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과 오크 문학과지성 시인선 464
송승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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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승언



녹음된 천사



드디어 꿈이 사라지려는 순간, 너는 창밖에서 잠든 나를 보고 있지

암초 위에서 심해를 굽어살피는 너의 낯빛에 놀라자 꿈은 다시 선명해진다


들로 강으로 흩어지던 내가 되살아나고 있었다


내가 이곳을 설계했다 믿었는데 아니었던 거지

블라인드 틈으로 드는 빛이 어둠을 망친다 생각했는데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몸은 벽 너머에서 들려오는 너의 노래에 묶여 있었다

입안에 고인 물이 다른 물질이 되려는 순간


눈 속으로 하해와 같은 빛이 밀려들었다




커브



창이 없으면 그림도 없지 그림이 없으면 나도 없다 문 앞에 지워진 발자국 쏟아지는


너는 창밖으로 몸을 내밀고 입을 벌린다 그것은 내게 없는 표정

어쩜 저렇게 환할까 치아 사이로 펼쳐진 복도를 따라서 하나 둘 둘 하나


복도는 어둠이고 복도 끝은 하얀 방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네가 있다는 생각 창과 복도는 없고 따라서 울리는 둘 하나 하나 둘


복도를 공유하는 많은 방들, 거기에 네가 있다는 생각 손잡이를 돌리면 잠겨 있고 손잡이를 돌리지 않으면 슬그머니 개방되는 문

벽 한가득 걸려 있는 얼굴들이 새하얗게


복도 끝으로 휘어진 그늘을 보았다

창을 열어 몸을 내밀었다


입은 벌어지고

투명한 입에 들어차는 여름 둘 하나 하나 하나




물의 감정



나는 물을 좋아하고 너는 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갈증으로 대립한다


물은 너의 감정이다 너의 기분에 따라 그날의 컵이 바뀌고 물의 온도가 달라진다

태도는 미온적이다 너는 웅크리고 있거나 드러누워 있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너는 금붕어 두어 마리를 기르고 있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기를 반복한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듣지 않는다 벽지는 자주 바뀐다 붉었다가 푸르렀다가, 꽃잎 무늬였다가 방울 무늬가 된다 나갔다 돌아오면 방은 침수되어 있다


벽지는 젖어 있다 너처럼 물고기들은 벽의 감정을 배운다 바라보거나 바라보지 않거나 물고기는 식탁 유리를 좋아하고 창의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유리를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살아 있는 아무것도 기르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먹고, 교배하고, 낳고, 먹는다 우리는 생활로 대립한다


나는 출근하고 너는 출근하지 않는다 나는 말하고 너는 말하지 않는다 나는 사랑하고 너는 사랑하지 않는다 너는 젖고 나는 젖지 않는다

이대로는 익사할 거라고 말한다

너는 듣지 않는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빛은 닫힌 창으로 들어온다 너는 물을 마시고 물을 준다 나는 물을 마시지 않고 물과 빛이 섞이는 양상을 바라본다


