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어있기 좋은 방
신이현 지음 / 살림 / 199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재털이를 던지고 학원을 나온 뒤 나는 아무 거리나 어슬렁거렸다. 어디에도 가고 싶지 않았고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정말 슬퍼졌을 때는 친구도 위로가 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완전히 취해서 죽어버려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 초라하게, 아무 즐거움도 없이 살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 먼저 포장마차에서 우동을 먹고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 걸었다. 다음에는 거리에 서서 닭꼬지 한 줄 먹으며 소주를 세 잔 마셨다. 그리고 다시 걸었다. 다음에는 슈퍼에 들어가 조우커를 한 병 사서 주머니에 넣었다. 그것은 주머니에 꼭 알맞게 들어갔다. 나는 거리를 걸으며 홀짝홀짝 조우커를 마셨다. 그리고 다시 슈퍼에 들어가 새로운 조우커를 샀다. 그리고 또 다시 걸었고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수배된 자들이나 몸을 숨기기 위해 캄캄한 밤에 남몰래 드나들 것 같은 여관이었다. 녹이 슬어 얼룩덜룩한 대문 사이로 보이는 흙마당에는 쓰레기 더미들이 지저분하게 쌓여 있었고 한쪽 구석에는 버려진 듯이 오동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내가 이 여관 대문 앞에서 걸음을 멈춘 것은 그 오동나무 때문이었다. 밤바람에 널따란 잎사귀를 한가롭게 흔들고 있는 키가 큰 나무였다. 나는 나무가 무엇인가 내게 말을 건넸다고 생각했다. '괜찮아, 그냥 흘러가는 대로 맡겨둬 보라구.' 분명 그런 소리였다. 나는 녹슨 대문을 열고 여관으로 들어갔다. 2층에 방을 얻어 방문을 활짝 열어놓고 오동나무를 바라보며 밤새워 술을 마셔볼 생각이었다.


 


 나는 좀 울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철들면서 지금까지 한번도 행복하다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항상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을 안고 서성거려야 했다. 속으로는 항상, '좀 즐겁고 싶어' ' 좀 자유롭고 싶어' 하고 중얼거렸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무엇을 해도, 직장을 다니든, 사직서를 던지든, 집에 있든, 밖에 있든, 내 몸이 있는 곳에는 항상 불안감이 따라 다녔다.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문제는 나에게 '인생의 스승' 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진지한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나는 그럴 듯해 보이는 스승을 찾기 위해 두리번거려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내 마음에 드는 스승이란 없었다. 고작 '지금이 네 인생에 최고 아름다운 때야. 그 절망까지도 얼마나 황홀한 것인지를 나이가 들면 알게 되지.' '그렇게 살았단 나중에 후회하게 돼.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라구.' 따위의 말이나 하는 스승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어느 순간 나는 모든 게 귀찮아져 버렸고 '될 대로 되라지 뭐!' 하고 소리쳐 버렸다.


 


 "우리는 지금, 각자 여행을 가는 길에 이 기차 안에서 처음 만난 거야. 이렇게 마주 앉아서 말이야. 그리고 서로에게 첫눈에 반하는 거지. 어때? 내가 먼저 말을 붙여 볼까?"

 태정은 보글보글 거품 풍선을 만들며 웃었다. 그는 천정을 바라보며 점잖게 입을 열었다.

 "나는 김 태정입니다."

 "나는 윤 이금입니다."

 우리는 잠시 눈길을 마주치며 킥킥 웃었다.

 "내 나이는 스물 둘이지요."

 "내 나이도 스물 둘이지요."

 우리는 다시 눈길을 마주치며 웃었다. 태정이 누운 채 침대 밑으로 손을 뻗어 술잔을 들어 올렸다.

 "술 한잔 하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우리는 술을 한 모금씩 마시고 동시에 바닥으로 잔을 던져 버렸다.

 "어머니와 누이, 나는 외로운 외동아들 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남동생, 여동생, 나는 불쌍한 장녀입니다."

