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산 - 삶은 '혼자'가 아닌 '함께'의 이야기다
데이비드 브룩스 지음, 이경식 옮김 / 부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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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을 온몸으로 발산하는 사람들을 이따금 만난다. 내면의 빛으로 환히 빛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은 상냥하고 평온하며, 작은 즐거움에 기뻐하고 큰 즐거움에 고마워한다. 물론 이들은 완벽하지 않다. 지치고 스트레스를 받는다. 잘못된 판단을 하는 실수를 저지른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산다. 가족, 대의, 공동체 또는 믿음에 단호히 헌신한다. 이들은 자신이 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이유를 알며, 자기에게 주어진 소명을 다하는 데서 깊은 만족감을 누린다. 이들은 다른 사람의 짐을 기꺼이 진다. 그러면서도 그 짐을 평온하게 받아들인다. 그것을 이미 정리되고 해결된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사람이 스스로를 소중한 존재로 느끼도록 해 주며,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모습을 보고 기뻐한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면 기쁨이 단지 하나의 감정이 아니라 어떤 인생관일 수도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누구나 뭔가를 성취하고 나면 잠시 황홀감에 취하곤 한다. 그러나 그런 일시적 황홀감과 달리, 자기 자신에게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다 내려놓는 사람에게 활기를 불어넣는 영원한 기쁨이란 것도 존재한다.

이런 사람들의 삶에는 내가 생각하는 두 개의 산이 있다. 이들은 학교를 졸업한 뒤 취직을 하거나 가정을 꾸리며, 자신이 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산을 찾아낸다. "난 경찰이 될 거야." "난 의사가 될 거야." "난 기업가가 될 거야." 첫 번째 산에서 우리 모두는 특정한 인생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그 과업이란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고, 재능을 연마하고, 확고한 자아를 세우고, 자신의 족적을 세상에 남기려고 노력하는 일 등이다. 이 첫 번째 산에 오를 때 사람들은 많은 시간을 들이면서 평판 관리에 신경 쓴다. 그래서 늘 점수를 기록한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잘할 수 있을까?" "내 순위는 전체에서 어디쯤일까?" 심리학자 제임스 홀리스가 지적하듯이, 이 단계에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자신을 자기의 참모습이라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 첫 번째 산에서 사람들이 설정하는 목표는 자신이 속한 문화권에서 규정하는 통상적인 목표이다. 성공하기, 남들에게 존경받기, 제대로 된 사회 집단에 초대받기, 그리고 개인적인 행복 누리기. 전부 통상적인 것이다. 좋은 집, 화목한 가정, 멋진 휴가, 맛난 음식, 좋은 친구들.

그러다가 문득 무슨 일이 벌어진다.

어떤 사람들은 이 첫 번째 산의 정상에 올라 성공을 맛보고 또 끝내 손에 넣지만, 만족하지 못한다.

"이게 내가 바라던 전부인가?"

