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다른 이들이 상처를 입을 수 있다는 것, 우리가 다른 사람의 변덕 때문에 죽을 수도 있다는 것, 이 모두는 공포와 슬픔의 이유이다. (-) 중요한 것은 전쟁에 대한 절규 외에 슬픔으로부터 정치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묻는 것이다.
상해를 겪은 뒤 깨닫게 되는 것 중 하나는 나의 삶이 의존하는 사람들, 내가 알지 못하고 또 알 수도 없을 사람들이 저기 밖에 있다는 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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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삶은 애도할 만한 것이고 어떤 삶은 그렇지 않다. 어떤 종류의 주체가 애도되고 애도되어야 하며 어떤 종류의 주체가 애도되어서는 안 되는가를 결정하는 애도성의 차별적인 할당은 누가 규범적으로 인간인가―무엇이 살아 있을 만한 삶과 애도할 만한 죽음으로서 가치가 있는가?―에 대해 어떤 배타적인 개념을 생산하고 유지하도록 작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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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 영역은 부분적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what cannot be said)과 보여질 수 없는 것(what cannot be shown)으로 구성된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의 경계, 보여질 수 있는 것의 경계는 정치적 발화가 작동하고 어떤 특수한 종류의 주체들이 생존 가능한 행위자들로 등장하는 영역의 구획을 정한다. (-)
(-) "적"의 얼굴에 대한 매체의 재현은 레비나스가 보기에 "얼굴"과 관련해 가장 인간적인 것을 삭제한다. (-) 이는 또 (-) 공적으로 승인된 나타남(appearence)의 장의 한계와 관련해서도 중요하다. 얼굴이 없는 채 남겨진 이들, 우리에게 너무 많은 악의 상징으로 제시되는 얼굴을 가진 이들은 우리가 제거해왔던 이들의 삶, 즉 애도성이 무한히 지연되어야 하는 이들의 삶 앞에서 우리가 무감해질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다. 어떤 얼굴은 승인되어 공적 관점이 되어야 하고, 삶 아니 모든 삶의 가치의 합의를 더욱 날카롭게 보여주고 들려주어야 한다. (-) 애도의 능력이 없다면 우리는 우리가 폭력에 대항하는 데 필요한 삶에 대한 더욱 예리한 느낌을 잃게 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다. 물론 애도는 어떤 사람에게는 오직 폭력을 통해서만 해소될 수 있겠지만, 폭력은 더 많은 상실을 낳을 뿐이고 그 결과 불확실한 삶의 오청을 배려하지 못함으로써 건조한 슬픔으로서 영원히 지속될 정치적 분노만을 양산할 것임은 불 보듯 뻔하다. (-)
(-) 어떤 생각을 드러내는 일은 곧 온갖 위험을 감수하는 일이고 가증스러운 호칭의 오명을 뒤집어쓴 채 모욕을 받는 일인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그런 조건 하에서 계속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호칭의 진실을 무시해야 할 뿐 아니라 공적 영역에서 들러붙는 오명을 무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 우리는 위협적으로 들러붙는 무시무시한 동일시를 피하기 위해 더 이상 말하지 않거나 약한 방식으로 말하게 된다. 불일치를 진압하고 비판적 논쟁의 범위를 제한하려는 이런 전략은 (-) 모욕 주기 술책을 통해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공적 영역 안에 합리적인 의견과 생존 가능한 발화주체로서 포함될 수 있는 것과 포함될 수 없는 것을 생산하면서 역시 작동한다. 이는 (-) 이른바 생존 가능한 말하는 존재(visible speaking being)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잃고 싶지 않기에 그렇게 된다. 동일시와 생존가능성의 의미를 규제하는 사회적 조건 하에서, 검열은 암묵적으로 또 강제적으로 작동한다. (-)
(-) 국가주의적 규범과 일치하지 않는 생각을 보유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말하는 사람으로서 신용을 결핍하게 될 것이고 매체는 그/그녀에게 개방되지 않을 것이다(-).
(-) 이는 또한 어떤 삶이 삶으로서 표식될 수 있고 어떤 죽음이 죽음으로서 포함될 수 있는가를 확립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느끼고 이해하는 우리의 능력은 미지수다. 그러나 전쟁의 결과에 대해 비판적으로나 공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뿐 아니라 어떤 삶들과 죽음들의 실재의 운명 역시 미지수다.
