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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무선)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86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정아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12월
평점 :
폭풍의 언덕을 처음 만난건...작고 발랄하던 초딩 때다. 주말에 한번, 한번에 세 권의 책을 빌려오던 어린이 도서관에서 빌려봤던 책. 저학년이 읽기엔 너무 어려워 보였던 고학년용 도서 사이에서 어찌하다 내 손에 굴러들어온 책. 일주일 내내 그 책을 읽으며 눈물 콧물 다 짰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어린 내겐 캐서린과 히스클리프의 사랑이 가슴이 미어질듯이 서러웠다.(아마도 어린이용 도서로 각색된 책이었던듯) 언젠가 스물다섯이 넘으면, 연애라는 걸 한번이라도 경험하고 난 후에, 다시 읽어봐야지! 하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막연하고 아득한 결심이었다.
정신없이 졸업하고 수험생을 거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잊고 지냈던 추억의 '폭풍의 언덕'에 다시 손을 대게 된건 민음사세계문학전집을 필두로 출판사마다 깜찍한 전집을을 출판하면서 부터였다. 뭔가 '고전' 스러운 것을 찾던 내게 어린 시절 기억이 다시 찾아왔다. 아, 이건 읽어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디자인이 제일 예뻤던 문동 책을 골라서 읽게되었다.(아, 소녀감성!) 어린시절의 기억들...캐서린과 히스클리프를 필두로 힌들리, 헤어턴, 넬리 등등 친근한 이름들이 기억속에서 떠올랐다. 단순히 스토리 라인만 콘크리트 철근 처럼 남아있었는데, 다시 살이 입혀진 멋진 건축물처럼 변해가는 느낌들이 읽는 내내 나를 행복하게 했다.
부러울만큼 지독한 사랑을 하는 히스클리프. 악마같은 그에게 캐서린의 존재는 생명수였다. 어쩌면 언쇼 씨가 그를 폭풍의 언덕으로 데려온 그 순간부터, 운명처럼 시작되었을지도 모를 그에겐 생명같은 사랑. 치열한 복수를 일삼는 히스클리프에게 그나마 따뜻한 애정을 줄 수 있는건 그의 행위들이 모두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간단한 사실 떄문이다. 사랑, 사랑은 참 모든 행동들을 깨끗하게 포장해 줄 수 있는 것 같다.
자신을 배신하고 린턴과 결혼해 버린 캐서린에 대한 복수심은 그를 치열한 악마로 만들었다. 린턴의 동생 이사벨라를 꾀어 내 결혼한 뒤 그녀를 불행의 나락으로 몰아내었고, 힌들리의 아들 헤어턴을 하인처럼 대하는가 하면 자신의 아들과 린턴의 딸을 결혼시켜 그의 재산을 모두 자신은 손아귀에 거머진다. 캐서린이 죽은 뒤 어쩔 수 없을 상실감을 그는 복수심으로 채우려던 그는 마치 캐서린을 만나는 듯한 기이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난다.
사랑을 위해 죽을 수 있다고 말하던 20대 초반의 열정은 이미 물건너 갔음에도, 사랑때문에 '죽는' 히스클리프의 모습은 뭔가 솔직해 보인다. 조금 부럽기도 하다. 그의 모든 행동의 근원에는 '사랑'이 심겨져 있으니까. 이 책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멋져지는 건 아마도 우리는 점점 사랑만을 이유로 행동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정말 매력적인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