붉은 컵에 담은 물은 붉은 물이 되고 푸른 컵에 담은 물은 푸른 물이 된다 물고기들은 빛나는 물의 양상을 배운다




기원



아침에는 작은 전쟁이 있었다


나무가 우리의 조상이라는 수업을 들었다

우리의 반은 믿고 반은 믿지 않았지


교실에서 나와 태양 아래 있었다


정오에는 언니들이 이장되었다

이 강에서 저 강으로

언니들은 영원히 방학이구나


주방에선 이방인의 심장이 끓고 있었다


창에 꿰인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의 생일을 떠올렸다

우리 중 누군가 매장되고

누군가 아주 오래 살았던 날


아침에는 숲이 벌목되었다

산에 피가 났다


우리의 반은 우리의 반을 떠나며

낯선 얼굴로 돌아온다 말하고


우리의 손은 일렁이는 물에 가까워진다


정오에는 우리가 불어났다

빛 속에서,


산의 얼음이 녹자

수원지에서 고대의 언니가 발굴되었다




내 책상이 있던 교실



내 책상 위에 국화가 있었다

국화 위에 편지가 있었다

편지 위에 국화가 놓였다

국화 위에 국화가 쌓였다


줄 세워진 우리들 손에 들린 국화를 잊는


선생이 들어온다 활자 가득한 칠판

국화를 들고서 말이 없었다

말을 못했다 오늘 당번 누구지

선생은 말하고


당번은 죽었어요 말을 못했다

국화를 들고서

우리는 우리의 차례를 기다린다


편지가 놓였다 내 책상 위에

당번은 읽어라 선생은 말한다

읽지 못했다 당번이 죽었지

슬픈 일이다 그래도 수업은 해야지

선생은 말한다


너는 교과서를 읽어라 종이 울릴 때까지


읽지 못했다 책상 앞에 앉아

얘가 죽었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쩔 수 없지 그렇게 말하고


우리는 너의 책상에 얼굴을 묻는다


흔들리는 등 위에 흰 손이 놓였다

흰 손 위에 흰 손이 놓였다

흰 손 위에 흰 손이 쌓였다

흰 손이 계속되었다




철과 오크



숲의 나무보다 많은 새들이 있고 부리에 침묵을 물고 있고

그보다 많은 잎들이 새를 가리고 있고


수십 명의 아이들이 지거나 이기지 않고 같은 색의 옷을 입고 숲을 통과하고 있고

끝도 모른 채 발자국을 남기고 있다


수십 명의 나무꾼들은 수백 번의 도끼질을 할 수 있고 수천 그루 나무를 수만 더미 장작으로 만들 수 있고

빛은 영원하다는 듯이 장작을 태울 수 있고

장작은 열 개비가 적당하고 그 불이면 영원도 밝힐 수 있고


아이들이 영원을 지나가고 있고 별들이 치찰음을 내고 있고

밤과 낮은 서로에게 이기지도 지지도 못하고 있고


불 앞에서 나무꾼들은 수십 개의 그림자를 벗으며 농담을 하고 있고

인간의 맛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불그림자가 불의 주변을 배회하며 불그림자를 만들고 있고

새들은 여전히 침묵을 부리에 물고 있고


나무 위에서 열쇠들이 쏟아지고 있다

나부라진 옷가지들이 발자국을 가리고 있고

나무꾼들은 횃불을 나눠 들고 더 어두운 곳으로 움직이고 있고

잎이 풍경을 가리며 무성해지고 있고




죽은 시들의 성찬



너는 초대받았다. 완전한 시의 이름으로 너는 시의 자리를 부여받는다.


만찬장으로 통하는 긴 복도는 거의 아침이 지나간 궤적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침의 궤적이 아니어서 집사들은 빛의 부스럼을 거두어 간다.


주인은 오고 있는가? 모든 죽은 시들이 초대받았다. 한없이 기나긴 그래서 하나의 여정이랄 수 있는 테이블. 너는 그 말석을 허락받았다. 너는 두리번거린다.

너는 다른 시들의 만듦새를 본다. 큰 시, 위대한 시 승리한 시 실패하는 시 졸고 있는 시도 있고 귀여운 시도 있다. 미친 시는 참석하지 않은 채 새벽의 음악이 되어 날아다닌다.

시들은 기다리고 있다, 주인을. 그러나 주인을 본 적이 없어서 주인의 얼굴을 모르고 주인이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만찬은 시작되지 않고 있다.


시들도 한다, 주인이 이미 당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러나 아무도 주인을 모르고 주인도 주인을 모른다는 생각, 시들도 한다. 생각하면 문이 열리고


빈 접시들이 집사 대신

들어온다 빈 접시들이 테이블에

쌓여간다 흔들거리며


율법을 따르는 빈 접시들

깨져야 할 때를 아는


접시들이 반사시키는 빛으로 접시들이 떠오르고 빛 속에 한가득 차오르는 것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우리들의 얼굴인가. 너는 죽은 너의 얼굴을, 죽은 너의 해골을 골똘히 바라본다. 그러면 해골도 잠에서 깨어나 너의 얼굴을 골똘히 보게 되고 그러다보니 너는 문득 주인의 얼굴을 알게 된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 기분은 거의 눈물 같아서 너는 곧장 그 기분을 떨쳐낸다.


