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로 사는 걸 깜박했어요 - 루카 복음서에서 찾은 진짜 나로 살아가는 힘
홍성남 지음 / 가톨릭출판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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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이해와 영성적 삶에 대한 고찰로 많은 신자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홍성남 신부님. 그분의 저서 뿐 아니라 강의도 좋아하는 나는 틈틈히 유튜브 채널에서 신부님의 말씀을 청강하곤 하는데 며칠 전 들었던 내용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마음은 사랑의 그림자와 같아요, 그림자 없는 인간이 어디 있어요? 우리 내면의 어둠을 끌어안고 성찰할 수 있어야 나 자신을 알게 되고,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거예요." 자신의 본질을 깨닫고 오롯이 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타인에게 들키고 싶지 않은 약한 부분, 내밀한 트라우마를 하느님께 보여드리고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길 때 비로소 자신을 알게 되고 본질에 충실한 삶을 살 수 있다고 신부님은 말씀하신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삶을 위해 본체를 망각하고 페르소나에 집착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기만하며 자신을 갉아먹는 행위에 지나지 않음을 신부님께선 누누이 강조하신다.

'사람의 마음은 약하디 약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앞에서 약한 나를, 두려워하는 나를 솔직히 드러내고 나면 마음이 후련해지고,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듭니다.' p.218

천성이 여리고 사람들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던 난 항상 인간관계에서 휘둘리는 을의 입장을 고수했고, 거절도 제대로 하지 못해 항상 남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는 쪽에 가까웠다. 누군가에게 미움을 사기 싫어 솔직한 속내를 드러내지 못했던 나는 신앙생활에서도 똑같은 패턴을 반복했다. 상대에 대한 미움과 불만을 차곡차곡 쌓아갈 줄만 알았지 그 어두운 감정을 건강하게 분출할 줄 몰랐기에 내 속은 어느새 화로 가득차게 되었고 전혀 생각지 않은 지점에서 분노를 폭발시키며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시작했다. 내 자신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보지 못하고 왜곡된 자아상에 사로잡혀 있었기에 일상의 붕괴는 당연한 수순으로 찾아왔다. 곪을 대로 곪아 악취를 풍기는 상처, 과거에 대한 자책과 혐오만 남아버린 나는 그저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나 자신의 본질을 제대로 보지 못했기에 하느님을 향한 나의 기도는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절망만 가득했다. 십자가 수난을 앞둔 밤, 공포와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마음을 하느님께 고백했던 예수님처럼 그분께 나아갈 수 있는 용기가 나에겐 없었다.

'예수님은 약한 모습을 통해 그분도 우리와 같은 사람임을 보여 주십니다. (중략) 저는 하느님 앞에 약한 자신을 고백할 때 진정한 힘이 생긴다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점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p.218

몇 년 전, 내면에 누적된 미움과 상처를 두서없이 고해성사로 토해냈던 기억이 났다. 특유의 차분한 목소리로 신부님은 대답하셨다. "하느님께 뭐든지 말씀하세요. 자매님이 지금 느끼시는 모든 감정... 솔직히 그분께 털어놓으세요. 하느님께서 듣고 싶은 기도는 그런 거니까요."

과거의 상처와 미움을 끊임없이 곱씹으며 하느님을 원망했던 나. 모든 상황의 책임은 온전히 내게 있음을 인정하기 싫어 화살을 돌릴 누군가가 필요했던 나.
그런 나의 연약한 부분마저 구원의 빛으로 승화시키는 그분의 크심과 자비를 나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과거에 아무리 아픈 상처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삶에 대한 책임은 나에게 있습니다. 따라서 과거에 나를 힘들게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물어서도, 지금의 내 주위의 사람들에게 책임을 물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p.52