(-) 이스라엘 국가는 "테러리스트"라는 단어를 사용해 거의 모든 팔레스타인인들의 저항의 행위를 기술하려고 하면서도 정작 자국의 모든 폭력 실제에 그 단어를 사용하는 일은 없다. 체첸의 독립투쟁을 기술하면서 푸틴 역시 그 단어를 사용하는데, 그 경우 체첸 지역에 대한 소련의 폭력적인 행위는 국가적 자기 방어의 행동으로 정당화된다. 미국은 그 단어를 사용해서, (-) 논의의 여지가 없는 폭력의 희생자인 양 자신의 위치를 잡는다. 그러나 폭력을 겪는다는 것과 폭력을 겪었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다음과 같은 틀, 즉 자신의 고통의 출처와 꼭 연관이 없을지도 모르는 과녁을 향해 무제한적인 공격을 가할 수 있도록 자신의 상해를 정당한 것으로 인정할 틀의 토대로 삼는 것은 별개의 문제이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논점은 폭력을 이해하려는 틀은 폭력의 경험과 나란히 등장하며 그 틀은 어떤 질문들, 어떤 역사적 탐구들은 제외하면서 보복의 도덕적 정당화로 기능하기 위해 작동한다는 점이다. (-)
이러한 설명 틀에는 서사의 차원도 존재한다. 미국에서 우리는 9월 11일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를 이야기할 때 1인칭 서사 관점을 사용한다. (-) 빈 라덴이 가족과 갈라선 이유가 무엇인지 그가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등등. 이런 식의 이야기는 어느 정도는 흥미롭다. 개인적 병리학이 작동하고 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이런 서사는 부분적으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 개인의 책임이라는 우리의 관념과 일치하는 것, 아니면 2차 세계 대전 무렵 무솔리니와 히틀러를 통해 대중화되었던 카리스마적인 지도력 이론과 일치하는 것, 즉 행위주체성(agency)의 위치를 다시 주체의 관점에 두기에 그럴듯하고 매력적인 서사이다.
(-) 우리는 파괴된 삶과 살해된 사람들을 우리가 책임져야 할 것의 신호로 여기지 않으며, (-) 우리의 행위는 테러로 간주되지 않는다. 9.11 사건과 관련된 선사 역시 존재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이야기를 다른 식으로 들려주기 시작하는 것,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가를 묻는 것은 이미 행위주체성의 문제―도덕적 다의성(moral equivocation)의 공포를 낳을 것이 분명한―를 복잡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행위를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전히 잘못된 행위로 비난하기 위해서라면, 또 정념의 구조―우리를 한편으로는 희생자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정당한 대의인 바 테러의 근절에 관여한 것으로 만드는―를 유지하려면, 우리는 우리가 겪었던 폭력의 경험과 함께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 나는 9월 11일과 함께 시작하는 이야기가 말해져서는 안 된다는 주장을 하는 게 아니다. 그 이야기들은 들려야 한다. 비록 엄청난 외상이 이런 사례에서 서사 능력을 훼손시키고 있기는 하지만 현재 그 이야기들은 들리고 있다. (-) 좌파인 내 친구들은 농담 삼아 제1세계인이라는 자기만족을 상실했다고 이야기한다. 물론 이것은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다. 그러나 그 상처를 아물게 하는 방식으로 그런 자기만족을 회복해야 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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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미국이 과거에 뿌린 씨를 거두어들인 것이라는 식의 좌파의 분석도 분명 존재한다. (-) 그런 설명은 닫힌 설명, 즉 미국의 우선권을 단언하고 미국의 전지전능함을 약호화하는 여러 방식 중 하나에 불과하다. (-)