사람들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그러고는 자신이 할 수 있는 더 심오한 여정이 반드시 있음을 알아차린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산을 오르는 과정에서 호된 실패의 시련을 겪으며 나가떨어진다. 이들은 커리어와 가정과 평판에 문제가 생긴다. 인생이라는 것이 성공이라는 정상을 향해 꾸준하게 올라가는 오르막길이 아니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알고 보니 인생은 다른 모습, 한층 더 실망스러운 모습을 감추고 있음을 깨닫는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을 만나 예기치 않게 옆길로 빠진다. 자식의 죽음, 암 투병, 약물 중독과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한 힘겨운 싸움 같은, 인생을 바꾸어 놓는 비극이 이들을 강타했기 때문이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이 사람들은 더는 산 위에 있지 않다. 이들은 당혹스러움과 고통스러움의 계곡에서 헤맨다. 이런 일은 어떤 나이에서든 일어날 수 있다. 여덟 살에도, 여든다섯 살에도, 또는 그보다 더 많은 나이에도 일어날 수 있다. 첫 번째 산에서 굴러떨어지는 일은 어떤 연령대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계곡에 떨어진 사람들이 경험하는 고통의 시기는 그 사람의 가장 깊은 내면을 드러내며, 자신이 생각하던 모습이 사실은 진정한 자기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해 준다. 이들은 그 과정에서 자신도 알지 못했던 내면이 노출되고 만다. 자기가 겉으로 내걸고 다니던 여러 모습들이 실제 자신이 아님을 비로소 알아차린다. 또 다른 층이 엄연한 자기로 존재함을, 지금까지 무시해 왔던 어떤 모습, 어둠이 똬리를 틀고 있으며 가장 강력한 열망들이 살아 숨 쉬는 어떤 기질이 실제 자기 모습으로 존재함을 그제야 깨닫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종류의 고통에 맞닥뜨리면 움츠러든다. 이들은 평균 이상으로 더 두려워하고 분개하는 듯이 보인다. 이들은 겁에 질려 자신의 깊은 내면을 외면한다. 그리하여 인생이 갈수록 더 쪼그라들고 더 외로워진다. 영원히 치유되지 않을 슬픔을 끌어안고 사는 노인을 주변에서 흔히 본다. 이들은 마땅히 받아야 할 존중을 받지 못한 채, 오래전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잘못된 일을 놓고 끊임없이 화를 내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이 계곡이 자기 발견과 성장의 계기가 된다. 고통의 시절은 일상이 피상적으로만 흘러가는 것을 방해해서, 자신의 좀 더 깊은 내면을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이 시기에 사람들은 자기 기질 깊숙한 곳에 보살핌의 본질적인 어떤 능력, 즉 자아를 초월해서 타인을 보살피고자 하는 어떤 열망이 있음을 깨닫는다. 이 열망에 맞닥뜨릴 때 이 사람들은 전인적인 인간이 될 준비가 완료된 상태이다. 이들은 익숙한 것들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본다. 그리고 마침내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것도 단지 구호로서가 아니라 현실 속 실천으로. 사람들의 인생은 가장 큰 역경의 순간에 자기가 대응한 방식에 따라 제각기 다르게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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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이기적인 관심사(돈, 권력, 명성)를 추구한다고 가르치는 문화권에서 살아온 이 사람들이 갑자기, 남들이 자기에게 당연히 바라야 한다고 말하는 모든 것에 흥미를 잃어버린다. 이들은 진정으로 바랄 가치가 있는 것들을 자기가 바라기를 원한다. 이들은 자기 욕구의 수준을 한층 높인다. 세상은 이들에게 좋은 소비자가 되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소비되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 이들이 그러도록 등을 떠미는 것은 어떤 도덕적인 대의이다. 세상은 이들에게 독립을 원하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상호의존을, 따뜻한 인간관계의 망 안에 녹아들기를 원한다. 세상은 이들에게 개인적인 자유를 원하라고 말하지만, 이들은 친밀함과 책임과 헌신을 원한다. 세상은 이들에게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가 성공을 추구하길 원하지만, 이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되길 원한다. 온갖 잡지들은 이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들려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라고 묻기를 바라지만, 이들은 개인적인 차원의 행복보다 훨씬 더 큰 어떤 것으로 시선을 돌린다.

고통을 통해 한층 더 성장한 사람들은 용감해져서, 자기의 예전 자아의 어떤 부분들이 소멸해 버리도록 방치한다. 계곡에 떨어진 뒤로 그들의 동기 부여는 자기중심적인 것에서 타인중심적인 것으로 바뀐다.

바로 이 지점에서 사람들은 "아!" 하고 깨달음을 얻는다.

첫 번째 산이 알고 보니 내 산이 아니었구나. 이 산보다 더 큰 또 다른 산이 저기 있구나. 저 산이 바로 내 산이다!

이 두 번째 산은 첫 번째 산의 반대가 아니다. 이 산에 오른다고 해서 첫 번째 산을 내팽개친다는 뜻이 아니다. 두 번째 산에 오르는 것은 첫 번째 산에 오르는 것에 이어지는 또 하나의 여정이다. 이 여정은 좀 더 관대하고 만족스러운 인생 국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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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더는 관리자로 보지 않고 멘토로 생각하며 다른 직원들이 더 나아지도록 돕는 데 모든 힘을 쏟는다. 이들은 자기가 속한 회사 조직이 사람들이 그저 다달이 봉급을 받으려고 출근하는 얄팍하고 얕은 공간이 아니라 삶의 목적을 찾을 수 있는 실팍하고 두터운 공간이 되길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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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지금 첫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아니면 두 번째 산을 오르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결정적인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당신이 궁극적으로 소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당신 내면에 있는 자아인가, 아니면 당신 바깥에 있는 어떤 것인가?