상처의 심연을 굽어보며 스스로를 정직하게 응시할 수 있을 때, 한 치 거짓도 없이 솔직한 심경을 하느님께 보여드릴 수 있을 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내면의 어둠과 상처를 수용하고 그분에게 모든 걸 맡길 때 나 자신의 본질을 깨달으며 진정한 자유로움을 깨달을 수 있다는 신부님의 말씀에 많은 깨달음과 위로를 얻을 수 있었다. 마음을 짓누르는 십자가는 결국 그리스도 부활에 동참하는 거룩한 여정이라는 것을, 찬란한 부활의 여명 속에서 모든 상처는 치유되고 절망과 슬픔은 환희의 신비로 승화된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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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2
천주교서울대교구 엮음 / 가톨릭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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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지난 일을 낱낱이 아시는 분...p.172

2016년 5월, 여명이 얼마 남지 않은 아빠를 간병하고 있을 때 누군가 병실 커튼을 젖히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대학병원 사목으로 계시는 초로의 수녀님께선 아빠의 세례명과 인적 사항 몇 가지를 여쭤보시더니 수술 부위에 손을 얹고 기도해 주셨다. 병실을 떠나기 전 인사하는 내 어깨를 다독여주시던 수녀님의 손길은 오랜 냉담으로 닫혀있던 마음을 다정한 온기로 두드렸고, 아빠의 장례 미사를 치른 후 나는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를 잃은 상실의 아픔과 친척들 포함 가까운 지인들에게 받았던 상처 때문에 하느님께 온전히 모든 것을 의탁하기는 좀체 쉽지가 않았다. 십 년이란 공백을 깨고 다시 성당에 나가긴 했지만 과연 이것이 진정한 부르심인지, 하느님의 섭리란 대체 무엇인지 부족한 내 신심으론 도무지 헤아릴 수 없었다. 어리석은 청춘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저질렀던 과거의 죄악과 허물들은 여전히 하느님과 나 사이에 장애물로 남아 있었고, 몇 번의 고해성사로도 영혼에 새겨진 얼룩은 쉽사리 지워지지 않았다.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내면의 갈증을 품고 종일 우물가를 지키며 돌이킬 수 없는 과거에 대한 회한으로 괴로워하던 나는 누가 봐도 '하잘것없는 사마리아 여인 p.172'에 지나지 않았다. '나의 과거, 나의 현재의 모든 것을 낱낱이 아시는 p.172' 하느님께 나아가는 일은 그때 내겐 불가능했다. 하느님의 시선과 세상의 관점은 다르다는 걸 몰랐기에 나는 매번 똑같은 신앙적 오류를 반복했다. 습관적인 미사 참례와 묵주 기도로 겨우 마음을 잡으며 살아가던 내게도 조금씩 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별 생각없이 뒤적였던 시편 한 구절로 내게도 FiatLux가 찾아온 것이다.

'저는 멍텅구리,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저는 당신 앞에 한 마리 짐승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늘 당신과 함께 있어 당신께서 제 오른손을 붙들어 주셨습니다. 당신의 뜻에 따라 저를 이끄시다가 훗날 저를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리다.' -시편 73:22~24-

내면의 결락을 다스리지 못해 과거의 죄악 속에 갇혀 살았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홀연히 찾아오셨던 예수님. 먼길에 지쳐 행색이 남루했던 예수님이 물 한 모금을 청하자 냉랭하게 대꾸했던 사마리아 여인의 모습은 바로 내 자화상이었다. 그분을 지척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한 채 어둠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왔던 나, 삶의 무게중심이 없어 사소한 일에 비틀거리고 쓰러지던 내 곁에 머무르며 끊임없이 말을 건네시던 예수님을 나는 목전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강생의 신비로 당신을 남김없이 비우시는 하느님의 가난'p.176을 헤아릴 수 없던, 한 마리 짐승에 지나지 않던 내가 그분의 빛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말씀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밑 빠진 독처럼 채워지지 않는 갈증으로 괴로워하던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을 알아봤던 순간, 그분이 건네는 사랑에 마음을 열던 순간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던 음성을 나도 모르게 똑같이 따라 하고 있었다. '그 물을 제게 주십시오.'