(-) 조건은 개별 행위주체의 방식으로 "행동"하지 않으며 어떤 행위주체도 조건 없이 행동하지는 않는다. 조건은 우리가 하는 것 안에 전제로 들어와 있다. 그러나 마치 조건이 우리를 대신해 행위하는 양 그 조건들을 인격화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
(-) 이 질문에 대답하려면 잠정적으로 개인의 책임과 집단의 책임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 폭력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은 분명 폭력 행위에 책임이 있다. 그들은 비개인적인 사회적 힘에 조종당하는 기계나 얼간이가 아니라 책임감을 갖춘 행위주체들이다. 그들 개인들은 만들어진 사람들이고 만약 그들의 행위를 순전히 자생적인 의지나 개인적인 병리 혹은 "악"의 징후로 축소하려 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개인주의 담론과 도덕주의(-) 담론은 모두 책임(accountability)의 의미를 이루는 인과론적인 사슬의 첫 번째 고리를 개인으로 본다. 그러나 개인의 자생적인 행위를 도덕적 추론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어떤 세계가 그런 개인을 생기게 했는지를 물을 수 있는 가능성을 폐제하는 것이다. (-)
(-) 이것은 조건과 행위의 관계를 다시 사유하려는 것이다. 우리의 행위는 자생적이지 않다. 우리의 행위는 조건화된다. 우리는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영향을 준다. 우리의 "책임감"은 그 둘의 접합 지점에 놓여 있다. 나를 형성한 조건들을 갖고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 조건들을 바꾸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 이렇게 보면 우리가 한 것을 최종적으로 책임지는 것이 우리에게 영향을 가한 힘들이 아닐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이들의 폭력에 종속되어 있었다면, 어떤 식으로건 또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책임감은 고양된다. 우리는 폭력적으로 영향을 받은 것이고 그런 경우들에서 행동을 개시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완전히 훼손된다. 폭력을 겪고 난 후에야 비로소 우리는 할 수 없이 그 폭력적인 상해에 어떻게 반응할 것인가를 윤리적으로 묻게 된다. 폭력의 역사적인 경주에서 우리는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 걸까, 그 폭력에 반응하면서 우리는 누구로 바뀌는 걸까, 우리가 보인 반응으로 인해 폭력이 조장될까 아니면 폭력이 저지당할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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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마음을 빼앗은 질문은 이렇다―누가 인간으로 간주되는가, 누구의 삶이 삶으로 간주되는가, 끝으로 무엇이 애도할 만한 삶으로 중요한가. 우리가 속한 위치와 역사는 모두 다르지만 나는 "우리"에 호소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누군가를 잃는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상실은 우리 모두를 갖고서 희박한 "우리"를 만들어왔다. 만약 우리가 상실했다면, 그로부터 결과하는 것은 우리가 갖고 있었다는 것, 우리가 욕망하고 사랑했다는 것, 우리가 우리의 욕망의 조건을 찾으려고 고군분투했다는 것이다. (-) 다른 상실도 존재한다. (-) 여성과 소수자들은 하나의 공동체로서 폭력에 종속되어 있고, 폭력의 실현은 아니라고 해도 폭력의 가능성에 노출되어 있다는 사실도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우리 각자는 부분적으로는 우리의 신체―욕망과 물리적 취약성의 부지로서의, (-)―의 사회적 취약성에 의해 정치적으로 구성된다는 것이다. 사실과 취약성은 우리가 사회적으로 구성된 신체들이고 다른 이들에 대해 상실의 위험을 무릅쓰면서 애착심을 갖는다는 것, 다른 이들에 노출됨으로써 폭력의 위험이 있음에도 그들에게 노출된다는 것에서 유래하는 것 같다.
