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한가운데 문예출판사 세계문학 (문예 세계문학선) 5
루이제 린저 지음, 전혜린 옮김 / 문예출판사 / 199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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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누구든지 의욕을 갖기를 그치면 늙기 시작하는 거야. 얼마 전까지도 나는 무슨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을 가지고 아침마다 일어났어. 나는 마치 아침마다 문간에 서서 코를 바람 속에서 벌름거리면서 사냥에의 욕망으로 떠는 사냥개와도 같았어. 그런데 지금은 나는 이미 나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의외의 무엇을 갖고 있지 않아. 그리고 인생은 끝없는 풀밭이 아니라 그 속에서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하는 네 개의 벽이 있는 공간이야.

 

 

  나는 니나가 내 옆에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다가앉아서 한숨을, 기쁨과 해방의 한숨을 내쉬던 순간을 절대로 잊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우리가 달려가던 시골을 뒤덮고 있던 광선, 늦가을의 갈색과 보랏빛이 섞인 광선, 이 달콤하고 죽음에 중독돼 있는 광선을 잊지 않을 것이다.

  나는 행복했다. 이 시간, 이 한 시간 동안은 행복했다. 그리고 갑자기 미친 듯한 멋있는 유혹이 나를 엄습해 왔다. 왜 우리는 이 시간에 둘이 다 기쁨에 충만하여 딴생각은 없이 행복할 때 살기를 그칠 수 없는 것일까? 이날처럼 조화된 날은 다시는 안 올 것이고 매일은 다만 손실에 불과한 것이 될 것이다.

 

 

  니나는 때때로 특히 대답의 끝 무렵에 퉁명한 자존심의 막을 뚫고 한줄기 호의와 따스함을 보였다. 내가 이 호의를 과대평가하거나 또는 오해하는 것이 아닌가에 대해서 생각해보는 것을 나는 처음에는 스스로 금하고 있었다. 어쩌면 니나의 성격은 최근에 일반적으로 더 따뜻하고 부드러워진 것이고 이 따뜻함은 나에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다한테 해당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우선 나는 마치 몇 달이나 계속된 가뭄 뒤에 첫 번째 빗방울이 죽은 줄 알았던 싹 위에 떨어지는 것을 본 농부의 아직 의심스러운 긴장된 환희와도 비슷한 나의 기쁨 속에 잠겨 있고 싶다. 너무나 오랜, 희망 없었던 기다림 위에 딱딱하게 떨어진 아픈 기쁨이었다.

 

 

  더 강하게 감동되어 있는 사람은 언제나 손해다. 그의 감정이 어디서나 방해가 되어서 그의 정열에 걸려서 넘어지고 패배할 때마다 자기를 웃음거리로 만든다. 그의 찬스는 번번이 더 적어지고 그의 감정은 그와 반비례되게 커간다.

 

 

  얼마 전에 댁에 찾아갔을 때 나는 얘기할 것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그것은 무의미한 일이라고 느껴졌습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얘기해서는 안 됩니다. 순전한 이기주의로 보더라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털어버리고 나면 우리는 더 가난하고 고독하게 있게 되는 까닭입니다. (-)

 

  나는 자유롭게 있어야만 한다는 것밖에는 아무것도 분명히 알고 있지 않습니다. 나는 몇백 개의 가능성이 내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느낍니다. 모든 것은 나에게 있어서 아직 미정이고 아주 시초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무엇에나를 고정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나를 아직 모릅니다. (-) 정말로 모릅니다. 나는 당신이 나에게 제공하신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만큼 어리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다만 당신을 불행하게 했을 뿐일 것입니다. 나는 아무 경험도 없지만 그것을 알 수 있어요.

  (-) 아주 정직하게 말한다면, 나는 글을 쓰겠다는 욕망 이외에는 아무 욕망도 갖고 있지 않습니다. 내가 어떻게 이 작은 죽은 도시에서 끊임없이 죽어가는 노파 옆에서 소금 포대와 식초통 가운데서의 생활을 견디어나간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내가 이 모든 외적인 것에 완전히 무관심하지 않았던들?

