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무법자 - 남자, 여자 그리고 우리에 관하여
케이트 본스타인 지음, 조은혜 옮김 / 바다출판사 / 2015년 3월
평점 :
절판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트랜스젠더들이 쓰고 출판할 수 있는 건 자서전, 남자의 몸에 갇힌 여자 이야기나 여자 몸속에서 야위어 가는 남자 이야기뿐이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출판할 수 있는 건 그런 것이었다. 트랜스젠더는 오랫동안 고통받은 사람들이라는 이미지를 고정시키는, 하지만 결코 지배적 관념에 도전하지는 않는 낭만적 저작들. 게다가 우리에 대해 쓰는 사람들은 언제나 다른 속셈이 있거나, 뭔가 증명하고 싶어 하거나, 아니면 상처를 받아서 비난할 누군가가 필요한 것 같다. 



(-) 우리는 정확한 표현을 피하면서 가볍게 트랜스젠더 이야기를 할 뿐 이 성별은 무엇이고 저 성별은 대체 무엇인지 거의 혹은 아예 질문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람을 남자 아니면 여자로 범주화하는 자신의 능력을 너무 확신한 탓에 스스로에게 매우 기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을 게을리한다. 남자란 무엇인가? 그리고 여자란 무엇인가? 그리고 왜 우리는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 되어야 하는가?


(-)


대체로 남성이란, 어떤 형태이든 페니스가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또 여성은 어떤 형태이든 질이 있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그렇지만, 이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난 샌프란시스코에 사는 페니스가 있는 여자를 여럿 알고 있다. 내 인생의 멋진 남자들은 다수가 질이 있었다. 그리고 성기 모양이 페니스와 질 사이의 무엇인 사람도 꽤 있다. 그들은 무엇인가?

당신은 염색체가 XY이기 때문에 남자인가? 염색체가 XX라서 여자인가? 젠더 재현의 영역에서 의심받아 본 운동선수가 아닌 이상, 당신은 성별을 결정하기 위해 염색체 검사를 받아 본 적은 없을 것이다. 그 검사를 받은 적이 없다면 당신은 어떻게 자신의 성별을 알고, 또한 당신의 낭만적인 혹은 성적인 파트너의 성별을 아는가? 흔히 나타나는 XX와 XY 이외에도 XXY, XXX, YYY, XYY 그리고 XO 등의 성염색체 쌍이 있다. 그러면 이것은 젠더가 둘보다 많다는 뜻인가?

계속 살펴보자. 사람을 남자로 만드는 게 무엇인가? 테스토스테론인가? 사람을 여자로 만드는 건 또 무엇인가? 에스트로겐인가? 그렇다면, 젠더는 어느 약국 진열대에서나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남성” 호르몬과 “여성” 호르몬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있다고 배웠다. 그리고 테스토스테론은 종을 막론하고 남자의 성호르몬 밸런스를 지배한다고도 배웠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한 예로, 암컷 하이에나는 본래 수컷보다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높다. 하이에나 암컷의 음핵은 아주 긴 페니스처럼 생겼다. 하이에나 암컷은 수컷을 뒤에서 올라탄 다음 교미를 한다. (-)

당신은 아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에 여자인가? 매달 하혈을 해서 여자인가? 많은 여자가 임신 가능성이 없는 몸으로 태어나고, 갱년기 이후에는 모든 여자가 임신 가능성이 없다. 이 여자들이 여자이기를 그만둔 것일까? 건강상의 이유로 자궁 절제술을 받았다면 이 수술은 성전환인가?

당신은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있어서 남자인가? 만일 당신의 정자 수가 적어서 임신이 어렵다면 어떨까? 당신이 방사능 피폭으로 임신이 불가능하게 된다면 어떨까? 그러면 당신은 여자가 되는 것인가?

