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정일 화두, 혹은 코드 우리 시대의 인물읽기 1
장정일 외 지음 / 행복한책읽기 / 2001년 11월
평점 :
품절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재판의 변론을 맡았던 당시에 나는 장정일이 던진 화두를 제대로 풀지는 못하였다. 검사가 소설이 명백히 음란하다고 주장하고, 판사도 음란물을 버젓이 내놓고 반성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를 가둬놓은 상황에서, 나는 그를 변호하기 위하여 소설이 왜 음란하지 않다는 것인지 해답을 찾아야 하였다. 그 해답을 찾기 위하여 '음란'과 '예술'의 개념 사이에서 헤매인 과정이 그에 대한 변론과정이었던 듯하다. 노골적이고 구체적인 성묘사로 가득 차 있고, 장정일 스스로 "자기모멸을 위하여 포르노의 양식을 빌어왔다"고 밝힌 작품을 눈앞에 두고 음란하지 않다고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예술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다. 나는 "예술이냐, 외설이냐" 하는 이분법적인 명제와 한참을 다투어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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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는 성적으로 다루어질 자유를 가지며, 예술을 포함해서 사회의 모든 외설적 성표현물을 모조리 금기시할 수는 없다. 범죄적 수준의 반사회성을 띠는 경우에 해당하는 성표현물들로 국한된다. 이 점에서 외설과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은 의미가 달라진다.


소설은 법이 보호하는 예술의 자유의 보호영역에 속하고, 예술은 존재 그 자체로서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예술은 현실을 반성하고, 현실의 보이는 것 그대로를 회의하고 정체를 뒤집어 보는 실험의 성격을 갖고 있으므로, 예술적 실험은 본질적으로 기존 가치, 질서와의 충돌을 내포할 수 있다. 이것이 예술이 지니는 하나의 본질적 기능임을 받아들여야 하고, 예술은 사회에 대한 부정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외설적인 성표현물이라 하더라도 예술에 해당한다면 사회적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서 반사회적 범죄의 소산이라 할 수 없어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 해당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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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성도덕에서 특히 보수적인 우리나라의 법원이 음란성에 대한 평가에서 나와 같은 견해를 취하리라고는 처음부터 거의 기대하지 않았다. 나의 변론기는 '음란'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과, 예술의 개념을 두고 무언가 산뜻하게 해명되지 않는 해답을 찾아서 도리어 나 자신에게 의문을 던지는 하나의 질문지 수준에 그쳤던 듯하다. 법원은 1997년 7월 23일 변호인의 보석허가청구를 받아들여 장정일을 석방하였다. 그는 1998년 2월 18일 항소심에서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의 선고를 받았다. 상고심인 대법원은 2000년 10월 27일에 이르러 변호인의 상고를 기각하였다. 대법원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이라 함은 정상적인 성적 수치심과 선량한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침해하기에 적합한 것을 가리킨다"고 정의를 내렸다. 또한 "문학성 내지 예술성과 음란성은 차원을 달리하는 관념이므로 어느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에 문학성 내지 예술성이 있다고 하여 그 작품의 음란성이 당연히 부정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이고, 다만 그 작품의 문학적·예술적 가치, 주제와 성적 표현의 관련성 정도 등에 따라서는 그 음란성이 완화되어 결국은 형법이 처벌대상으로 삼을 수 없게 되는 경우가 있을 뿐"이라고 하였다.


법원은 장정일 소설의 3/4 이상이 *섹스, **성교, **성교[알라딘 서재 금지어 문제로 가림표 처리함], 가학 및 피학적인 성행위 등 매우 다양할 뿐만 아니라 묘사 방법도 노골적이고 구체적이어서 그러한 묘사부분이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이 사건 소설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고, 특히 38세의 유부남과 18세의 여고생이 벌이는 괴벽스럽고 변태적인 섹스행각의 묘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소설은 형법에서 말하는 '음란'에 해당된다고 판단하였다.