보잘것없는 한 여인을 위해 먼 길을 찾아오셨던 예수님. '아주 조용하고 여린 소리 속에 계셨던 p.179' 그분을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나의 교만과 아집은 숱한 방황과 오류만을 낳았을 뿐이였다. 하느님은 강풍 가운데도, 지진 가운데도, 불길 가운데 존재하시는 분이 아니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마주칠 법한 지극히 평범한 인간의 형상으로 조용히 다가와 말을 건네는 분이셨다. 팔 년 전, 병상의 아빠를 지키고 있던 내게 홀연히 다가오셨던 수녀님처럼.

세상의 변방에 머물러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사마리아 여인들에게 몸소 찾아가 말을 건네고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주셨던 추기경님의 글을 읽으며 깊은 묵상을 할 수 있던 독서였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가슴에 안고 살아가는 사마리아 여인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물가를 서성이며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을 그들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전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한다. 상처를 감싸주시고 다독여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미약하게나마 그들에게 전할 수 있는 날이 내게도 찾아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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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뤼기에르 주교 바로 살기 - 하느님의 종 브뤼기에르 주교 시리즈
생활성서사 편집부 지음 / 생활성서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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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설인다는 것은 두렵다는 것입니다. 주저한다는 것은 사랑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p.123

이 구절을 읽고 한참 생각에 잠겼습니다. 죽음을 불사하고 누군가에게 순명한다는 건 어떤 의미인지, 어떤 보상이나 대가도 바라지 않고 대상에 대한 항구성을 유지한다는 게 가능한 일인지 지금 제 상황과 견주어 여러 번 자문해보았습니다. 서학과 관련된 모든 것이 배척당하고 신앙의 자유마저 위태로웠던 조선이란 낯선 이국의 땅,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바치려 했던 브뤼기에르 주교의 삶은 세속적 관점에선 무모하게 여겨지기도 합니다. 신자들과 어울리기 싫어 제단체 활동은 모두 기피하고 미사만 겨우 참례하면서 하느님께 이런저런 불평만 늘어놓는 저같은 세속의 자식에겐 주교의 삶은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순명의 표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거리감이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신앙 안에서 상처를 받을 때마다 기도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묵상하고 그분이 제게 열어놓으신 길을 따르려고 나름 노력하지만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를 거두는 일은 언제나 제게 버겁게 여겨집니다. 저 또한 그들에게 별로 아름답지 않은 인간 군상 중 하나라고 생각하면서도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일은 언제나 힘이 듭니다. 특히 제 친절과 배려를 악용하고 상처를 준 사람이라면 더욱.

고향 레삭 도드를 떠나 동남아시아, 중국을 가로질러 조선을 향한 주교의 여정은 결코 녹록치 않았습니다.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들에 대한 연민으로 기꺼이 십자가 고통을 감수했던 그리스도의 사랑을 간직한 채 정든 고향을 떠나야 했던 주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이별의 아픔을 혼자 삭히면서 조용히 떠날 수 있는 용기p.42는 어디에서 연유하는 걸까요. 성모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간직한 채 나자렛을 떠나 공생활을 시작했던 예수님의 삶을 브뤼기에르 주교는 닮아가고 있었습니다. 슬픔과 절망은 결국 하느님의 영광으로 이어지기에 찰나의 아픔에 흔들려선 안된다는 걸 주교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누구보다 인간이란 피조물을 사랑했지만 세상의 갈등과 인간적 기대치에 휘둘리지 않았던 브뤼기에르 주교. 보답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서러움과 원망, 슬픔을 내려놓지 못하는 건 저 뿐이 아니였습니다. 하느님도 배신당한 사랑에 아파하십니다. p.132
매 순간 당신의 신뢰를 저버리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는 나약한 존재, 하느님을 부정하고 세속적 정체성에 충실했던 지난 날을 회상하는 제 눈빛은 어느새 심연을 향하고 있습니다. 블랙홀처럼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위태로운 심연의 가장자리,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막막함 속에서 두려워하던 제게 다가왔던 애틋한 온기를 기억합니다.
어쩌면 신앙은 하느님을 기억하고 그분이 내게 주신 위로와 희망과 약속을 기억하는p.64 동시에 인간에 대한 그분의 무한한 사랑을 내 안의 어두운 심연에 새겨가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비록 고통스런 투병으로 중단된 선교였지만 매 순간 영혼의 심연을 굽어보며 하느님 사랑을 새겨갔을 브뤼기에르 주교. 삶의 마지막 순간, 주교가 남겼던 마지막 한 마디를 읊조리며 두 손을 맞잡아봅니다. 상처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고 심연의 공포는 그림자처럼 따라붙습니다. 망설임과 두려움이 제 자신을 압도하는 순간, 그분께 나아가는 여정이 버거워 무릎 끓고 싶을 때마다 브뤼기에르 주교를 떠올리고 오직 빛이신 그분에 대한 사랑으로 다시 일어나길 청해봅니다.