당신은 출생신고서에 여성이라고 올라 있어서 여자인가? 출생신고서가 남성이라고 하니 남자인가? 만일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가능했는가? 어떤 의사가 당신이 태어나자 당신의 가랑이 사이를 내려다본다. 의사는 당신의 외부 성기가 어떻게 보이는지에 따라 당신이 이 젠더가 될지 저 젠더가 될지 정한다. 그 모든 선언 중에서 가장 되돌릴 수 없는 이 선언에 당신은 한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날과 같은 문화에서라면, 당신은 앞으로도 말할 기회가 없을 것이다. 당신이 남성과 여성의 성기를 다 가진 인터섹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외과의사가 당신을 “고쳤”을 것이다. 당신의 동의 없이. 부모의 인종이나 경제적 상태에 따라 부모에게조차 알리지 않고 동의도 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당신은 고쳐졌을 것이다. 젠더에 들어맞도록 고쳐졌다. 남들과 다르거나 이례적인 성기로 태어나는 것은 꽤 흔한 경험이지만, 현대 서구 의학은 인터섹스를 허용하지 않는다. 그들은 “고친”다.

다시 출생신고서로 돌아가자. 당신은 법이 그렇다고 하기 때문에 여자 혹은 남자인가? 법은 절대 변하지 않을까? 우린 매일 우리 주의, 나라의, 문화의 법을 바꾸기 위해 새 법을 제정하지 않는가? 정치 영역에선 이것이 일종의 게임이 아니었는가? 다른 법은 어떤가? 예를 들어서, 종교법은 어떤가? 종교는 남자와 여자의 권리와 적절한 행동이 무엇인지를 좌우할 수 있지만, 그 어떤 종교도 정말 무엇이 남자이고 무엇이 여자인지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우리가 안다고 지레짐작한다. 우리 문화의 지레짐작이 이렇게 심하다.

나는 평생을 가장 근원적인 여자의 정의, 의문의 여지 없이 확고한 남자의 정의를 찾아 헤매었다. 그러나 어떤 무리나 개인이 자기네 목적을 위해서 붙들고 있는 변덕스런 정의밖에 찾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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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연극, 춤, 음악, 조각, 회화, TV드라마, 영화 등 당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예술에는 모호하게 혹은 다르게 젠더화된 사람들의 초상이 늘 존재해왔다. 그건 우리가 아닌 사람들이 그린 것, 우리가 아닌 목소리로 말하는 것이다. 


지배문화는 소수자를 전형화해서 식민화하고 지배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를 농담거리 삼으면 우리의 분노가 위험하지 않게 되고, 우리가 들고일어나 한 목소리로 항의하는 것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조직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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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영혼에는 가능성이 가득한데도, 우리는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도록 자신을 사회적으로 처방된 이름과 범주에 묶어 둔다. 우리는 누구라도 생각해 볼 필요가 없는 정체성을 취한다. 아마 그것이 우리가 남자와 여자가 되고 그렇게 남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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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이 수술 전 트랜스젠더의 삶을 이렇게 설명한다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트랜스젠더는 잘못된 몸에 갇힌 사람입니다.’는 설명은 트랜스젠더 감정(transgendered feelings)을 정직하게 반영한 말이 아니라, 문화의 기대에 순응한 불행한 비유라고 말하고 싶다. 우리 트랜스젠더는 빗대어 설명할 대상이 부족한 사람들, 비유할 대상이 없는 사람들이다. 뭔가에 빗대어 설명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이해를 하면, 우리는 다른 방식의 설명을 더 찾지 않는다.

이제 트랜스젠더들이 새로운 비유를 찾아보아야 할 시간이 왔다. 지배적 관념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젠더화된 사람들에게 우리 삶을 설명할 다른 방법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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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진짜 괴물인데 넌 가면을 써야만 괴물이 될 수 있으니까 날 질투하는 거지!” -펭귄맨

“그럴지도.” - 배트맨

_팀 버튼(Tim Burton), <배트맨 리턴즈(Batman Returns)>


배에 주먹이 꽂히는 걸로 화가 나는 게 아니다.

그들이 조용하고, 예의 바르게 굴 때에도 화가 난다.