첫 번째 산이 자아를 세우고 자기를 규정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자아를 버리고 자기를 내려놓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를 남에게 주는 것이다. 첫 번째 산이 계층 상승의 엘리트적인 것이라면 두 번째 산은 무언가 부족한 사람들 사이에 자기 자신을 단단히 뿌리내리고 그들과 손잡고 나란히 걷는 평등주의적인 것이다.

두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은 첫 번째 산을 오르는 방식과 전혀 다르다. 첫 번째 산은 정복한다. '나'가 이 산을 정복하는 것이다. 정상이 어디인지 멀리서 확인하고는 그곳을 향해 기를 쓰고 올라간다. 그런데 두 번째 산은 다르다. 두 번째 산이 '나'를 정복한다. 나는 어떤 소명에 굴복한다. 그리고 그 소명에 응답해, 내 앞에 놓여 있는 어떤 부당함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다 한다. 첫 번째 산에서는 야심을 품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며 독립심을 발휘하지만, 두 번째 산에서는 인간관계를 중시하고 친밀하며 무엇에도 굴하지 않는 태도로 일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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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람들이 보내는 나날은 대개 진이 빠질 정도로 힘들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기 자신을 몽땅 내던지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하는 온갖 요구와 요청이 이들의 하루하루를 빽빽하게 채우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은 한층 더 넓은 활동 범위 속에서 살며 자기의 더 깊은 내면을 활성화시켜 한층 더 폭넓은 의무를 스스로 떠안고 살아간다. (-)

"이 짐이 얼마나 무거운지 오로지 겸손함만이 그 무게를 버틸 수 있다. 혹시라도 자존심을 내세우다간 그 짐의 무게로 등이 부러지고 말 것이다."

(-) 이런 기관들은 총체적인 어떤 목적, 일련의 공통된 의례, 공통적인 '기원 설화'를 가지고 있다. 이런 것들은 두터운 인간관계를 강화하며 온전한 헌신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런 데서는 사람을 단순히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바꾸어 놓는다.

(-) 한 가지 당부할 말은 이 비유를 지나치게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라는 것이다. 당연히 모든 사람의 모든 인생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공식은 없다. 나는 사람들이 의지해 살아가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도덕적 정신이라는 이야기 구조를 만들기 위해 이 두 개의 산 비유를 동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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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신이란 대가를 기대하지 않은 채로 무언가에 매진하는 것이다. 헌신은 무언가를 깊이 사랑하게 되어서, 사랑이 불안하게 흔들리는 순간들에 대비해 그 무언가의 주변에 어떤 행동 구조를 구축하는 것이다. (-)

(-) 아무래도 우리는 부족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평범한 사람들이고 또 애초에 허용하고자 마음먹은 수준보다 훨씬 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갈 게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높은 기준을 설정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하다. 다른 사람들의 모범적인 사례에 고무되는 것, 그리고 깊이 헌신하는 삶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우리가 부족해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한계 때문이지 우리가 설정한 이상 자체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은 아니다.

(-)이제 나는 인격 형성이 거의 대부분 개인적 과업이라고 또는 개인 차원에서 성취되는 것이라고 더는 믿지 않는다. 인격 형성이 헬스장에 가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근육을 키우듯이 정직성, 용기, 성실성, 끈기 등의 덕목을 키울 수 있다고 더는 믿지 않는다. 지금은 좋은 인격이란 자기 자신을 내려놓는 과정의 부산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는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다. 어떤 공동체나 대의에 순종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하고, 사랑의 애착관계를 두텁게 쌓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살피는 일상적인 행동들 속에서 스스로를 잊어버리듯이 나 역시 다른 사람들을 보살피는 일상적인 행동들 속에서 나 자신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인격은 갖추기에 좋은 것이다. 인격을 형성해 가는 과정에서 배울 점은 많다. 그러나 인격보다 지니기에 더 좋은 것이 있다. 바로 도덕적인 기쁨이다. 이 평정심은 완벽한 사랑을 구현하는 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갈 때 비로소 찾아온다.