 태정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누운 채 그의 입술에 키스를 했다. 그의 입 속에 가득 고였던 침이 내 입으로 넘어왔다.

 "어릴 때 내 꿈은 슈퍼맨이었지요."

 "어릴 때 내 꿈은 원더우먼이었지요."

 우리는 잠시 황당한 눈길을 주고 받았다.

 "담배 한 대 하시겠습니까."

 "고맙습니다."

 우리는 각자 담배를 물고 불을 붙였다.

 "지금은 되고 싶은 것이 없는 한심한 남자지요."

 "지금 나도 되고 싶은 것이 없는 한심한 여자지요."

 우리는 서로 눈길을 마주하며 과장스레 한숨을 쉬었다.

 "내 나이 여섯에 한글을 뗏지요."

 "내 나이 열 셋에 첫 월경을 했지요."

 태정과 나는 와악 웃음을 터뜨렸다.

 "내 나이 열 둘에 아버지 돌아가셨지요."

 "내 나이 열 둘에 아버지 집을 나갔지요."

 우리는 배를 잡고 웃기 시작했다. 나는 빙글빙글 돌아가는 사이키 조명 아래 누워 있는 기분이었다. 모든 것이 제멋대로 출렁거렸다.

 "내 나이 스물에 방위가 되었지요."

 "내 나이 스물에 첫 경험을 했지요."

 우리는 또 다시 웃어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와장창 유리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웃음을 멈추지 않은 채 고개를 들었다. 옆방이 아니라 바로 태정의 방 유리창이었다. 나는 웃음을 뚝 그쳤다. 태정이 머리맡에 있던 재털이를 유리창을 향해 던져버린 것이었다. 방바닥에는 유리파편이 꼴사납게 흩어져 있었고 그는 빈정거리듯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는 갑자기 화난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바닥에 흩어진 파편들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어 날카로운 파편 하나를 주웠다. 그는 파편 쥔 손등으로 내 볼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나는 거칠게 그를 쏘아보았다.

 "왜 이래, 술 취했어?"

 나는 날카롭게 소리쳤다. 순간 이마 쪽에서 섬찟한 느낌이 전해져 왔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져 내렸다. 나는 갑자기 위장이 비틀렸고 마셨던 술을 왁 올려 버렸다. 나는 고꾸린 채 이마를 만졌다. 아무렇지도 않았다. 침대 위에 떨어진 피는 나의 것이 아니라 태정의 손에서 떨어진 것이었다. 그는 입을 앙다문 채 파편을 으스러져라 쥐고 있었다.

 "미쳤어? 주먹을 펴, 주먹을 펴란 말이야!"

 나는 그의 손목을 잡고 흔들었다. 그러나 그는 내 손을 홱 뿌리치며 허리를 접고 그 사이에 손을 숨기고 꼼짝도 않았다.

 "왜 이래! 손을 펴!"

 나는 그의 어깨를 마구 후려쳤다.

 "고집불통, 정말 계속 이러면 난 가버릴테야. 진짜로!"

 나는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며 벌떡 침대에서 일어났고 그는 픽 쓰러지며 피 묻은 손으로 나의 발목을 잡아당겼다.


 

 

 대학 다니는 것이 그럴 듯해 보이는 것은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꾸며낸 환상임이 분명했다. 직접 그곳에 다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대학이라는 것이 얼마나 별볼일 없는 곳인지를 적어도 열 가지 정도는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책이라고 몇 권 끼고 잔디 새순을 밟으며 어슬렁거리다가 휴강을 한다고 하면 좋아라 만세를 부르며 기념으로 술집으로 뛰어가는 이들이 득시글거리는 곳이 대학이었다. 물론, 도서관을 들락거리거나 그럴 듯해 보이는 모임에 참여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며 '참된 대학인'의 모습을 보여주려고 꽤 노력을 하는 이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 데도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스터디니 뭐니 하면서 알고 싶지도 않은 이론에 핏대를 올리는 따위는 정말 질색이었다. 도대체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는 늘 뒤에 앉아 이렇게 투덜거리며 일년을 보냈다.


