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쇼와 전집 문학과지성 시인선 428
황병승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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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대부분의 인사들이 자신의 과거를 털고 닦고 정돈한 뒤에 '자, 지금부터 보시는 것은'으로 시작하는 전시를 하고, 이런 식의 박물관 투어를 하며 우리의 패키지는 얼마나 지루하게 반복되고 또 늙어가는 것일까 

 

황병승

 

 

 

 


네가 원하는 것을 너는 매일 밤 꿈꾸었지만
네가 원하는 것을 너는 꿈속에서도 가질 수 없었지
일어나, 일어나서 어제처럼 보잘것없는 네 얼굴을 거울에 비춰봐
천성이 게으르고 어두운 너의 악마에게 말을 걸어봐
그저 아무 말이라도

 

황병승_호두없는다람쥐처럼

 

 

 


자살이라고? 오, 이런 저능아 사기꾼 계집애 같으니
아직도 네가 네 자신을 유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아직도 네가 네 자신을 놀라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너는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던 시절의 검고 딱딱한 막대 과자처럼

황병승 「호두 없는 다람쥐처럼」

 

 

 

 


'이 불쌍한 가문을 위한 묘사가 우리에겐 없는 걸까'

이마에서부터 조금씩 돋아난 소름이
턱 밑으로 천천히 흘러내리는 새벽
괘종 괘종 괘종……

황병승 <블루스 하우스>

 

 

 

 


어머니 당신은 왜 안경을 쓰지 않는 거예요
아들아 왜 안경을 써야 하니 나는 이미 모든 걸 보았는데

 

 


당신의 두 귀는 당신의 목소리를 사랑하지?
당신의 두 눈은 당신이 바라보는 것들을 사랑하고
당신이 떠먹여주는 음식을 당신의 목구멍은 받아먹지

 

황병승 <모든 진흙과 윤활유가 진실을 끌어당기는군>

 

 

 

 

 

 

당신은 내가 좋아하는 살구를 한 번도 사다 준 적이 없지(-) 어째서, 내가 그토록 원하는 살구가 당신의 마음속에 뿌리내리지 못했을까(-) 어째서, 나의 간절한 살구가 열매 맺지 못했을까

 

 


어린 시절, 아버지는 나를 가끔 나무 위에 매달아 '주셨습니다' 교육이라는 것인데

황병승 <내일은 프로>

 

 

 

 

 

서정시가 오랫동안 기피해왔던 주제들이 시어의 독특한 환기력을 타고 심각한 시적 상태를 창출(-) 철저해진 어둠과 빈틈없이 기획된 주제의 틀(-) 시 쓰기가 줄곧 어둠 속에 그 어둠의 거울로 걸려 있다

쇼는 행위의 흉내일 뿐이기에 책임이 없고 책임질 일이 없다. (-) 그들은 물리적으로건 심리적으로건 아무것도 축적한 것이 없는 최초의 인간과 같다.


"흰 접시 위에서 붉은 피범벅으로 소리치는 소시지를 마저 먹고" 잔다. 그는 꿈속에서 각종 채소를 먹으려고 애썼지만 실패하고, 잠시 잠이 깨어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티브이 뉴스"를 잠시 흘려들으며 닦아야 할 접시를 걱정한다. 그러나 "완벽주의자인" 화자는 "내일 꼭 접시를 닦기로" 저 자신과 약속하고 다시 잤다.


삶이란 말은 화해할 수 없음이라는 말과 같다.(-) 빈 교실에 혼자 남은 강은아는 가짜 은반지로 은반지의 연극을 하며, 친구와 저의 처지를 바꾸어놓고 (사실은 혼동하며) 친구에게 받았던 모욕을 되돌려주려 하지만, (-) 실패하고 '목이 쉬도록' 울었다

 

대답하려고 애쓴다. 윤리에 대해서, 사물의 감수성에 대해서, "굶주린 사자"라도 물리칠 수 있는 "독실한 마음가짐"에 대해서, (-) "불과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 또는 "불과하다는 처음에 도달하기 위해"

애통하여 기도하는 자에게는 그 애통함이 힘이듯이, 실패의 작은 거울이 되려는 자에게는 그 실패가 힘이다. (-) 이죽거림에 깊은 서정이 담길 수 있는 것은 냉소와 슬픔이 구별되지 않기 때문(-) 인간의 악이 그렇게 (-)명백하다.

신자유주의는 말했다. 인간은 실패하지 않는다고, 다만 네가 실패할 뿐이라고. 칠흑 같은 밤은 오랫동안 계속될 것이다.

황현산 <실패의 성자> 황병승 시집 <<육체쇼와 전집>>

 

 

 

 

미끄럼틀이 없다면 빨래판에라도 올라타고 싶은 심정으로

―하고 난 뒤, 우리는 맥없이 누워 있다, 침대 위의 가죽 더미처럼 이리저리 몸을 뒤척이던 끝에 서로의 축축한 팔꿈치가 맞닿았고, 우리는 그 상태로 잠이 들어야 했다 

누구든 먼저 팔꿈치를 거두어 가기라도 한다면, 전처럼 다시 작은 감정의 씨앗이 자랄 것이기에 팔꿈치를 희미하게 붙인 채로 우리는 불편한 잠을 청했고, 꿈속에서, 밤새도록 거미줄에 매달려 있어야 했다
 
황병승 「쓴맛을 알게 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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