나는 언제 애도가 성공적인지, 아니 언제 우리가 다른 인간을 완전히 애도하게 되는지를 안다고 확신하지는 못한다. (-) 그러나 나는 (-) 누군가가 다른 누군가를 잊어버렸거나 혹은 그밖에 어떤 다른 것이 그것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성공적인 애도의 의미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애도는 자신이 겪은 상실에 의해 자신이 어쩌면 영원히 바뀔 수도 있음을 받아들일 때 일어난다. 애도는 사전에 미리 그 결과를 완전히 알 수 없는 그런 변형을 겪기로(변형에 굴복한다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동의하는 것과 관련이 있다. (-) 나는 가령 상실이 일어났을 때 프로테스탄트 윤리를 환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음, 난 이런 식으로 상실을 겪을 거고 저게 그 결과일 거야. 난 그 임무에 전념할 것이고 내 앞에 놓인 슬픔의 해결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할 거야"라고 말할 수는 없다. 갑자기 파도가 급습하고 (-) 자신이 실패했음을 알게 된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추락했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소진될 것이지만 이유는 알지 못한다. (-)
뭔가가 당신을 붙잡는다. 그건 어디서 왔을까? 그것은 어떤 의미인 걸까? 우리가 우리의 주인이 아니게 되는 그런 순간들에 무엇이 우리를 요구하는 걸까? 우린 무엇에 묶인 걸까? 아니 우린 무엇에 붙들린 걸까? 프로이트는 우리가 누군가를 잃을 때, 잃어버린 그 사람 속에 무엇이 있는지는 항상 알지는 못한다는 점을 환기시켰다. 따라서 상실이 일어날 때 우리는 수수께끼 같은 것에 직면하기도 한다. 즉, 무엇인가가 상실 속에 숨어 있고 무언가가 상실의 후미진 깊은 곳에서 상실된다. 애도는 자기가 무엇을 상실했는지 아는 것을 포함한다면(그리고 우울증은 원래 어느 정도는 무지(not knowing)를 의미한다), 애도는 그 수수께끼적인 차원, 우리가 완전히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상실함으로써 야기된 무지의 경험에 의해 유지되는 것일 게다.
누군가를 잃을 때, 또는 어떤 장소나 공동체에서 쫓겨날 때 우리는 뭔가 일시적인 것을 겪고 있을 뿐이라고, 애도는 끝날 것이고 그 전의 질서를 회복할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행한 것을 겪을 때, 우리가 누구인지와 관련된 어떤 것, 우리가 다른 이들과 맺은 인연을 묘사하는 어떤 것, (-) 다름 아닌 인연이나 유대가 우리를 구성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어떤 것이 드러난다. 이것은 마치 이쪽에 "나"가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단지 저쪽에 있는 "당신"을 상실한다는, 특히 "당신"에 대한 애착이 "나"의 모습을 구성하는 일부라는 그런 의미는 아니다. 그런 조건 하에서 당신을 잃는다면 나는 (-) 나 자신에 대해서도 수수께끼처럼 알 수 없게 된다. 당신이 없다면 나는 누구"인가"? (-) 어떤 층위에서는 나는 "당신"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하지만 "나" 역시도 사라졌음을 알게 될 뿐이다. 내가 어떤 어휘도 미리 마련해두지 못했던 것은 배타적으로 나 자신 혹은 당신 어느 것으로도 구성되지 않는 관계성(relationality), 나와 당신이란 항을 차별화하고 연결하는 인연으로 볼 수 있는 관계성이다.
(-) 나는 슬픔이 복잡한 수준의 정치 공동체의 느낌을 제공하고, 슬픔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근본적인 의존성과 윤리적 책임감을 이론화하는 데 중요한 관계적 끈을 강조함으로써 그렇게 한다고 생각한다. (-)
(-) 그런 관계들을 설명할 때 사람들은 내가 그 관계를 "갖고" 있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갖고 있음"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 나는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고 당신에게 그것들을 열거하려고 할지 모른다. 나는 이 우정이 무슨 의미를 갖는지를, 그 애인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고 지금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할지 모른다. 나는 나의 관계들을 이야기하는 초연한 내레이터처럼 그 사례들을 통해 나를 구성하고 있을지 모른다. 나의 초연함을 극화하면서, 내가 간신히 보여줄지도 모르는 것은 내가 증명하고 있는 초연함의 형식이 바로 자신의 관계성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하고 있고 그 관계성을 하나의 옵션으로, 즉 근본적으로 나를 지속시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건드리지 않는 어떤 것으로 환기하고 있다는 점일 게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슬픔이 전시하는 것은 우리가 항상 열거하거나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제공하려고 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자의식적인 설명을 종종 방해하는 방식으로, 우리가 자율적이고 강한 자신감에 차 있다는 바로 그 생각에 도전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의 속박에 묶여 있는 우리의 모습이다. (-) 나는 내가 선택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지만 결국 그 과정 어딘가에서 바로 그 관계가 나를 사로잡고 나를 망친 방식을 드러낼 것이다. 나의 서사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듯 비틀거린다.