예수, 마리아, 요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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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의 신앙과 사랑 1
천주교서울대교구 엮음 / 가톨릭출판사 / 200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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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환 추기경님께

2009년 2월 16일, 추기경님께서 선종하셨을 때 제 나이는 서른한 살이였습니다.
동년배 친구들처럼 삶에 대한 뚜렷한 가치관이나 비전도 없고, 타인의 작은 지적에도 일희일비 흔들리며 비틀대던 서른한 살.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알지 못해 어떤 확신도 가질 수 없던 서른 한 살, 신앙에 대한 태도도 별반 다르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을 따라 성당에 다니며 나름 가톨릭 신자로서 소양을 쌓으며 세례를 받긴 했지만, 가톨릭 신앙에서 강조하는 인내와 절제, 청빈이란 덕목은 당시 스무 살을 갓 넘었던 제겐 그다지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때 저는 누가봐도 세상 물정 어둡고 타인의 감언이설에 쉽게 넘어갔던 철부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자상하고 능력 있는 아버지의 그늘 아래 안주하며 온실 속 화초처럼 자라온 제게 '가난'이란 단어는 전혀 다른 세상에 존재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친구들에게 안타까움을 느껴본 적은 있었지만 그들을 위해 뭔가 할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죠. 어딜 가나 환대 받고 관심받는 게 당연했던 시절, 그때 저는 알지 못했습니다. 저는 영적으로 기아 상태에 가까운 존재라는걸. 순간의 허전함을 견디지 못해 결이 맞지도 않는 친구들을 사귀고, 그들의 선 넘는 부탁을 거절하지 못해 늘 휘둘리고 상처를 받았으며 고가의 사치품들을 구입하고 쌓아두며 스스로 행복하다 자부했지만 정작 누군가의 위로와 온기가 필요한 순간 앞에서 저는 철저히 혼자였습니다. 내면의 공허와 결핍을 필사적으로 메꾸려는 시도는 항상 저의 바람과 어긋난 결과를 가져왔으며 급기야 소통의 부재와 단절로 이어졌습니다. 마흔 중반에 이른 지금, 그때 저를 돌아보면 참으로 어렸다는 생각부터 듭니다. 사람을 너무 쉽게 믿고 그들에게 끊임없이 내면의 결핍을 투사하며 사랑을 갈구했던 시절, 애정결핍의 전형과도 같았던 저를 안쓰럽게 여겨준 사람은 부모님뿐이었습니다. 돌아가시는 순간까지 철없고 어리석은 딸을 걱정하셨던 아버지, 아버지께 저는 아픈 손가락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다시 성당에 나가기 시작했지만 내면의 결락은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여전히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받았고 나름 순수하게 베풀었던 친절과 배려를 악용하는 경우를 접하면서 점점 인간에 대한 믿음을 지워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디에도 마음 둘 곳 없이 방황하며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만 키워가던 제 참담한 심정을 추기경님은 헤아려 주시리라 믿습니다.

