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의 시학 동문선 문예신서 183
가스통 바슐라르 지음, 곽광수 옮김 / 동문선 / 2003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우울한 인간은 세상이 사물이 되는 것을 본다. 그것은 피난처, 위안, 환희다. (-) 괴테의 「신 멜루시나」(-)는 실제로는 아주 작은 사람인데 일시적으로 정상적인 크기를 갖게 된 여인을 사랑하게 된 남자의 이야기다. 이 남자는 이 여인이 공주인 아주 작은 왕국이 들어 있는 상자를 그 사실을 알지 못한 채 가지고 다닌다.

 


밀로슈 (-)는 거기에서 하나의 낡은 세계를 되찾는다. 우리들이 삶에 하나의 형용사를 갖다 붙일 때, 그 즉시 그 형용사는 강력한 힘을 가지게 된다는 사실을, 지나치면서 지적해 두기로 하자. 침울한 삶, 침울한 존재는 세계에 서명을 한다. 그것은 사물들 위에 번져 가는 채색보다 더한 것이다. (-) 


 (-) "오후 그녀가 차에서 내려 돌아오는 곳이 내 집이라는 것은 나에겐 확실히 감미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그보다 더욱 감미로웠던 것은, 그녀가 잠의 밑바닥으로부터 꿈의 계단의 마지막 몇 층계를 다 올라와 의식과 생명의 세계로 소생하는 것이 바로 내 방이라는 것, 그녀가 한순간 '여기가 어디지?'하고 의아해 하며 램프 때문에 눈을 가까스로 가늘게 뜨고선 주위에 있는 대상들을 쳐다보고, 내 집에서 깨어난 것을 확인하자, 우리 집이었구나 하고 스스로 대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가 불확실해 하는 이 감미로운 첫 순간에 나는 새삼 그녀를 보다 완벽하게 소유한 듯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외출에서 돌아와 곧장 자기 방으로 들어갈 때와는 달리, 지금은 알베르틴이 자기가 내 방에 있다는 것을 알아채자마자 내 방이 그녀를 사방으로 포위하고선 간직해버렸기 때문이다……."(RTP, Ⅲ, 74) 

 

 (-) 한 수인이 그의 감방의 벽에 풍경을 하나 그려 놓았다: 그 그림에서는 조그만 기차가 터널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간수들이 그를 찾으러 오면, 그는 그들에게 '내가 내 그림에 있는 저 조그만 기차 안에 들어가 뭘 좀 검사하고 나올 수 있도록 잠시 동안 기다려 달라고 상냥하게' 요구한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웃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나를 좀 모자라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자신을 아주 조그만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내 그림 속으로 들어가, 그 조그만 기차에 올랐다. 그러자 기차는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 조그만 터널의 깜깜한 구멍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 


세계는 크다. 하지만 우리들의 내부에서 그것은 바다처럼 깊다. _보들레르

 

종각의 고독 가운데 있는 인간은 여름 햇빛으로 환한 광장 위에서 '부산을 떠는' 저 아래 인간들을 가만히 바라보는 것이다. 그 인간들은 '파리만하고,' '개미처럼' 이유 없이 움직인다.

 

  이전에 나는, 깊은 바다를 체험한 이는 더 이상 다른 사람들과 같은 사람이 다시 될 수는 없다고 쓴 바 있다. 지금 이 순간(사막 한가운데 있는)과 같은 순간에 (-) 상상 속에서 나는, (-) 내가 걸어가고 있는 공간에 물이 흘러넘치게 하고 있었다. 나는 지어낸 침수 가운데 살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유동적이고 빛나며 유익하고 밀도 있는 물질 가운데서 몸을 옮겨가고 있었는데, 그 물질은 바닷물이었고 바닷물의 추억이었다. 그 상상의 작위적인 기술로써 바위와, 침묵과, 고독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황금빛의 햇볕을 내게 우호적이 되도록 하여, 나를 위해 그 진저리나는 메마름의 세계를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내 피곤마저 그로하여 가벼워지는 것이었다. 내 무게는 몽상 속에서 그 상상적인 물 위에 받쳐져 있었던 것이다.

  (-) 침묵과 내 사하라 생활의 느린 전진이 내 내부에 잠수의 추억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그러자 일종의 아늑함이 내 내부의 이미지들을 적셨고, 이렇게 (-) 나는 내 내부에, 바로 깊은 바다의 추억들에 다름 아닌, 빛나는 반사된 이미지들을, 반투명의 두꺼움을 지닌 채, 걸어갔다.