그들이 매일매일 당신을 어떻게 쳐다보는지 알아 불쑥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들은 당신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실눈을 뜬다.

마치 그러면 당신을 더 잘 확인할 수 있다는 듯.

만일 당신이 군중 속에 있다면, 그들 중 누구는 눈을 돌린다.

자신이 당신을 바라보는 걸 친구들이 모르도록, 정말 교묘하게. 

당신은 히죽거림 뒤에 숨겨진 공포,

역겨움 너머 증오도 읽을 수 있다.

이 모든 게 당신의 망상일까 봐 걱정이 될 것이다.

그리고 항상 이 모든 게 망상이길 바란다.

(자신감이 있어야 패싱이 잘된다고 한다.)

하지만 반드시 그들 중 하나는

욕망을 담아 당신을 바라본다.

그런 시선이 가장 두렵다.

젠더가 뒤섞인 몸에 대한 갈망을 받아들이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의식적으로 젠더를 위반하는 사람만 곤경을 겪는 것이 아니다. 젠더 체제는 결국 모두를 좌절시킨다. 규칙을 따르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부어도 우리는 때때로 상처를 입는다. 진짜 남성이거나 진짜 여성이라는 이유로도 심하게 상처를 입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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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크쇼 진행 중에 한 방청객이 내게 “그 질로 오르가슴을 느낄 수 있나요?”라고 물었다. 그때 난 내가 괴물이 확실하다는 걸, 하지만 딱 내가 침묵을 지키는 만큼만 괴물이라는 걸 깨달았다. 말을 하자 나는 교육할 기회를 얻었고, 역설적으로 덜 괴물이 되었다.


우리는 마땅히 웃음거리가 되어야 할 존재도 아니고, 뚫어져라 바라볼 만하거나 배에 주먹이 꽂혀도 싼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는 억압에 맞서 분노할 자격을 갖고 있다. 그 분노는 살아남기 위해서 우리가 적극적이어야 하고 무언가 바꿀 필요가 있다는 메시지이다. 그래서 우리는 억압과 폭력에 저항한다. 우리를 웃음거리로 보는 이 문화의 경향에 저항한다.


(-)


전환한 지 얼마 안 된 트랜스젠더를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은 그 혹은 그녀의 동작을 보는 것이다. 그 혹은 그녀는 대부분의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 느리게 움직인다. 예전의 동작을 지우고 새로운 동작을 고르는 중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보통 속도로 움직이려고 노력한다. 비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아서다. 고등학생에게서 손가락질을 받고 야유 소리를 듣고 싶지 않고, 지나가는 사람들 얼굴에 스치는 역겨움도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섞여 들어가는 법을 배운다. 그것을 “패싱”이라고 한다.


(-)


모욕은 젠더 수호자가 쥔 채찍 중 하나다. 모욕은 사실상 문화의 모든 층위에서 승인된다. 사람들은 트랜스젠더를 비웃을 수 있다. 그러나 젠더 연기(portrayal of gender) 때문에 모욕을 당하리라는 두려움이 전혀 없을 때, 문화가 통제권을 휘두를 기회는 줄어든다.


(-)


우리는 모욕에 신경 쓰라고 배운다. 왜냐하면 모욕은 문화의 다른 채찍인 폭력으로도 집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폭력 때문에 모욕의 공포로부터 초연하기란 마음먹은 것 이상으로 어렵다.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잘 숨던가, 얻어맞던가 둘 중 하나다. 자살을 시도할 수도 있다. 아니면 웃는 법을 배울 수도 있다. 사실 웃을 기회는 꽤 있다. 공포가 그 기회를 가렸을 뿐이다.

