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2 - 히말라야의 여신
현경 지음 / 열림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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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아는 어떤 기독교인들도 공공장소에서 나에게 이렇게 인사하지 않을 뿐더러 나 또한 이렇게 대답하지 않는다. 그런데 그에게는 그렇게 인사해주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지금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선택한 세계이기 때문이다.

 

  내 앞에 나타난 남자는 내가 아는 마르고, 예민하고, 불타는 눈을 가진 아름다운 남자가 아니었다. 5년 동안 그는 많이 변해 있었다. 뚱뚱하고, 부흥사 아저씨들의 갈라진 목소리를 가진, 평범해 보이는 보수적인 목사였다. 이 더운 날 까만 양복에, 하얀 와이셔츠에, 까만 넥타이까지 맨 남자. 그 앞에 앉아 있는 목이 깊이 파인 복숭아색 여름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는 너무나 '종류가 다른' 거룩한 목사님이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마주 앉아 있는 우리들의 모습이 무슨 비극적 희극의 한 장면 같았다. (-)

 

 

 

  (-) 그는 메뉴를 내밀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을 마음껏 시키라고 했다. 유니언 신학교 교수가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에서 자기가 저녁을 살 테니까 편하게 주문하라고 했다. 그는 내게 항상 이렇게 너그럽게 주고 또 주는 남자였다. 해군장교 첫 월급을 몽땅 털어 이화여대 앞에서 정장 한 벌 없는 가난한 여학생이었던 내게 예쁜 정장을 맞추어주던 일이 생각났다. 잠깐 동안 눈앞이 흐려진다. 울면 안 된다. 태연한 척하며 음식을 주문하고, 그 동안 서로에게 일어났던 '공식적인' 변화들에 대해 이 이야기, 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무르익고 저녁식사가 끝날 때쯤 되자 그가 갑자기 이상한 질문을 했다.

 

  "저 보고 싶지 않았어요?"

 

  갑자기 말문이 꽉 막혔다. 보고 싶지 않았냐고? 그와 별거를 시작한 89년부터 너무나 그를 그리워했다. 그 다음 몇 년 간 울며 다녔다. 젊은 연인들만 보면 눈물이 맺혔고, 유모차에 아이를 태우고 가는 부부들을 보면 아무 데서나 주룩주룩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수많은 외로운 밤에 그를 안고 싶어서, 그가 너무 그리워 팔이 끊어지듯 아팠었다. 이혼을 한 후, 재혼을 해서 아이를 낳으려고 전 세계로 남편감을 찾아다닐 때, 새로운 남자와 데이트를 시작하면 한동안 항상 그가 생각났다. 어떤 남자도 그처럼 순수하지 않았고, 그처럼 일편단심이지 않았고, 그처럼 나를 '여신'같이 바라보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떤 남자도 그처럼 여자를 위해 자신의 전 존재를 과감하게 던지지 않았다. 그는 나의 사랑의 '입맛'을 버리게 만들었다.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 그와 헤어진 게 아니었다. 그와 함께 살 수 없어서 헤어진 것이다. 우리가 계속 같이 있다가는 우리 중에 한 사람이 꼭 죽어나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부부로서의 인연은 끝났다. 전 남편과 만나서 무드 잡고 싶지 않았다. (-)

 

 

 

  나도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항상 퇴근길에 꽃을 사 오던 남자. 꽃을 들고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내 이름을 부르며 뛰어오던 남자. 자다가도 "여보, 사랑해!"하고 잠꼬대를 하던 남자. 나도 어떨 땐 이 외롭고 힘든 독신 생활을 청산하고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다. 천둥 치고 비 오는 날 놀라서 잠을 깨도 항상 나를 품에 안고 있던 남자.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침대에 누워 자고 있는 나를 한없이 바라보던 남자. 그의 시선에 눈을 뜨면 "당신이 너무 예뻐서. 당신은 작품이야."하고 말해주던 남자. 나도 그 따뜻하고 포근한 부부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러나 그와 나 사이에는 이제 건널 수 없는 세계관의 차이가 있다. 그와 나는 더 이상 같은 방향을 바라보지 않고, 같은 정신적 우주에서 살지 않는다. (-)

 

 

 

  시간이 늦어 이제 집에 가야 할 것 같다고 그에게 말했다. 택시를 타고 가겠다는 나를 그가 굳이 데려다주겠다고 우겼다. 그의 차를 타고 뉴욕의 거리를 달린다. 침묵이 흘렀다. 항상 차 속에서 새들처럼 재잘거리던 우리였다. 긴 침묵 속에서 집 앞에까지 달려왔다. 갑자기 이제 보면 다시는 이 남자를 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울면서 그에게 두서 없이 이말 저말을 했다.

 

  난 당신을 정말 사랑했었다고. 그리고 당신은 너무나 좋은 애인이고 남편이었다고. 이제는 당신을 원망하거나 미워하지 않는다고. 당신을 지금도 사랑하지만 우리는 같이 살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더 이상 내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당신 가슴을 뛰게 하지 않고, 당신 가슴을 뛰게 하는 일이 내 가슴을 뛰게 하지 않는다고. 나는 당신의 보수적인 기독교 근본주의라는 에너지의 장 속에서 살아갈 수 없다고. 생존할 수 있을진 모르지만 속으로 매일 죽어갈 거라고. 이제 제발 나를 잊고 혼인하라고. (-)

 

  그에게 횡설수설하면서 울고 또 울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가 "잘 알았습니다"하고 대답했다. 눈물로 온통 젖은 얼굴과 몸으로 그를 껴안았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God bless you!" 그의 차에서 내려 차가 안 보일 때까지 그에게 손을 흔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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