외면하지 말자. 우리는 상대방 때문에 훼손된다. 그게 아니면 우리는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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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갖고 있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정치적 곤궁에 대해 혹여 내가 "주장"할 수 있다면, 주장할 것이다. "권리"란 말을 듣게 되는 경우 우리는 대부분 권리는 개인에게 속한다고 생각한다. 차별에 맞서 보호를 주장할 때 우리는 집단이나 계금으로서 주장한다. 바로 그 언어와 바로 그 맥락 안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뚜렷하게 경계가 정해진 존재―즉 법 앞의 개별적인, 인지 가능한, 묘사된 주체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몇몇 특질들에 의해 정의된 공동체―로 제시해야 한다. 우리는 그 언어를 사용해서 법적인 보호와 법적인 자격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가 법적으로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를 틀로 삼고 우리가 무엇에 관한 존재인가를 설명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당연히 우리는 이 언어 덕분에 자유주의적인 인간 존재의 판형에 안전하게 몸을 숨긴 법적인 틀 내부에서 우리의 정당성을 확립할 수 있겠지만, 그 언어는 열정, 슬픔, 분노를 공정하게 평가하진 못한다. 열정, 슬픔, 분노, 이 모두는 우리를 우리 자신으로부터 뜯어내어서 다른 이들에게 결속시키고 우리의 자리를 이동시키고 우리를 훼손시키고, 우리 자신의 삶은 아닌 삶들에 숙명적으로는 아니라고 해도 뒤집을 수 없을 만큼 휘말려들게 하는 것들이다.
(-) 우리는 말하고, 다른 이를 대신해서 말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 그러나 타자와 나 자신의 차이를 붕괴시킬 만한 방법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라고 말할 때 우리는 바로 그 문제틀을 가리키는 것 외에 다른 어느 것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문제틀을 해결하지 못한다. 아마 그 문제틀은 해결 불가능할 것이고 또 해결 불가능한 것이어야 한다. 이렇듯 우리 스스로를 우리 밖에 배치하는 일은 신체적 삶으로부터, 신체의 취약성과 신체의 노출로부터 결과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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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는 도덕성, 취약성, 행위주체성을 함축한다. 즉 피부와 살 때문에 우리는 다른 이들의 시선에 노출되며 또 접촉과 폭력에도 노출된다. 신체 때문에 우리는 행위주체가 되고 이 모든 것들의 도구가 되어야 하는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우리는 우리의 신체에 대한 권리를 위해 투쟁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의 투쟁의 목적인바 신체가 꼭 우리 것은 아니다. 신체에는 항상 공적인 차원이 있다. 공적 영역에서 사회적 현상으로 구성되는 나의 신체는 나의 것이며 또 나의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타자들의 세계에 배당된 신체는 타자들의 자국을 지니고 있고 사회적 삶의 도가니 안에서 형성된다. (-)
(-) 우울증 환자의 나르시스트적 몰입이 자리를 이동해서 다른 이들의 취약성에 대한 고려로 바뀔 수 있다면, 그것은 새로운 이해를 위한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어떤 인간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보다 더 취약하고 따라서 어떤 인간의 삶이 다른 사람들의 삶보다 더 슬픔이 되는 그런 조건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면서 그런 조건에 반대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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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취약성을 박탈로 이해하려면 반드시 좌절된 욕구를 이해해야 한다. (-) 이런 일차적인 조건이 어떻게 착취될 수 있고 또 착취당하는지, 좌절되고 부인되는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인간이 어떻게 억압으로 신음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다. (-) 삶은 다르게 지지되고 유지된다. 인간의 물리적 취약성이 전 지구에 배포되는 방식은 철저히 다르다. 어떤 삶들은 철저히 보호받을 것이고 존엄성에 대한 그들의 요청이 파기된다면 이는 전쟁력을 동원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다른 삶들은 그런 즉각적이고 격렬한 지원을 찾을 수 없을 것이고 "애도할 만한" 것으로서의 자격마저도 얻지 못할 것이다.