더 나아가 나는 우리 사회의 문화적 구조와 도덕적 구조가 건전하며 우리는 그저 개인적으로 자신의 부족한 점을 고쳐 나가기만 하면 된다는 믿음도 더는 가지고 있지 않다. 자기 자신에 대한 강조는 재앙일 뿐이다. 좋은 인생을 살아가려면 훨씬 더 큰 차원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지금 나의 생각이다. 자기의 약점을 개선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화적 패러다임 전체의 무게 중심이 첫 번째 산의 초개인주의에서 두 번째 산의 관계적 사고방식으로 이동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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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또한 내가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지를 나 자신에게 상기시키기 위해 이 책을 썼다. 나를 포함해 작가들은 공개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한다. 심지어 다른 누군가를 소재로 삼아 글을 쓰는 척하면서까지 그렇게 한다. 다시 말해 작가들은 자신이 정말로 배울 필요가 있는 것을 독자에게 가르치려고 노력한다. (-) 다른 사람들과 멀리 외따로 떨어져 있으며, 어떤 것에도 상처받지 않으며, 타인과의 의사소통 없이도 존재하는 그런 인간 (-) 나는 인간관계의 의무를 회피했다. (-) 회피하고 얼버무리기, 일에만 파묻히기, 갈등 외면하기, 공감하지 않기, 그리고 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어 표현하지 않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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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너무 수준 낮은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우리는 자기 발에 너무 작은 신발을 신고 걷고 있다. 우리는 사소할 정도로 작은 인정을 받으려고 또는 자기 커리어에서 아주 작은 승리를 쟁취하려고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방식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가 아니라 엄청나게 더 좋은, 기쁨에 넘치는 어떤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지금 우리는 콘크리트 건물 안에서 남들보다 인공 태양등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가려고 경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지금과는 다른 식으로 살아간다면 노천의 진짜 햇살 아래에서 느긋하게 일광욕을 즐길 수 있다.

깊은 헌신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면 이런 깨달음이 내 머리를 때린다. 기쁨은 현실적인 실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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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격이 흥미로운 점은 인체의 다리뼈처럼 거의 변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사람의 본성은 마음처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 당신이 하는 모든 행동과 생각은 당신을 바꾸어 놓는다. 그게 아무리 작은 변화라고 해도 당신은 바뀌며, 거기에 따라서 당신은 조금씩 더 고양되거나 또는 타락한다. 만일 당신이 일련의 선행을 한다면 이타적인 습관이 점점 더 당신의 생활에 깊게 각인된다. 그래서 살아갈수록 선행을 하는 일이 점점 더 쉬워진다. 하지만 만일 누군가에게 거짓말을 하거나 사악한 행동이나 잔인한 행동을 할 때는 인격이 타락하고, 나중에는 훨씬 더 나쁜 행동도 더 쉽게 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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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특정한 도덕 생태계 안에서 성장한다. 누구나 자신이 삶을 영위하는 방식과 주위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분위기로 자기 주변에 소집단 문화를 만들어 낸다. 사람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유산 가운데 하나가 도덕 생태계이다. 이 생태계는 그 사람이 죽은 뒤에도 남아 있는, 믿음과 행동의 어떤 체계이다.

(-) 도덕 생태계는 옷차림, 말하는 방식, 존경해야 할 것과 경멸해야 할 것,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 등을 미묘하게 규정하고 또 사람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유도한다.