 


 "그만 자......"

 그는 약간 풀이 죽은 얼굴로 말했다.

 "난 지금 불안해"

 나는 눈을 번쩍 뜨면서 말했다. 그는 내 위에 엎드리며 나를 껴안았다.

 "어떻게 해줄까...... 어디든지 데려다 줄게......"

 태정이 내 이마에 키스를 하고 나를 일으켜 세웠다.

 "싫어, 아무데도 가고 싶지 않아, 어디도 싫어."

 나는 두 팔로 머리를 감쌌다.

 "아냐, 그럴 땐 어디든 밖으로 나가는 게 최고야."

 "여기가 내 밖인 걸 뭐......"

 나는 다시 침대 위로 엎어졌다. 태정은 침대 밑으로 들어가 배낭을 꺼냈다. 그는 술잔에 남은 술을 마시고 술병과 잔을 배낭 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배낭을 걸머쥐고 일어났다. 나는 부시시 그를 따라 일어났다. 태정이 문을 열었고 나는 그의 등 뒤에 서서 밖을 내다 보았다. 검은 오동나뭇잎 사이로 놀란 불빛들이 새어들어왔다.

 "아, 아니야, 좀...... 더 있다가, 저 불빛이 완전히 꺼져버리면......"

 나는 얼른 문을 닫고 주저 앉았다.


 


 나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길 원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림 한 점이든, 레코드 한 장이든, 내 것이 되면 그것은 골치 아프고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여고시절 수학선생님도 그랬다. 그녀는 나무를 좋아하지만 자기 집에는 풀 한 포기 조차 없다고 했다. 선생님은 남의 정원을 기웃거리고 거리의 가로수를 보는 것으로 대만족이라는 것이다. '남들이 잘 키워 놓은 나무를 실컷 볼 수 있는데 왜 내가 수고스럽게 키워야겠니. 그리고, 내가 나무들을 키우면 나무는 금방 죽을지도 몰라. 나는 진짜 게으름뱅이거든.' 그때 나는 그녀가 얌체 같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가 되었다. 무엇이든지 가진다는 것은 골치 아픈 일인 것이다.

 더구나 원래부터 가져져버린 가족 같은 건 더욱 그렇다. 그런 내가,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무언가를 가져버린 것이다. 그것은 정원에 서 있는 나무 따위에는 비교도 안되는 것이다. 내가 가진 이것은 내 방 어디에도 아닌, 내 가방 어디에도 아닌, 바로 내 뱃속에 들어앉아 꼼짝마, 하고 총구를 겨누고 있다. 나는 이것이 무거워서 견딜 수 없다. 뱃속에 우주덩어리 하나가 들어 있는 것만 같다. 너무 무거워서 바로 누울 수도 없다. 엎드리지 않으면 잠을 이룰 수도 없을 지경이다. 내 몸 하나도 주체를 못해 비틀거리는 주제에 아이를 가졌다니, 그 애가 태어나면 분명 나를 보고 코웃음을 칠 게 뻔한 일이었다.


 


 내가 그를 사랑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와 함께 나는 신나게 웃어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침대 위에서 뒹굴었고 술을 마셨고 담배를 피웠다. 그것은 사랑했다는 것보다 더 대단한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젖히고 술을 한 모금 마셨다.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와 함께 있을 때, 그때도 나는 외로웠고 혼자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가 없는 지금은 훨씬 더 외롭게 느껴졌다. 나는 진짜, 완전히 혼자가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아아, 나의 쌍둥이 왕자...... 나는 육교 난간으로 허리를 고꾸러뜨리며 울음을 터뜨렸다. 내 손에서 떨어져나간 술병이 철둑 어딘가에 떨어져 부서졌다. 그리고 긴 기차의 기적소리와 뒤이어 달려온 바퀴 소리가 내 울음소리 위로 지나갔다. 철컥 철컥, 기차의 바퀴는 규칙적인 소리를 냈고 나는 시간이 가고 있는 소리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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