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락
필립 로스 지음, 박범수 옮김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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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마력을 잃고 말았다. 욕구가 소진된 것이다. 그는 무대에서 단 한 번도 실패해본 적이 없었고, 그의 연기는 하나같이 감동적이고 성공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도저히 연기를 할 수 없었다. 무대에 오르는 것 자체가 고통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연기를 훌륭하게 해내리라 확신하는 대신 실패하리라는 걸 알았다. 내리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일어났다. 마지막에는 아무도 그의 연기에 관심을 갖지 않았고, 아무도 보러 오지 않았다. 그는 관객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재능이 죽어버린 것이다.
(-) 명성을 안겨주었던 그의 분위기, 그의 모든 버릇과 기벽, 그리고 그만의 특색 가운데 어떤 것도 이제 그가 맡은 배역에서 전혀 힘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를 그이게 만들어주었던 모든 것이 이제는 그를 미치광이로 보이게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최악의 연기로 무대에 서 있다는 걸 매 순간 의식했다. 예전에는 연기할 때 어떠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의 훌륭한 연기는 본능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이제 그는 온갖 생각을 했고, 거침없고 활력 넘치던 모든 것이 죽어버렸다. (-)
(-) 그는 이제 모든 연기가 두려웠고, 온종일 두려움에 떨었다. 평생 단 한 번도 공연 전에 해본 적 없는 생각들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실패할 거야, 나에겐 해낼 능력이 없어, 나는 엉뚱한 배역을 연기하고 있어, 과욕을 부리는 거야, 나는 사기를 치고 있어, 첫 대사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모르겠어. (-) 극장에 도착할 때쯤이면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그리고 무대에 오르는 것이 두려워졌다. 시작 신호가 점점 가까워지는 것을 들으며 자신이 해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 연기는 뭔가를 모면하기 위해 밤마다 애써 하는 숙제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 정신이 녹아내리는 것처럼 느껴졌고, 혼자 있는 것이 두려웠다. 밤에도 두세 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고, 거의 먹지도 않았으며, 매일 다락방에 있는 총(-)으로 자살할 생각만 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게 일종의 연기, 아주 엉터리인 연기처럼 보였다. (-)
그는 (-) 자신이 미쳤다는 것도 스스로에게 납득시키지 못했다. 그는 미치광이로서도 가짜였다. 그가 해낼 수 있는 유일한 역할은 어떤 역을 연기하는 역할뿐이었다. (-) 그리고 마침내 침대에서 일어났을 때 그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에 대한 게 전부였지만, 그것을 흉내내지는 않았다. 죽고 싶어하는 남자를 연기하는 살고 싶은 남자였으니까.
(-) 그럼에도 그는 어쨌든 의사와 면담할 때마다 이야기를 털어놓곤 했다. 안 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고통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인간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설명하기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하게 마련이다. 설사 그 설명이 무엇 하나 해명하지 못하고 결국 실패한 또하나의 설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더라도.
(-) 인간이 실제로 자살할 수 있다는 것,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것은 그들 모두를 매혹하는 원천이었고, 남자아이들이 스포츠 이야기를 떠들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화제였다. (-) "우리는 스스로한테도 주변 모든 사람한테도 무기력하고 완전히 무능한 존재처럼 여겨지지만, 그럼에도 세상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하기 어려운 걸 실행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어요. 그게 기분을 돋워주죠. 기운나게 해주고요. 행복감도 느끼게 해줘요." (-)

_필립 로스_전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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