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철새처럼 만났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147
황인숙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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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세계가 없는



우유를 마시다가 잔에 금이 간 것을 본다


이걸 버릴 수 있겠군

이젠 버릴 수 있어

가차없이


우유잔을 치워버리니

내 방이 그 잔만큼 더

넓어진다


도발되어 나는

책상 서랍을 뒤집는다

옷장을, 화장대를 뒤집는다

샅샅이

그들은 떨고 있다

자신에 금이 갔는지 안 갔는지

알 바 없고 알지 못하면서


더 이상 볼펜이 아닌 볼펜

더 이상 달력이 아닌 달력

더 이상 편지가 아닌 편지

더 이상 건전지가 아닌 건전지


더 이상 메모가 아닌 메모


더 이상 향기가 아닌 향기를 풍기며

병 속의 꽃은

목까지 죽이 되어

그러나 얼굴은 극단의 건조를 보이고 있다


뿌옇게 버캐진 거울 속에서

나는 영정처럼 내 방을 내다본다


때때로 그들도 돌아올까?



칼로 사과를 먹다



사과 껍질의 붉은 끈이

구불구불 길어진다.

사과즙이 손끝에서

손목으로 흘러내린다.

향긋한 사과 내음이 기어든다.

나는 깎은 사과를 접시 위에서 조각낸 다음

무심히 칼끝으로

한 조각 찍어올려 입에 넣는다.

"그러지 마. 칼로 음식을 먹으면

가슴 아픈 일을 당한대."

언니는 말했었다.


세상에는

칼로 무엇을 먹이는 사람 또한 있겠지.

(그 또한 가슴이 아프겠지)


칼로 사과를 먹으면서

언니의 말이 떠오르고

내가 칼로 무엇을 먹인 사람들이 떠오르고

아아, 그때 나,

왜 그랬을까.......


나는 계속

칼로 사과를 찍어 먹는다.

(젊다는 건,

아직 가슴 아플

많은 일이 남아 있다는 건데.

그걸 아직

두려워한다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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