아마 애도의 서열을 열거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미 신문 부고란의 양식에서 그것을 확인했다. 거기서 삶들은 재빨리 정돈되고 요약되고 인간화되고 그 와중에 삶들은 통상 이성애적인 행복한 일부일처제로 합쳐진다. 그러나 이것은 삶에 대한 또 하나의 차별적인 관계를 나타내는 표시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미국의 지지를 받는 이스라엘 군대에 살해당한 수천 명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름, 아프간의 어린이들과 성인의 숫자와 관련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이름들, 얼굴들, 개인적인 이야기들, 가족, 좋아하는 취미, 슬로건이 없는가? 군사적 수단에 의해 야기된 죽음을 받아들일 때 유쾌하게 그저 어깨를 한번 으쓱하면서 자기 정당성을 표하거나 분명한 복수삼을 표한다면, 우리는 도대체 어떤 방어기제를 작동시켜 상실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고 있는 것일까? 오늘날 작동하는 휴머니즘이 "서구적인" 주형틀을 이용해서 "인간"이란 개념을 자연화한 것이라면 아랍인들, 특히 이슬람교를 실천하는 아랍인들은 어느 정도나 "인간" 밖으로 낙오된 것일까? 여기서 작동하는 인간의 문화적인 윤곽은 무엇일까? 인간에 대해 사유하는 우리의 문화적 틀은 우리가 상실로서 인정할 수 있는 종류의 상실에 어떻게 제한을 두게 되는 걸까? 결국 누군가를 잃을 때, 그리고 그 사람이 특별한 사람이 아니라면 상실은 무엇이고 상실은 어디에 있는 것이며 애도는 어떻게 일어날까?
마지막 질문이 바로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 연구가 성적 소수자들에 대한 폭력과 관련해서 제기해왔던 질문이다. 트랜스-젠더화된 사람들은 자신들이 학대, 가끔은 살인의 표적이 되었을 때 그 질문을 제기한다. 규범적인 인간 개념, 인간의 신체가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한 규점적인 개념을 빌미로 종종 원하지 않는 신체적 폭력을 감당해야 했던 형성기를 거쳐서 간성화된(intersexed) 사람들이 그 질문을 해왔다. (-)
(-) 폭력의 관점에서 그들의 삶은 이미 부인되고 있는 것이기에 그들의 삶을 훼손하거나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이상한 방식으로 살아 움직이고 있기에 다시(또 다시) 부인되어야만 한다. 그들은 이미 항상 상실되었거나 결코 "존재한 적"이 없기에 애도될 수 없고 그들은 이런 죽음(deadness)의 상태로 고집스럽게 계속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기에 살해되어야만 한다. (-)
(-) 세계 무역 센터에서 사라진 사람들이 최후에 겪었던 일에 대한 복잡다단한 보도는 영혼을 압도하는 매우 중요한 이야기들이다. 그 보도는 사람들을 매혹시키고, 두려움과 슬픔의 감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강렬한 동일시를 생산한다. 그러나 이 서사들이 어떤 인간화하는 효과를 갖는지는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이 점을 통해 내가 의미하려는 것은 (-) 그 보도들이 그 장면을 무대화하고 그러한 애도가능성 안에서 "인간"을 확립하는 서사적 수단을 제공한다는 점이다. (-)
다니엘 펄을 애도하는 일은 나나 우리 가족의 혈통에게는 아무런 문제도 제기하지 않는다. 그는 친숙한 이름, 친숙한 얼굴이고 이는 내가 이해하고 공유하는 교육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의 부인이 받은 교육은 그녀의 언어를 나에게 친숙하게, 심지어 감동적이게 만드는데, 이는 비슷한 것들의 가까움 때문이다. 다니엘 펄과 관련해서 나는 낯선 것(the unfamiliar)의 가까움, 즉 새로운 동일시의 유대를 만들어내고 언제나 공통의 인식론적 문화의 토대를 가정할 수는 없을 인간 공동체에 속하는 것에 대해 다시 상상하게 만드는 차이의 가까움에 불안해지지는 않는다. 그의 이야기는 나를 집으로 데리고 가 그곳에 편안히 머무르라고 유혹한다. 그러나 친숙한 것을 인간의 삶을 애도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기준으로 삼을 때 우리가 치르는 대가는 도대체 어떤 것일까?
(-) 나는 내가 "당신"에게 묶이는 방식을 발견하고 번역함으로써, 그러나 내가 당신을 알고자 한다면 나의 언어가 깨지고 굴복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됨으로써만 "우리"를 모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