가톨릭 교회 고위 성직자였던 추기경님은 결코 당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권력을 휘두르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변방에 머물러 소외받고 배척당했던 작은 이들 곁에 머물러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추기경님. 생전 막역한 친분을 쌓으셨던 故 정일우 신부님은 상계동 철거민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가 몇 시간이나 머물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셨던 추기경님을 애틋한 눈빛으로 회상하기도 하셨습니다.
그저 말없이 곁을 내어주며 그들의 서러운 속내에 귀를 기울이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져주는 것. 낡고 허름한 판자촌에서 세상에 대한 분노와 울분을 힘겹게 삭히며 살아가던 그들에게 아낌없는 사랑과 온기를 베풀어주셨던 추기경님.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국민들의 인권을 유린했던 유신 시대, 추기경님은 누구보다 목소리를 높여 독재 정권과 마주하셨고, 죄없이 희생당한 무고한 목숨들에 대한 연민을 거두지 않으셨습니다.
문득 성모님의 노래 '마니피캇' 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인류의 구세주를 잉태하고도 어떤 특권도 누리지 않으신 채 묵묵히 하느님 뜻에 맞갖은 겸손과 사랑을 실천하셨던 성모님. 가난하고 약한 이들에겐 한없이 인자하셨지만, 약자를 기만하고 탄압하는 기득권자들의 위선엔 단호하게 맞서셨던 추기경님의 인품은 아마 성모님을 닮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과거에 대한 회한과 자책으로 마음이 괴롭고, 인간 본질에 대한 회의감을 견디지 못해 삶이 괴로울 땐 추기경님의 인자한 미소를 떠올립니다.
소중한 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가장 슬픈 일은 다시는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라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가끔 돌아가신 아버지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왈칵 밀려올 때, 그 말이 얼마나 처연하게 가슴에 와닿던지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흐르더군요. 추기경님이 돌아가셨을 때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셨던 아버지. 두분의 생생한 육성을 들을 순 없지만 하느님 곁에서 평온한 안식을 누리고 계실 두분을 떠올리면 입가엔 자연스레 웃음이 지어집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이 순간, 제 어깨를 다독이시는 추기경님의 다정한 손길이 느껴집니다.
이제까지 저지른 죄악과 허물들로 마음이 무거워 주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방황하던 제 귓전에 추기경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갑니다.
'괜찮아.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해... 하느님 앞에서 완전무결한 사람은 없어.'

영원한 자의 빛, 영원에 대한 신앙. 추기경님의 말씀 항상 기억하며 살아가겠습니다.