 

 

  독자들! 이라고 니나는 내던지듯이 말했다. 독자는 오락을 요구하고 있어. 작가는 따라가기 쉬운 안이한 이야기를 그들에게 제공해야 하는 거야. 처음에는 이것이 일어나고 다음에는 저것, 그러고는 그것. 그렇게 해서 맨 끝에는 행복하건 불행하건 관계없이 하여간 둥근 결말이 있어야 해.

  마치 극장에서처럼 모든 것이 질서정연하게 진행되어가야 돼.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자기가 리얼리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어. 인생에서는 어떤 계산도 들어맞는 법이 없고 아무런 결말을 갖고 있지 않는데도. 결혼도 아니고 죽음도 다만 외관상 결말에 불과해.

  생은 계속해서 흘러가는 거야. 모든 것은 그렇게도 혼란하고 무질서하고 아무 논리도 없고 모든 게 즉흥적으로 생성되고 있어. 그런데 사람은 거기서 작은 조각을 끌어내서 현실에는 있을 수 없고 모든 생의 복잡성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인 조그마한 알뜰스러운 설계도에 따라서 건축하고 있어. 모두가 다 꾸며진 사진에 불과해. 내 소설도 마찬가지야.

 

  (-) 고쳐야겠어. 나는 내 소설을 전부 세 번이나 네 번 다시 써. 나는 소재가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맷돌에 갈고 또 갈아. 그렇지만 난 지금은 시간이 없어. 아니면 마음의 안정이. 시간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있는 거야. 시간은 아무것도 의미하지 않아.

 

  한나는 톱밥을 태웠다, 로 끝내겠어. 그게 옳아. (-) 그 이하의 문장은 우리 같은 사람들 머리에 곧잘 떠오르는 예의 결말에 불과해. 결말을 짓는 커다란 제스처, 독자 앞에서의 우아한 인사야. 자, 인제는 박수하거라, 끝났으니까. 우리는 모두 허영심이 있어. 그렇지만 난 허영심을 갖고 싶지 않아.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무섭게 조심해야 돼. 이런 값싼 효과를 자신에 허용할 때 우리는 빨리 타락해버리는 거야. (-)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다만 때때로 영웅 노릇을 해볼 뿐이지. 우리는 모두 약간 비겁하고 계산 빠르고 이기적이고 위대함에서는 먼 존재야. 그리고 나는 바로 그걸 그리고 싶었어. 우리가 동시에 선량하고 또 악하고 영웅적이고도 비겁하고 인색하고도 관대하다는 것, 모든 것이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어서 구분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에게 나쁜 짓이든 좋은 짓이건 어떤 행동을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싶었어. (-)

 

 

  자정이다. 나는 굉장히 부드러운 피곤이 엄습해 오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내가 여태까지 몰랐던 놀라운 긴장의 회복이고, 내 사지와 감각의 달콤한 해체와도 같은 피곤이다. 그럼 인간이 '행복'하다고 말하는 것이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나는 앞으로도 절대로 말하지 않을 것이다. 나 같은 인간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나는 내 생명을 니나의 손에서 받아들인다.

 

 

 

 

  1933년 10월 28일

  -우리의 짧은 여행의 마지막 날이다. 나는 너무나 아름다운, 완전한 날들을 겪었기 때문에 숨을 쉴 수도 없을 정도다. (-) 이러한 날들에 반복이나 지속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은 모든 경험과 생의 원칙에 위반되는 생각이라는 (-) 전율을 느낀다. (-)

  니나는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 산엔 첫눈이 덮여 있었으나 골짜기는 낮에는 따뜻해서 뜰에서 식사를 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너무 익은 마지막 산딸기를 따기 위해서 산허리를 종종 돌아다녔다. 이것은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하지 않은 일이었던가? (-) 나는 산다. 나는 산다. 백 배나 더.

 

 

 

  (-) 오늘 오후는 이별을 용이하게 만들어주었다. 진부한 맛이 내 혀 위에 얼마 동안 남아 있다가는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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