『내게 거짓말을 해봐』에 관한 나의 변론이 외설(음란)이지만 예술작품으로서의 사회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형법에서 말하는 반사회적인 음란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로 요약된다면, 법원의 결론은 후자에 해당될 정도로 음란하다는 것이다. 법원이 취하고 있는 음란성 판단기준대로 성적 수치심과 성적 도의관념을 '현저히' 해치는 성표현물이 반사회적인 '음란'에 해당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소설이 음란한가 아닌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의 성적 수치심과 도의관념의 수준에 달려 있게 된다. 사람들이 수치심을 느끼고 부도덕하다고 여기면 소설은 음란한 것이지만, 같은 소설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와 같은 정도로 느끼지 않는다면 음란한 것은 아니게 된다. (-) 외국의 경우에는 포르노그라피 자체를 내용의 강도에 따라 분류한다든가, 사회적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기준으로 도입하는 시도들을 하고 있으나, 그 분류의 기준, 가치여부를 따지는 것 또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음란성 판단은 궁극적으로 그 사회에 속한 사람들이 무엇을, 어느 수준에서 음란하다고 느끼는가 하는 심정적 수위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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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이 음란한 것인지 여부에 관한 화두의 대답은 처음부터 장정일 자신의 손 안에 쥐어져 있었다. 그는 사회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육체와 육체의 부딪힘과 섞임에 대하여 투명하고 냉정하게, 그것을 감싸는 문체의 수식이 전혀 없다는 점에서 뢴트겐 사진을 펼쳐 보이듯 제시한다. 손바닥을 펼쳐보인 그의 손 안에는 아무 것도 없다. 음란성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다. 국가는 사람들의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을 막기 위하여 소설을 처벌한다.


마음이 음란해지는 것은 마음의 주인이 책임져야 할 일이지, 장정일의 책임이 아니지만, 소설 자체가 음란한 것도 아니지만, 그와 같은 원인을 제공하려는 행위를 차단하려는 국가의지에 대하여 장정일은 거리를 두고 '사실'로 받아들이는 입장을 계속 취하였다. 그는 처음부터 음란성이 소설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이 음란하다고 죄를 묻는 재판과정에서 단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음란하지 않았고, 그 재판은 소설 자체가 아니라 소설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형법으로 재구성하는 문제였으므로 그가 개입하여 소설을 변명하는 것은 작가로서의 자신을 비하시키는 결과밖에 가져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


1심 재판의 최후진술과정에서도 그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법원을 멸시하거나 저항하는 것도 아니며, 법원은 그럴 수밖에 없고, 그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의 병존적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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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사회는 그침없이 변화하고 무엇 하나 고정된 것 없다는 점에서 원천적으로 불안하고, 그러나 모여살기 위하여는 안정과 정착이 필요하므로 일정한 질서와 통제가 필연적으로 요구된다. 그래서 불안과 안정성의 지향이 항상 이중적으로 존재하고 충돌하는 고통 속에서 살 수밖에 없다. 이 세계에서는 언제나 통제의 집중과 과도함으로 탄생한 국가권력의 억압성이 문제되어 왔다. 권력통제의 가장 직접적이고 근본적인 대상은 개인의 몸이다. 개인의 몸을 길들여야 순종하는 정신이 따라오고 질서는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권력과 개인이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며 충돌하는 전장은 바로 개인의 육체 그 자체가 된다. 고문·학살·의문사와 같은 언어군은 이러한 육체에 가하여지는 국가권력의 부당한 통제를 표현하는 상징들이다.


육체는 권력에 길들여져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성의 관계망과 육체의 자유를 표현하는 쾌감은 철저히 통제될 필요가 있는지 모른다. (-) 장정일은 이 세계의 정체를 들여다보는 깨어 있는 정신으로 바로 그 뇌관을 건드린 우리 시대의 유일한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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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모든 사물과 사람을 그의 이름으로 부르고─우리 사회 호칭의 복잡한 권위적 구조, 性器를 공개적으로 그 이름으로 부르지 못하는 은폐성을 생각해 보라─, 가능한 한 육체가 자연스럽게 그 자리에 놓여 원하고 충족하고 사랑하며, 서로가 타인의 육체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회에서 살고 싶다. 아마도 이것은 나만의 꿈이 아니며, 삶에 지친 몸을 달래는 모든 사람이 밤마다 혼자 잠들면서 꿈꾸는 사회일 것이다.


앞선 사람인 작가로서 그와 같은 꿈에 도전한 장정일을 위하여, 이 사회의 모든 장정일을 위하여 나는 변론하고 싶다.




_강금실_장정일을 위한 변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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