도덕 생태계는 어떤 특수한 순간에 제기되는 커다란 문제들에 대한 총제적인 반응이다. (-)

자기라는 개인과 사회 사이에는 언제나 긴장 관계가 존재한다. 모든 것을 너무 빡빡하게 옭아매면 거기에 반발하려는 충동은 그만큼 더 커진다. 그러나 우리는 정반대 문제를 안고 있다. "나는 자유다"라는 문화 속에서 개인들은 외로우며 서로에게서 느끼는 애착은 느슨하다. 공동체는 해체되고 개인들 사이의 결속은 끊어지며 외로움은 확산된다. 이 상황은 좋은 삶을 살아가는 것, 즉 사랑과 연결을 바라는 깊은 인간적 갈망을 채우는 것을 한층 더 어렵게 만든다. 모든 연령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지만 특히 청년들은 더 그렇다. 이들은 구조화되어 있지도 않고 불확실하기만 한 세상에 던져진다. 믿고 의지할 권위나 방호책도 거의 없디. 그런 것들은 오로지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자기 인생 여정에 올려놓는 일 자체가 놀라울 정도로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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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회는 그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관을 젊은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나름의 방법을 가지고 있다. 미국 사회가 수행하는 이런 방법들 가운데 하나로 졸업식 연설이라는 세속적인 '설교'가 있다.

대학들은 보통 탁월한 성공을 거둔 유명 인사에게 커리어의 성공은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이 담긴 졸업식 연설을 부탁한다. 그러면 커리어에서 놀라울 정도로 성공한 이 연설자는 흔히 졸업생들에게 실패하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여기서 청년들은 실패가 훌륭한 것일 수도 있음을 배운다. (-)

(-) 우리는 이 연설을 통해 우리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관을, 그것이 마치 위대하고 경이로운 어떤 선물이나 되는 듯이 그들에게 넘겨준다. 그리고 이 선물이 알고 보니 포장만 그럴듯하게 크고 멋있지 실제로는 안에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빈 상자임이 드러난다.

많은 청년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나면 림보로 들어간다. 이들은 불확실성에 시달리면서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며 자기 인생을 사는 게 옳은지 알고 싶어 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자유라는 아주 커다란 빈 상자를 넘겨준다!

-인생의 목적은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자유가 행복으로 인도한다! 우리는 너희에게 어떤 짐도 지우지 않으며 또 무엇을 하라는 말도 하지 않는다. 우리는 너희에게 너희가 탐구할 해방된 자아를 준다. 너희의 자유를 마음껏 즐겨라!

듣고 있던 학생들은 그 빈 상자를 내려놓는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 속에서 익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방향이다.

-무엇을 위한 자유란 말인가? 어떤 길이 내가 갈 길인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또 다른 빈 상자를 건네준다. 가능성이라는 커다란, 그러나 역시 비어 있는 상자이다.

-너희의 미래는 무한하다! 너희는 너희가 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 그 여정이 바로 너희의 목적지이다! 위험을 감수해라! 담대해라! 큰 꿈을 꾸어라!

그러나 이 주문 역시 그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자기 인생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도 모르는데 미래가 무한하다는 말을 들은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오히려 압박감만 커질 뿐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빈 상자를 내려놓는다. 그들은 지혜의 원천을 찾고 있다.

-도대체 나는 내가 품고 있는 커다란 질문들의 대답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는 그들에게 진정성이라는 빈 상자를 건네준다.

-너희 자신의 내면을 바라보아라! 내면의 진정한 열정을 찾아라. 너희는 놀라울 정도로 멋지다! 너희 내면의 거인을 일깨워라! 너희만의 진정한 길을 따라서 살아라! 너 자신을 실현해라!

이것 역시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그들에게 인생의 해답을 찾기 위해 살피라고 말하는 '너희의 내면'이라는 것은 아직 형성되어 있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빈 상자를 내려놓고 이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에다 나 자신을 온전하게 다 던질 수 있을까? 어떤 대의가 나를 고무하고 또 내 인생에 의미와 방향성을 제시할까?

이 시점에서 우리는 그들에게 가장 속이 빈 상자를 제시한다. 바로 자율성이라는 상자이다.

-너희는 너희 스스로 알아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자기의 가치관을 설정하는 것도 너희가 할 몫이다. 너희에게 옳거나 그른 것이 무엇인지 다른 어느 누구도 너희에게 말해 줄 수 없다. 너희의 진실은 자기 자신에 대해 말하는 너희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너희만의 방식으로 너희가 찾아야 한다. 너희가 사랑하는 것을 해라!

