마침내 이에야스는 에도 막부의 창시자가 됐다. 260년에 이르는 평화의 시대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이렇듯 거대한 과업을 성취한 인물이였기에 젊은 시절 내 독서는 자연 이에야스의 인생 철학에 포커스가 맞춰졌고, 주변 인물들의 서사는 밀려날 수 밖에 없었다. 막부의 개창자라는 위업을 이룬 이에야스의 묵직한 여정에 사로잡혀 역사의 뒷켠으로 쓸쓸히 사라진 인물에게 시선을 주지 못했던 것이다. <대망>을 완독한 사람들은 누구나 꿈꿀 것이다. 연이은 좌절과 굴욕 속에서도 특유의 집념으로 다시 일어서는 이에야스를. 그러나 우리가 마주한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다. 불굴의 투지로 승부하는 이에야스의 삶은 어디까지나 이상향일 뿐, 우리의 삶은 대부분 상실과 회한으로 채워진다.

그런 삶의 이치를 깨달을 무렵 나는 중년이 됐고, 자연스레 내 시선은 다른 곳을 향했다. 불세출의 영웅 이에야스가 아닌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로. 나름 특출한 자질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한계에 갇혀버린 히데요리. 센코쿠 시대를 평정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늦둥이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온갖 호사를 누렸던 그의 삶은 여느 부잣집 도련님과 다를 바 없었다. 모든 것이 풍요롭게 갖춰진 오사카성, 그가 손에 넣지 못할 것은 없었다. 그렇기에 그의 앞날은 불안할 수 밖에 없었다. 어릴 때부터 모진 수난을 겪으며 정치적 감각을 익혔던 이에야스는 직감한다.
온실 속 화초로 자라난 히데요리는 결코 난세를 평정할 기량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특유의 분방한 기질로 내전을 휘저었던 생모 요도기미. 그녀는 히데요리의 보호막이 되기엔 역부족이었다. 지나친 자기연민과 욕구불만에 사로잡혀 아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그녀. 히데요리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어려서부터 여인들에 둘러싸여 안방에서만 자란 히데요리에게, 난세에서 자라온 난폭한 영주들을 제압할 힘은 도저히 기대할 수 없다.' p.143

히데요리의 삶을 따라가며 나는 어느 순간 나 자신을 보았다. 역사의 변방으로 밀려나 서서히 무너져가는 그에게서 더 깊은 공명을 느꼈다. 인간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도, 강철같은 의지나 묵직한 내공도 갖추지 못한 채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내 삶은 놀랍도록 그와 닮아 있었다. 역사라는 모체를 공유하며 서로를 마주 보는 쌍둥이처럼.

세상의 거친 민낯을 몰랐기에 어른이 될 수 없던 히데요리. 그는 외로웠을 것이다.
표면적인 예의만 갖춘 채 서서히 거리를 두던 가신들 틈에서. 화려한 오사카성에서 그는 조금씩 마모됐으며, 결국 짧은 생을 마치게 된다. 섬뜩하게 벼려진 역사의 칼끝에 흥건한 핏물만을 남긴 채.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삶의 벼랑에 내몰렸을 때,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 순간이 왔을 때, 내가 내린 결정이 누군가의 상처를 덜어주는 쪽이기를, 그리고 잊혀진 이들의 고통을 기억하는 나이기를 바란다.
히데요리의 짧은 생이 나에게 남긴 울림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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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상의 비오 신부
존 A. 슈그 엮음, 송열섭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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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성사는 내게 항상 불편한 성사였다. 정확히는, 고해소 특유의 숨 막히는 공기가 버거웠다. 세상과 차단된 밀실에 갇혀, 그간 저지른 죄악과 오류를 낱낱이 고백해야 하는 행위 자체가 나를 짓눌렀다. 가톨릭 신자로서 당연히 지켜야 할 의무라는 걸 알면서도, 선뜻 고해소를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세례 받은지 이십 년이나 흘렀음에도 좀체 지워지지 않은 기억 때문일까. 반 평도 되지 않은 좁은 공간에서 두 손을 맞잡은 채, 더듬더듬 말문을 여는 내게 신부님들은 항상 자상하셨고, 보속도 대부분 가벼웠다.
그러나 때론 버럭 역정을 내며 혼을 내는 분들도 더러 계셨다. 눈물이 쏙 나올만큼.
살면서 항상 따뜻한 위로만 받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땐 그저 서럽고, 원망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반복되는 죄의 굴레에 갇혀 관성대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참회와 성찰의 본질을 알지 못했던 어린 날의 나에게, 그 독설은 오래도록 사무치는 상처였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그날을 떠올리면 나도 모를 웃음이 입가에 번진다. 그날 내가 흘렸던 눈물은, 돌이켜보면 은총의 또 다른 빛이었으니까.

상처로 남은 고해성사

존 A.슈그의 <오상의 비오 신부>는 생전의 비오 신부님을 만났던 성직자와 신자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그분이 남기신 놀라운 행적들을 기록한 책이다. 동시에 두 장소에 나타나는 빌로케이션을 비롯해 사람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날카로운 통찰력과 치유의 기적들, 쉽사리 범접할 수 없는 심오한 영적 깊이. 사후 성인의 반열에 오를 만큼 대단한 업적을 쌓았지만, 비오 신부님은 마냥 친절한 사제는 아니었다. 다소 냉정하고 단호한 태도는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켰다. 특히 고해 성사 중 그분의 무뚝뚝한 말투에 상처를 받았다는 수녀님의 증언을 읽어보면, 신부님은 틀에 박힌 친절한 위로보다는 철저한 회개와 정직한 고백을 원하셨던 듯하다.

상처로 남았던 고해성사였지만, 시간이 흘러 신부님의 본심을 헤아린 수녀님은 다시 그분께 돌아와 또 한 번 고해를 청하셨다. 구체적인 해결책 대신 '기도하고 또 기도하라'는 신부님의 조언을 가슴에 새기면서.

하느님께서는 비오 신부님을 내 인생에서 도구로 사용하셨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느님께서 계속 나를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p.288

비오 신부님을 흠모해 '비아'라는 수도명을 택했던 수녀님. 그녀는 깨달았다. 거룩함이란 항상 부드러움이나 고요함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때론 서늘하고 예리한 영성으로 영혼을 일깨우는 것이 진정한 회개의 단초라는 걸. 오래전 고해소에서 내가 흘렸던 눈물처럼.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티모2, 4장 7절-

인간적인 온기를 초월해, 하느님의 사명을 완수한 비오 신부님. 그는 죄 앞에 무너지는 인간의 나약함을 알았기에, 그들을 무작정 감싸지 않으셨다. 때론 비수 같은 말로 영혼 깊은 곳을 자극하며, 진정한 회심을 촉구하셨던 신부님. 오상을 지닌 육체로 매일 그리스도의 수난을 되새겼고, 고해소라는 좁은 공간에서 수많은 영혼들을 구원하셨던 그분의 삶은 치열한 전투와도 같았다. 오직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그는 맹렬히 싸워냈다. 불처럼 타오르되, 얼음처럼 정제된 영성. 그 거룩한 온도의 신비를 더듬으며, 조심스레 이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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