하늘에서 다시 뵐 날을 기다리며 막달레나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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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아 떠나다! - 제임스 마틴 신부
제임스 마틴 지음, 성찬성 옮김 / 가톨릭출판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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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도 이해하실 수 없는 게 세상엔 더러 존재하지요. 예를 들자면...예수회 사제들 속내라든가." 영화 <Pope Francis>에 등장하는 대사다. 형식적인 규율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신앙의 본질에 누구보다 충실한 교황님의 신심과 덕행을 절로 가슴에 새기게 됐던 대사였다. 그 시점부터 교황님을 비롯 예수회 사제들에 대한 호기심이 싹트기 시작했고 그분들의 저서를 읽으며 예수회 특유의 독특한 영성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됐다. 제임스 마틴 신부의 <나를 찾아 떠나다!>도 그런 연유에서 선택한 책이었다. 순종과 정결을 미덕으로 삼으면서 가난한 삶을 지향하는 사제들과 비슷한 결을 가졌지만 제임스 마틴 신부의 여정은 다소 남다르다. 어린 시절부터 성당에 다니며 남다른 신심을 키워가다 부르심에 응답해 성소를 품고 살아가는 보편적 사제의 삶과 다른 행보가 이 책엔 담겨 있었다.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며 대기업에 입사해 뉴욕에서 화려한 커리어를 쌓아갔던 신부는 누구나 선망하는 주류의 삶을 영위했고, 영적인 갈망이나 영성적 깨달음은 그와는 거리가 먼 세계처럼 여겨졌다. 부모님을 따라 잠깐 성당에 다녔던 유년기 시절의 관성을 따라 가끔 미사에 참례하긴 했지만, 단순한 기복 신앙을 넘어서지 못했고 부르심의 은총은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듯 보였다. 직장 생활의 갈등과 피로가 누적되고, 부모님이 별거를 시작하면서 그의 일상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제까지 구축해온 여피적 삶에 균열이 찾아온 것이다. 생전 읽지도 않았던 영성 도서를 탐독하고, 토마스 머튼의 <칠층산>을 읽으며 예수회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관련 책자를 뒤적이며 성소에 대해 고민했지만 그는 주저한다. 부르심에 대한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속과 완전히 인연을 끊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은 엄청난 결단과 용기가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개념조차 희박했다. 직장 생활에서 겪는 좌절감과 매너리즘, 인간관계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고 뉴욕이란 대도시의 화려함은 공허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면의 결락을 메우기 위해 그는 예수회 입회를 결정한다. 주변의 충고와 만류를 뿌리치고 세상과 인연을 끊은 것이다. 처음엔 그의 선택이 다소 무모하게 여겨졌다. 당장 눈 앞의 어려움을 피하기 위해 도피처로 예수회를 선택한 것처럼 보였다. 경쟁심을 조장하는 기업 세계 특유의 냉혹함과 인간성 경시, 물질중심적 가치관에 대한 환멸을 견디지 못해 예수회 입회를 서둘렀지만 그에겐 신앙의 본질에 대한 기본적 성찰이 부족했다. 대기업 문화에 익숙한 젊은이가 금욕과 절제를 기본 모토로 깔고 있는 수도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런지 우려가 됐다. 그러나 부르심의 은총은 그를 전혀 다른 차원의 세계로 인도했다. 성찰과 내려놓음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고 매 순간 하느님께 닿으려는 그의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기 시작했다. '예수님과 함께 있고, 그분과 동행하고, 좋은 친구에게 의지하듯이 그분에게 의지할 수 있으면 정말 좋을 것 같았다. p.176' 예수님을 친구처럼 의지하면서 기도와 봉사로 영성 생활에 매진하던 그는 '기도의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이심을 깨닫게 p.221' 된다. 사소한 일마다 지시를 받는 일상이 적잖은 스트레스로 다가왔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 현존을 느끼며 신부는 기도와 묵상, 봉사에 집중한다.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을 돌보며 가끔 육체적 혐오감을 느낄 때도 있었지만 점점 의식이 꺼져가는 그들에게 연민을 느꼈다는 기록은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하루하루 죽음과 가까워지는 그들의 모습은 고통받는 예수님과 닮아있었다. 부활의 찬란한 영광보다 십자가 고통을 가슴에 새기고 살아가는 운명,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자 영성의 본질이라는 깨달음이 강하게 와닿았다. 대기업의 과도한 경쟁 구도와 서열 문화 안에서 늘상 인정 욕구에 시달리며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부쳤던 지난 날을 돌아보며 신부는 고백한다. '기도와 진짜 신앙은 거룩한 사람들의 몫이지 나와는 상관없었다. 하느님은 아주 멀리 계시는 것처럼 보였다. (중략) 예수회원으로서의 내 삶을 채우고 있는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 나를 덮쳐 왔다. p.373' 불완전한 인간 본질에 대한 통찰은 우리를 언제나 용서하고 사랑하며 기다리시는 예수님에 대한 순명으로 그를 이끌었으며 전혀 다른 존재로 그를 각성시켰다. 병원에서 일하며 죽음을 준비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며 예수님의 삶을 묵상하고, 십자가 수난으로 구원을 완성하셨던 그분의 신비는 완전히 신부를 사로잡았다. 나자렛의 평범한 소녀였던 성모님의 잉태처럼 전혀 생각지 못했던 삶의 초대로 그는 예수회 사제의 길을 걷게 됐고 세속적 타성에 물들었던 과거를 떠나보내게 된다. 하느님과 무관한 인생을 살아왔노라 거듭 강조했던 제임스 마틴 신부. 책을 읽으면 그런 고백이 겸손의 표현으로 느껴질 정도로 부르심의 은총은 매 순간 신부에게 열려있었다. 여피적 정체성에 충실했던 젊은 시절, 간헐적으로 바쳤던 기도 안에서 천사는 그의 귓가에 속삭였을 것이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루카 1,28>
가브리엘 천사의 방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던 성모님, 구세주의 어머니로 새로운 삶을 시작한 성모님처럼 하느님께 불가능한 일은 아무 것도 없었다.
하느님 안에서 전혀 다른 존재로 거듭난 제임스 마틴 신부의 거룩한 여정에 오직 은총만 충만하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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