여기에서 당신은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주는 대답들이 사실은 이십 대 시절을 힘겹게 살도록 만들고 또 그들의 상태를 한층 더 나쁘게 만든다는 것을... (-) 그들은 자기가 굳이 '이것'이 아니라 '저것'을 해야 하는 이유를 알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너희 바깥에 존재하는 그 어떤 기준에도 얽매이지 말고 너희 스스로 그것을 찾아라"라는 말 말고는 아무 해 줄 얘기가 없다. 그들은 형체 없는 사막에서 버둥대며 몸부림친다. 우리는 그들에게 나침반을 주지 않을 뿐 아니라, 양동이에 모래를 퍼 담아서 그들의 머리 위로 쏟아붓기까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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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미적인 삶을 살아가는 사람에게 문제는, 인생을 경험의 가능성으로만 볼 뿐 충족해야 하는 어떤 프로젝트 또는 살아가면서 실천해야 하는 어떤 이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사람은 온갖 것들을 건드리기만 할 뿐 결코 하나에 정착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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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삶을 뒷받침하는 이론은, 사람은 최대한 많은 경험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생을 일련의 연속적인 모험으로만 살아간다면, 스쳐 지나가는 감정들과 쉽게 바뀌는 열정이라는 불확정성 속에서 정처 없이 배회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럴 경우 이 사람의 현생은 어떤 성취를 쌓아 가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일시적인 순간들의 집합체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가 가진 힘을 무작위로 온 사방에다 흩뿌리며 낭비하는 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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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가지고 있는 천성적인 열의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즐겁게 해 주는 사람, 다른 사람에게 "예"라고 말하는 사람이 되도록 훈련시킨다. 그렇지만 당신이 어떤 것에도 영원히 "아니요"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어떤 것도 포기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아마 어떤 것에도 깊이 빠져들지 못할 것이다. 헌신하는 인생은 소수의 중요한 "예"를 위해 수천 번 "아니요"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때야 비로소 이들은 아무도 얘기해 주지 않았던 진실을 깨닫는다. 자유는 헛소리라는 것을.

(-) 궁극으로 설정된 개인적 사회적 정서적 자유는 완전히 헛소리다. (-) 자유는 당신이 그 속에서 인생을 보내고 싶은 바다가 아닌 것으로 판명 난다. 자유는 바다가 아니라 당신이 건너고 싶어하는 강이다. 당신은 이 강 건너편에 뿌리를 내리고 무언가에 온전히 몰입하고 헌신하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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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일종의 텔로스(목적) 위기이다. 텔로스 위기에 빠진 사람은 자기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사람들은 쉽게 부서질 수 있는 상태가 된다. 철학자 니체는 인생을 살아갈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과정'이든 견딜 수 있다고 말한다. 자기 목적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여정에서 만나는 온갖 고난을 처리할 수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자기 목적을 모르는 사람은 아주 작은 고난에도 쓰러져 버린다. (-)

내 경험으로 볼 때 텔로스 위기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걷는 형태, 하나는 잠자는 형태이다. 걷는 형태에서는 고통당하는 사람이 그저 계속 터벅터벅 걷기만 한다. 이 사람은 어떤 충격을 받거나 깊은 권태감에 시달리는 상태이지만,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또는 자기 인생을 어떻게 바꾸어야 옳은지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저 자기가 하고 있던 것을 계속하고 았을 뿐이다. (-) 이 사람은 자기가 안주하고 있다는 심리적 자각과 함께 살아간다.

(-) 텔로스 위기의 두 번째 유형은 잠자는 것이다. 이 경우에 고통받는 사람은 그냥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넷플릭스 드라마만 본다. 이 사람의 자신감은 바닥이 났다. (-) 모든 게 이미 너무 늦어 버렸고 자기 인생이 자기를 이미 스쳐 지나가 버렸다는 전혀 입증되지 않은 이상한 신념에 사로잡혀 있다. 다른 사람들이 거둔 성취가 그에게 실질적인 고통을 주기 시작한다. 남들의 빠른(정확하게는 빨라 보이는) 출세와 자신의 무기력한 처지 사이의 격차가 커질수록 그 고통은 더욱 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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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존 키츠는 우리가 많은 방이 있는 거대한 저택에 산다고 말했다. 첫 번째 산에 있을 때 우리는 키츠가 "무심한 방"이라고 불렀던 곳에서 산다. 이곳은 애초부터 설정되어 있던 공간이다. 우리는 자기 주변에 있던 가치관과 삶의 방식을 아무 생각 없이 주워서 자기 것으로 삼는다.

