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의 기술 - 다큐멘터리스트는 무엇을 발견하고 어떻게 설득하는가
김옥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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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스무 겹의 매트리스 아래 콩 한 알의 질문



어릴 때 읽었던 동화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어느 폭풍우 치는 밤, 한 여인이 왕궁의 문을 두드리며 하룻밤 묵어갈 것을 청했다. 그녀는 자신이 공주라고 했지만 왕비는 그 말이 의심쩍어, 매트리스를 스무 겹 쌓고 그 위에 다시 오리털 이불을 스무 겹 쌓은 특별한 침상 위에서 그녀가 자도록 했다. 아침에 일어난 그녀는 무언가가 등에 배겨 한잠도 못 잤다고 불평을 했다. 그제야 왕비는 그녀가 진짜 공주임을 인정한다. 전날 밤 왕비는 그 침상의 맨 아래쪽에 완두콩 한 알을 넣고 그 위에 매트리스와 오리털 이불을 쌓아두었던 것이다. 즉 스무 겹의 오리털 이불과 스무 겹의 매트리스 아래 있는 그 완두콩의 존재를 몸으로 느낀 ‘예민함’이 동화에서는 공주의 자격으로 규정되었다.


그러나 나는 그 자격을 ‘공주’가 아니라 ‘다큐멘터리스트’로 바꾸어 부르고 싶다. 다큐멘터리스트는 천성적으로 혹은 후천적으로 불편함에 예민한 인간들이며, 인간들이어야만 한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통상적으로 무시되어온 것들에 대한 예민함이다. 그것은 우리의 타성적인 사고에 대해, 관습화된 인식에 대해, 표피적으로만 소비되는 우리 사회의 온갖 현상에 대해 무심코 지나치지 못하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시작한다. 생각하면 의심하게 되고 의심하게 되면 질문하게 된다. 그래서 ‘좋은 다큐멘터리스트는 좋은 회의주의자’인 것이며,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가 항상 질문이며 질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는 것은 그 질문을 ‘독백’이 아니라 ‘대화’의 형태로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나’의 질문을 ‘우리’의 질문으로 치환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즉 다큐멘터리는 사람과 사물과 행위와 풍경 같은 보이는 것들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감정과 생각과 의미와 가치까지 영상에 담는 일이고, 그것을 효과적으로 배열함으로써 다른 사람들도 그 영상의 흐름에서 어떤 서사와 담론을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나아가 그 서사와 담론에 공감하고 동의하게 하는 일인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략적 사고와 기술적 고려가 필요하다.


다큐멘터리 연출자들은 ‘전략적’이라는 말에 흔히 알레르기 반응을 나타낸다. 다큐멘터리는 ‘있는 그대로’ 찍는 것이며 ‘진정성’이 가장 중요한 장르인데, 무슨 전략적 사고가 필요하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만드는 사람이 대상에 대해 진정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작품에 투영되는 것은 아니다. 보는 이가 그것을 느낄 수 있게 만들어져야만 느껴지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만든다’는 것 자체가 만드는 이의 의지가 작용하지 않고는 존재할 수 없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의자’를 만들려면 자신이 만들려는 것이 ‘의자’라는 것을 인식해야 하고, 그것을 어떤 형태로 만들 것인지 의도해야 하며, 자신이 의도하는 형태를 구현하기 위해 어떤 재료들을 확보해야 하는지 생각하고 공급해야 하며, 그 재료들을 적소에 배치해 못을 박든 접착제로 붙이든 순차적으로 형태를 만들어내야 한다. 자신의 의도에 가장 근접한 의자를 만들어내려면 이러한 일련의 행위가 그 의도에 기여하도록 해야 하고, 기여하도록 하는 그 사고 과정 자체가 ‘전략적 사고’인 것이다.


 


(-) 다큐멘터리에 입문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가장 근본적이고도 중요한 것은 ‘사고하는 법’이다. (-)


내가 만들려고 하는 다큐멘터리가 무엇인지, 대상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발견해야 하는지,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왜 그 말을 하고 싶은 것인지, 과연 그 말이 발언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그 말을 하기 위해 어떤 에피소드와 어떤 이미지가 동원되어야 하는지…… 그런 것들을 ‘생각’할 수 있어야 비로소 우리는 한 세계 속에 첫걸음을 내디디게 되는 것이다. (-)


(-) 이 책은 (-) 다큐멘터리가 무엇이며, 다큐멘터리의 이야기 구조는 어떤 것인가에 대해 먼저 이야기하고자 한다. 다큐멘터리란 장르에 대한 총체적 이해 없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기획은 가능하지 않으며, 구조에 대한 이해 없이 ‘이야기 경로’를 생각하는 일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스무 겹의 요 아래의 콩알

―동화 4



발바닥이 아프다. 왕의 집에선 어디서나

여문 콩알이 흩어져 있어,

잘자려무나 깊은 밤

왕의 소유인 두꺼운 양털구름 스무 장쯤 빌려 깔고 

모든 땅의 돌기들을 무시할 것

왕의 잠으로써

눈떠 있는 콩알들을 지워버리고

내 온몸의 눈 평화롭게 꼭 감을 것


바깥엔 길고 어두운 비가 온다.

새파란 콩알들은 스무 층 아래 있다.


꿈도 없는 잠 속에서

위험하게 흔들리는 구름의 성(城)

콩알들은 스무 층 아래!

콩알들은 스무 층 아래!

스무 충 아래! 새파란 현실은, 새파란 대낮은.


그러나 마디마디 배기고 아파서

소리없이 입을 딱딱 벌리는 어둠

돌아누워도,

떠나가도 떠나가도 모든 흐느끼는 바다 위를 배는 갈 것이었다.

평화는 결코 오지 않을 것이었다.

한 겹의 요 혹은 스무 겹의 요의 배반.

콩알들은 싹이 트고 무섭게 자라기 시작한다.

스무 겹의 요를 뚫고

누워 있는 내 가슴을 뚫고 돛대 끝까지

넝쿨이 감겨 오르고


잘 자려무나 깊은 밤

음험한 왕은 껄껄 웃고 있다.



김옥영 시집 『어둠에 갇힌 불빛은 뜨겁다』 중에서






영상뿐 아니라 무엇이든 질문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사람에게 실마리가 되어줄 책이 아닌가. 무작정 쓰기만 했지 이것을 어떤 형태로 가공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을 때 웹진에 연재되던 김옥영님의 글은 머리를 청량하게 씻어주고 가벼운 용기를 손에 들려주었다. 어떻게 살아야 하지?라는 질문을 원하지 않아도 무시로 반복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읽어야 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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