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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착해, 너무 바보 같아
델핀 뤼쟁뷜.오렐리 페넬 지음, 조연희 옮김 / 일므디 / 2022년 9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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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행이 단정하며 말씨가 곱고 심성이 착하다'
고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적힌 글이다. 담임 선생님뿐 아니라 반 친구들도 비슷한 말을 했다.
'정민이는 착해.'
다른 친구들의 생활기록부에는 '용모가 수려하고 다재다능하다', '머리 회전이 빠르고 매사 진취적이다' 같은 평가가 적혀 있었다. 그래도 부럽지는 않았다. 그때는 '착하다'는 말도 그에 못지않은 칭찬이라 믿었으니까.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착하게 살고 싶었다. 다만 착하게 사는 데도 기술과 맷집이 필요하다는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박미옥, 『형사 박미옥』
나 역시 그 기술을 알지 못했다. 많이 베풀수록 좋은 사람이라고 믿었고, 거절하거나 경계를 세우는 일은 타인과 담을 쌓는 일이라 여겼다. 부당한 요구를 거부하지 못했고, 불편한 말을 들어도 제대로 맞서지 못했다.
자기 좋을 대로 약속 장소를 정하는 친구, 만날 때마다 외모를 지적하며 상처를 주는 친척들, 무례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 지인들 앞에서도 나는 말없이 고개만 숙였다. 미움받고 싶지 않아서, 혼자 남겨지기 싫어서.
그런 내게 사람들은 말했다.
'정민이 넌 너무 착해서 탈이야. 요즘 세상에 너 같은 앤 바보나 다름없어.'
그때부터였다. '착하다'는 말이 더 이상 칭찬이 아니라 악담처럼 들리기 시작한 것은.
<너무 착해, 너무 바보 같아/델핀 뤼쟁뷜, 오렐리 페넬 著>는 자신의 기준과 감정을 외면한 채 타인에게 맞추기만 하는 태도를 문제로 지적한다.
친절은 훌륭한 자질이지만 적절한 곳에 커서를 두지 않는다면 약점이 될 수 있다. p.19
친절 자체는 문제가 될 수 없다. 문제는 어디까지 베풀고, 어디에서 멈출 것인지 스스로 정하지 못할 때 생긴다. 친절과 단호함을 물과 기름의 관계로 이해해선 안된다. 자신의 경계를 지키면서도 타인을 배려할 수 있고, 때로는 단호한 거절이 나를 지키는 동시에 관계가 한쪽으로 기울지 않게 중심을 잡아준다.
과한 친절은 타인의 경계를 반복해서 시험하는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쉽다. 선을 넘는 언행으로 상처를 주다가도 가끔 떼쓰는 아이를 달래듯 달콤한 말을 건네며 다가오는 사람도 있다. 그 과정이 반복되면 어디까지가 호의이고 침해인지 판단하기 어렵게 된다.
올바른 호의는 제대로 된 질서 위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기억하자. 혹시라도 계속해서 나를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면 피하자. 상황을 휘두르려는 사람들은 문제의 원인이 남에게 있다고 믿게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p.110
수시로 나를 깎아내리고 관계에서 늘 우위를 점하려던 지인이 있었다. 만날 때마다 공격적인 말투로 약점을 건드리는 그 애가 싫었지만, 쉽사리 관계를 끊어내지는 못했다.
왜 그랬을까.
돌이켜보면 그 애의 무례보다 내 판단을 먼저 의심했다. 내가 너무 예민한 건 아닐까, 이 정도 일로 사람을 끊어내는 게 맞는 걸까. 그래도 십 년을 알고 지낸 사이인데. 그래서 참았다. 언젠가는 내 진심이 통할 거라 믿으며.
하지만 그런 순간은 기어이 오지 않았다. 그때의 나는 몰랐다. 무조건 참는다고 해서 상대가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내 진심만으로 타인의 태도까지 바꿀 수는 없다는 걸.
친절에는 질서가 필요하다. 상대의 감정을 헤아리는 것과 상대가 저지른 잘못까지 떠안는 것은 다르다.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무조건 참고 견디는 일이 언제나 선의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유념해야 한다. 표현하지 못한 불만이 쌓이면 친절은 의무로 굳어지고, 결국엔 감정적 부채가 되어 관계를 무너뜨린다.
친절이란 항상 좋다고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싫다는 대답도 현명하게 할 줄 아는 것이다. p.126
생활기록부에 적힌 몇 줄의 글 앞에서 해맑게 웃는, 열일곱 살의 나를 떠올려 본다. 눈에 띌 만한 외모도, 특별한 재주도 없는 지극히 평범한 여고생. 반짝반짝 빛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연신 미소를 띠고 있는 어린 나에게 가만히 속삭여본다.
"그 종이에 적힌 글이 너를 슬프게 할 때가 올 거야. 남에게 싫은 소리 못하고 혼자 우는 날들도 늘어날 거야. 착하다는 말이 더는 너를 웃게 하지 못할지도 몰라. 하지만 너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야. 상대를 배려하면서도 온전히 너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걸. 싫다고 말하면서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걸. 친절과 단호함은 얼마든지 공존할 수 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