위대한 작가가 낱말 하나라도 나쁜 뜻으로 쓸 때, 나는 언제나 가벼운 충격, 가벼운 언어의 고통을 받는다. 우선 낱말들은, 모든 낱말들은 일상 생활의 언어 가운데서 정직하게 그들의 맡은 바를 이행한다. (-) 가장 범속한 현실에 결부되어 있는 낱말들이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시적 가능성을 잃어버리지는 않는다. (-) 


 (-) 문학비평가란 자기가 만들 수 없을 작품에 대해서, (-) 자기가 만들고 싶지 않은 작품에 대해서 판단을 내리는 사람인 것이다. 문학비평가는 필연적으로 엄격한 독자일 수밖에 없다. (-) 우리가 시를 읽으며 시인이 되고 싶은 유혹을 되살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알지 못한다. 독서에 다소 열정적인 독자라면 누구나 독서로써, 작가가 되고 싶은 욕망을 키우고 또 억누르는 법이다. 읽은 페이지가 너무 아름다울 때에는 겸손이 그 욕망을 억누르지만, 그러나 그 욕망은 다시 태어나게 마련이다. (-) 자기가 좋아하는 작품을 되읽는 독자라면 누구나, 그 좋아하는 책이 자기 자신에게 관계되어 있다는 것을 안다. (-) 


(-)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의 말이다. 어떤 시작품들에 있어서는 그것은 지울 수 없는 말이 되어 있다. 그것은 숨결의 말이다.[샤를 노디에 Charles Nodier, (-) 거의 모든 민족에 있어서 영혼을 뜻하는 여러 상이한 명칭들은 모두 숨결의 변형들이며, 호흡의 의성어들이다.]  (-) 

  (-) 알비에서의 조르주 루오 작품 전람회를 위한 훌륭한 소개의 글에서 르네 위그 René Huyghe는 다음와 같이 쓰고 있다: '루오가 어디를 통해 자기 작품에 대한 규정들을 부숴 버리는지를 알아내려고 한다면……, 아마도 우리들은 이젠 다소 쓰이지 않게 된, 영혼이라는 말을 환기해야 하리라,' (-) 영혼이야말로 (-) 내적인 빛을, (-) 번쩍이는 색깔들의 세계, 빛나는 태양의 세계로 번역해 내는 그러한 내적인 빛을 소유하고 있는 것이다. 이리하여, 루오의 그림을 사랑함으로써 이해하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 외부 세계의 빛의 반영이 아닌 내적인 빛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 화가, (-) 그는 어떤 광원에서 빛이 비쳐 나오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붉은 빛깔의 열정의 내밀한 뜻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의 근원에는, 싸우고 있는 영혼이 있다. 야수파의 예술은 내부에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그림은 그러므로 영혼의 현상이라고 할 것이다. 작품은 열정에 타는 영혼을 구원해 주어야 하는 법이다.
     
  
  (-) 기억력이라는 그 과거의 극장에서는 무대 장치가 오히려 인물들을 그들의 주된 역할에 붙들어 두는 것이다. 우리들은 때로 시간 속에서 스스로를 알아본다고 생각하지만, 기실 그것은 우리들의 존재가 안정되게 자리잡는 공간들 가운데서 일련의 정착점들을 알아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들의 존재는 흘러나가려 하지 않으며, 잃어버린 시간을 찾으러 떠났을 때에 과거에 있어서까지도 시간의 흐름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다. 공간은 그것의 수많은 벌집 같은 구멍들 속에 시간을 압축해 간직하고 있으며, 공간은 그렇게 하는 데 소용된다.

  그리고 만약 우리들이 역사를 넘어서려고 한다면, (-) 타인의 존재로써 이루어지는, 언제나 너무 우연적인 부분을 떼내어 버리려고 한다면, 우리들은 우리들의 삶의 달력이 그 삶의 이미지들 가운데서만 엮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

  그리하여 그러한 고독들을 앞에 두고 (-) 묻는다: 그 방은 컸던가? 그 지붕 밑 방은 잡동사니로 차 있었던가? 그 구석은 따뜻했던가? 그리고 빛은 어디서 흘러 들어오고 있었던가? 또 그 공간들 속에서 존재는 침묵을 어떻게 알고 있었던가? 그는 고독한 몽상이 거하던 그 여러 숙소들의, 그토록 특이한 침묵을 어떻게 음미하고 있었던가?

  이 경우 공간은 전부이다. 왜냐하면 이제 와서 기억을 생생하게 하는 것은 시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 우리들은 생각할 수만, 구체성의 두터움을 모두 빼앗겨 버린 추상적인 시간의 선을 따라 생각할 수만 있을 따름이다. 우리들이 오랜 머무름에 의해 구체화된, 지속의 아름다운 화석들을 발견하는 것은, 공간에 의해서, 공간 가운데서인 것이다. 무의식은 머무르고 있는 법이다. (-)

 

그리고 우리들의 지난 고독들의 모든 공간들은, 우리들이 고독을 괴로워하고 고독을 즐기고 고독을 바라고 고독을 위태롭게 했던 그 공간들은, 우리들 내부에서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들의 존재가 그것들을 지우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들의 존재는 본능적으로, 그의 고독의 그 공간들이 본질적이라는 것을 안다. (-) 이젠 지붕 밑 방이 없을지라도, 다락방이 망실되었을지라도, 그렇더라도 여전히, 우리들이 어떤 지붕 밑 방을 사랑했으며 어떤 다락방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남을 것이다. 우리들은 밤의 꿈속에서 그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 초라한 작은 방들은 조개껍질 같은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잠의 미로의 끝에까지 갔을 때, 우리들이 잠의 깊은 지역에 다다랐을 때, (-) 알게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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