우리는 이 방에 계속 머물고자 한다. 이 방은 편안하다. 그리고 이 방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인정해 준다. (-)

고통에는 본질적으로 우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때로 슬픔은 그저 슬픔일 뿐, 온전하게 겪어야만 한다. 인생에서는 나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이런 것들이 고귀한 무언가를 단련시키기 위해 일어나는 게 분명하다고 말함으로써 그 순간들을 감상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시도는 잘못된 것이다. 그러나 때로 고통이 변화와 구원이라는 더 큰 서사에 연결될 수 있을 때 우리는 고통을 통해 지혜로 나아가는 길을 갈 수 있다. (-)

(-) 계곡에서 겪는 고통은 당신 영혼의 지하층이라고 생각하던 것의 바닥을 깨부수어 그 바닥 아래 놓여 있던 텅 빈 구덩이를 드러내며, 다시 그 빈 구덩이의 바닥을 깨부수어 그 아래 또 다른 텅 빈 구덩이를 드러낸다.

고통은 우리에게 감사를 가르친다. 보통 우리는 사랑과 우정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고통의 시기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건네주는 선물들을 소중하고 고맙게 여긴다. 고통은 당신을 자기처럼 고통당하는 다른 사람들과 손잡게 해 준다. 고통은 공감 능력을 한층 더 키워 준다. 그래서 고통을 겪는 사람은 마찬가지로 고통을 겪는 다른 사람들에게 더 많이 공감할 수 있게 된다. 이런 식으로 고통은 사람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고통은 어떤 대응을 부른다. 그 누구도 고통을 피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모두 고통에 대응하는 방식을 자기 나름대로 선택할 수 있다. 그리고 흥미로운 사실인데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고통에 대응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자기 아이가 먼저 저세상으로 갔기 때문에 파티장에 가서 즐거운 기분을 마음껏 누려야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런 사람은 자신이 아이를 잃었으므로 아이를 잃은 다른 사람을 충분히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사람들은 얕은 접시에 놓인 적은 음식은 깊은 허기를, 고통이 드러내는 깊은 공허함을 채워 주지 못할 것임을 깨닫는다. 오로지 정신적인 음식만이 그걸 채워 줄 뿐이다. 많은 사람들이 고통당할 때 이에 대한 대응으로 관대함을 실천한다.

마지막으로 고통은 자족의 환상을 깨 버리는데, 이것은 상호 의존하는 인생이 시작될 수 있으려면 반드시 깨져야 하는 환상이다. 고통의 시기는 우리가 가진 야망들 대부분이 잘못되었거나 허영일 뿐임을 드러내며, 삶과 죽음 그리고 보살핌 주고받기라는 훨씬 더 큰 현실의 실체를 환한 빛으로 비춘다. 고통은 우리가 가진 이기적인 욕구들의 실제 크기가 어느 정도인지 우리에게 보여 준다. 고통을 당하기 전에는 이 욕구들이 거대해 보이고 또 인생의 모든 스크린을 다 차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고통을 당한 후에 우리는 자기 자아의 욕구가 매우 작으며 따라서 자기 인생을 송두리째 바칠 정도는 결코 아님을 깨닫는다. 계곡을 기어 올라가는 것은 어떤 질병에서 회복하는 것과 다르다. 많은 사람들은 치료가 되지 않은 채로 계곡에서 벗어난다. 그들은 달라져 있다. (-) 왜냐하면 보호막이 몽땅 벗겨진 그 고통의 순간들에서 겸손이 획득되고, 어떤 문제가 선명하게 드러나며, 또 어떤 봉사의 소명이 분명하게 접수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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