많은 문화권에서 모욕의 공포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킨 사람은 광대, 바보, 익살꾼 그리고 마술사들이었다. (-)


아인슈타인처럼 위대한 바보는 상식과 보통 사람들이 외경하는 잣대를 의심한다. 이 의심으로 인해 그들은 우주와 시간에 대한 혁명적인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위대한 바보는 일상의 쳇바퀴 바깥에 머무르며 매 순간의 경이로움에 열려 있다. 현재의 지식에 만족하는 우리야말로 멍청한 이들이다. 우리는 기적 같은 창조의 율동을 당연하게 여긴다. 그러나 바보는 계속해서 처음 순간을 본다. 위대한 바보의 폭로는 자주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깨우쳐 준다.


바보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그들은 대부분의 규칙을 따르지 않고 비웃어 버림으로써 우리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 또한 농담거리로 삼을 수 있게 한다. 어떤 것을 다른 것으로 바꿔 치는 그들의 장난에 불안감과 불신이 생기고 이것이 문화에 각인된 거짓을 볼 수 있도록 해 준다. 바보는 단순하고 순수한 지혜를 갖고 있다. 이는 귀중한 것으로, 이 문제투성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유용하다.



(-)


수술실에 들어가자 마취 간호사가 주사를 한 방 더 놓더니 100부터 거꾸로 세어 보라고 했다. 난 96까지 세었고 그다음 죽었다.

수술 도중에 한 번 깼다. 한때는 내 왼쪽 고환이던 데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마취약이 더 투여되고, 난 다시 죽었다.

아주 어렸을 땐 매일 밤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여자애가 돼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기도 끝에 “전 이제 잠자리에 눕겠습니다...”를 덧붙이곤 했다. 병원 침대에서 죽음에서 깨어나면서 어린 시절 기도가 이루어졌음을 깨달았다. 난 타로 덱에서 무작위로 카드 한 장을 뽑았다. 성배(Ace of Cup). 행복을 뜻한다.


순간적이기도 하고 영원하기도 한 시간 동안 죽음과 재탄생을 오가면서, 샤먼은 신성한 영혼이 준 진실의 일부를 이 세상으로 가져온다. 그것은 광대한 우주적 진리의 바다에서 가져온 모래 한 알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샤먼이 다른 이들에게 진실을 말해 줄 때만 진실의 모래를 간직할 수 있다. 만일 샤먼이 그 진실의 모래를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데 실패하면, 영혼에 의해 미쳐버릴 것이다.

별 것 없는 내 삶에 이런 이야기가 잘 들어맞는다는 걸 깨닫기 전에는 이런 얘기들이 꽤 아리송하게 들렸다. 나는 수술대에서뿐 아니라 내 정체성의 핵심적인 부분에서도 죽음이나 다름없는 경험을 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났다. 문화적으로 용인되는 범위의 경계를 벗어난 곳에 틈새 공간(in-between place)이 존재한다는 것이 내가 그 경험에서 깨달은 진실이다. 

하지만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나는 나와 같은 사람들은 침묵해야 하는, 트랜스섹슈얼이라는 걸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진실을 드러내지 말아야 하는 세상에 태어났다. 이런 세상은 치료를 빙자해 우리를 침묵시키고 거짓말하게 한다. 그로 인해 결국 우리는 미치게 될 것이다. 숨기고, 패싱하고, 침묵한 채로 있느라 미쳐 버린다. 실로 침묵은 곧 죽음이다. 이 원칙은 문화가 침묵해야 한다고 명령한 모든 상황에 적용된다. 그러므로 죽음/재탄생의 상황에 있는 모든 샤먼의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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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태어난 샤먼이 세계로 들어가 진실의 일부를 말하기 시작하는데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거나 들으려 하지 않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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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이 진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만들 방법을 알아내는 건 샤먼이 할 일이다. 당신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만큼이나 진실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이 말했듯이, 어떤 매체를 선택하는지가 메시지 그 자체만큼이나 메시지를 전달한다. 따라서 형식은 내용만큼 중요하다. 문화 자체가 받아들이기 쉬운 진실의 공연(performance)이거나 배우기 쉬운 진실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문화를 이해한다. 샤먼은 문화가 자신의 진실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문화와 소통하며 문화를 상대로 진실을 공연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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