빛의 원형으로, 새벽 별이 지루한 음악의 시간을 관통한다. 퇴장을 서두르고 있다.




재앙



꽃집에 불이 났다 창이 밝았다 꽃은 연기 속에 잎을 감추고

식물은 불에 타들어간다

건물에서 네가 뛰쳐나온다


우리는 말없이 너를 걱정한다


건물은 불에 타들어간다 안에 사람이 있다고

너는 말한다 우리는 너의 말을 믿는다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지만


뛰어들려는 너를 막는다

생명을 구해라 너는 말하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건물 밖으로 물이 흘러넘친다

물을 든 남자가 걸어 나온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럴 리 없다고, 네가 말한다




카논



영원을 논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

말씀하셨지요

수업은 끝났습니다


어제 당신이 쬔 햇볕이 이제야 내게 쏟아집니다


당신이 숲 속으로 사라지면 수업은 시작됩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당신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그늘 사이로 나무 그늘이 끼어드는 책상에 앉아

나무의 속을 생각했어요

상처 없이는 들을 수 없는 총보에 대해 말입니다


칠판의 고요에 귀를 기울이면

나를 삼키려는 숲이 들립니다, 아마 아닐 테지요

나는 나무의 속에 스며 든다고 느낍니다


이끼가 자신이 이끼인 것을 모르듯이

풍경 속에서 풍경은 잊히고

나무의 속에 있어 나무의 속을

모른다 말했습니다


당신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


한곳을 맴도는 물소리만이 들린다는 것

이 교실에 내가 없다는 것


풍경이 잠시 나를 생각한 모양입니다




에덴



그는 집이 없었고 피리를 잘 불었고 뱀과 물고기의 친구였다 아무도

그를 듣지 않았다 그는 죽어서 천국으로 갔다


천국에서도 그는 집이 없었고 피리를 잘 불었다 죽은 뱀과 죽은 물고기의 친구였다


아무도 그를 듣지 않았다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천국에서도 그는 죽고 천국에는 천국이 없어서


그 영혼은 굽이치는 천국의 만곡을 따라 떠내려간다


우리는 뒤늦게 천국으로 가서

그의 장례식을 열어 그를 초대했다

웃는 입에 물뱀 하나씩을 물고

뻐끔거리며




유형지에서



해변에 버려졌다

알 수 없는 해변이었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알 수 없는 바다 생물의 사체와

파도에 깎여나가는 돌의 먼지들이

빛나고 있었다

먼 곳에서는 하나의 빛살로 보일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눈이 내리고 배가 고프고

밤이 오고 잠도 오는데 인가는 보이지 않고

알 수 없이 해변만 밤을 밝혔다


할 수 없이 바다 생물의 사체도 주워 먹고

모래 굴속에서 잠도 잤는데

파도 소리가 먼 땅까지 나를 데려다주었고

알 수 없는 해변으로 다시 데려다 놓았다


살았다가

죽는 것처럼

죽게 되고

살게 되듯이


깨지 않고 싶었지만 나는 깨었고

알 수 없을 해변이 빛나고 있었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눈이 날리고 눈이 쌓이고

날리는 눈 사이에 흰 새가 뒤섞여 날고

회전하는 겨울 속에서 머리카락은 점점 검어지고 있다고 느꼈다

모든 게 흰빛으로 망각되는 해변에서

미처 찍지 못한 흑점처럼


얼어붙고, 녹아내리는 먼 바다

파도에 밀려오는 뿌연 빛 사이로

내가 삼켰던 생물이 헤엄쳐 오고 있었다

없는 다리와

없는 입으로

도무지 알 수 없는 형상으로 울면서


피는 파도와 섞인다

살은 먼지에 덮인다


이곳에 나를 버린 게 누구인지

생각하지 않았다 탈출을

꿈꾸지 않았다 알 수 없는


해변을 걸었다


멈추면

완성되지 못하는 침묵이 글속에서 울었다




_

한번 읽으면 "너는 말한다 우리는 너의 말을 믿는다/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지만"에서 끝내지만

다시 읽으면 "불 속으로 뛰어들 수는 없지만// 뛰어들려는 너를 막는다" 이렇게 읽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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