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객체 없는 세계


20세기 초 야수파를 탄생시킨 앙리 마티스. 색채가 거칠고 강렬해서 '야수'라는 이름이 붙었다. 색채의 마술사 마티스는 여러 '춤 연작'을 그렸는데 그중 1910년 작품은 단 세 가지 색과 형태만으로 넘치는 흥을 표현한다. 둥근 하나의 형태, 이상적인 인체 비례가 아닌 사람들의 연결. 명암도, 원근법도 없다. 색과 형태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역동성이 극대화한다.


색채와 형태의 조화 ━ 미술사에서 마티스의 작품을 논할 때면 따라오는 평가다. 색채의 양감(덩어리)은 마티스 화풍의 핵심이다. 말년에 관절염으로 붓을 쥘 수 없게 되자 색종이와 과슈로 꼴라주를 만들어 그림 철학을 극한으로 표현했다. 흥미롭게도 인류학자 팀 잉골드는 <춤>의 역동성을 만드는 요소로 선lines에 주목한다. 사람들의 형태는 덩어리의 집합이 아닌 둥근 '문양'이다. 닳을 듯 말듯 뻗은 팔은 선의 요소다. 선의 끝에는 매듭이 있다. 손이다. 마주하는 손, 맞잡은 손은 선들의 얽힘, END가 아닌 AND다. 마티스의 <춤>은 "뒤얽힌 선들의 화환이며 따라잡고 따라 잡히는 소용돌이"다.


땅을 딛고 둥근 문양을 만드는 마티스의 춤. 거대한 리듬이자 다양한 매듭으로 묶인 하나의 세계. 이 하나의 세계를 분명하게 설명하는 것이 인류학의 과제라는 잉골드는 선학linealogy이라는 독자적인 방법론을 정립한다. 한 다발의 선들이 이룬 거대한 그물망meshwork의 세계에서 객체는 그저 존재하지 않는다. 사물은 '발생'하며 선을 통해 나아간다. 선들의 조응에서 다양한 매듭이 생기고 이렇게 객체 '없는' 세계가 형성된다.


잉골드는 인식 주체를 배제하는 그레이엄 하먼의 객체 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을 "화석의 우주"라고 표현한다. 일체의 환원을 거부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며 대신 객체 없는 세계World Without Object 개념을 제시한다. 존재의 세계, 객체 vs 유기체. 하먼의 OOO도 제대로 이해 못하는 처지라 여기서 딛고 나아가는 WWO도 머리에 쏙 들어오지 않는다. 사변적 실재론이라는 거대한 맥락 속 아리송의 향연이지만, 하먼과 잉골드 모두 세계를 파악하는 데 예술의 역할을 역설하는 점은 분명하다. 더 확장하면 두 지성 모두 사회학적, 미학적 맥락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는 반反학문에 뜻을 모으는 듯하다. 직서주의에 반하는 '기이한 형식주의'를 제시하고(하먼) 여러 매듭이 엮인 '하나의 분명한 세계'를 설명하는 일(잉골드).


인류학은 지식을 요구하는 게 아니다. 세상의 관계 속으로 뛰어들어 그 관계의 망을 우리의 인지 영역에 비추는 작업이다. 감각을 다시 깨우고 존재의 내부로부터 앎을 얻는 행위는 예술의 역할에 다름 아니다. 인류학의 미래는 예술과 현대 과학의 융합에 있다는 잉골드는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별한다. 과학은 다양한 지식의 패치워크지만 과학주의는 교조주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잉골드의 인류학(선학)을 비롯한 예술-과학의 관계 인식은 수전 손택의 목소리와도 겹친다.


손택은 말한다. 예술이 사회를 살아가는 삶의 방식과 분리될 수 없는 것처럼 과학과 기술 역시 예술과 분리될 수 없으며 새로운 감각을 혼합하는 예술은 과학이 실험적이라는 의미에서 실험적이다. 예술은 새로운 양식의 감수성을 조직하는 도구다. 감각을 혼합하고 새로운 양식의 감수성을 '조직'한다는 것은 잉골드가 말하는 선학으로 보아도 좋지 않을까. 감각의 매듭을 짓고 새로운 선으로의 펼침. 다시 짓고 또 펼치기.



📖

새로운 감수성은 대담할 정도로 다원적이다. 이 감수성은 고통스러울 정도의 엄숙함뿐만 아니라 재미, 재치, 향수에도 몰두한다. 또한, 이 감수성은 역사를 지나치게 의식하기도 한다. 새로운 감수성의 열정은 이곳저곳으로 신속히 퍼져 나아갈 뿐 아니라, 난리법석을 떨며 모든 것을 엄청난 속도로 집어삼킨다. 이 새로운 감수성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는 기계, 수학 문제를 푸는 방법, 재스퍼 존스가 그린 그림, 장-뤽 고다르의 영화, 비틀즈의 음악과 개성, 이 모든 것들을 모두 아름답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수전 손택, <해석에 반대한다> | 《하나의 문화와 새로운 감수성》 중에서



'예술하기'는 과학의 실험만큼 실험적일 수 있다. 태초 이래 정립된 작품 vs 감상자라는 미학적 관계는 물론 미학의 정의마저 전복하려는 시도. 야수적 색채를 아우르는 선으로 마티스의 <춤>을 바라본다. 닿을 듯 말 듯 닿지 않는 손에 눈이 간다. 잉골드는 댄서들의 조응을 메를로퐁티의 '세계의 살flesh'로 읽어낸다. 피부와는 또 다른 살 개념이 (역시나) 머릿속에 쏙 들어오지 않지만, 이를 보는 것과 보여지는 것 사이 매질을 통한 상호침투로 이해한다면 괴테의 태양과 고흐의 밤하늘이 그렇듯 "나는 춤의 의식이다."* 저 손의 간극은 무엇이 됐든 언제나 현재다. "삶이 계속되는 한 끝단은 언제나 풀려 있을 수밖에" 없기에.


* 폴 세잔 "풍경이 내 속에서 자신을 생각한다. 나는 풍경의 의식이다." 

Le paysage se pense en moi, et je suis sa conscience.




— 선의 삶


선의 삶the life of lines은 종착지가 없는 흐름이다. 사이between와는 다른 사이-안in-between이다. 최악의 현학적 표현이라는 잉골드의 고백처럼 언어로는 온전히 설명 불가능한 선의 삶은 한국어 동음이의어인 선Zen만큼이나 알쏭달쏭하다. 불완전하나마 이해하면 분절과 접합의 '사이'가 아닌 운동 속에서 물질을 모으는 행위, 마치 뜨개질, 바구니 짜기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며 생성과 소멸을 만드는 행위가 '사이-안'이다. 삶은 대기에서 사이-안으로 짜이는 그물망이다. 이것은 주체도, 객체도, 주체-객체 잡종도 없이 오직 동사만 있는 사이-안에서 한가운데의 흐름으로 살아지는 하나의 내재적 삶이다(288). 


인간은 무언가 되어가고 있으며 그 전진과 함께 자신을 창조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작가 — 자기 삶의 작가로 꿈과 희망이라는 소실점을 좇을 운명에 놓인 — 다. 모든 상상하기는 기억하기라고 잉골드는 말한다. 과거는 언제나 바로 일어난 현재이며 미래는 지금 일어나는 순간이다. 과거는 지나지 않았으며 미래는 오지 않는다. 삶은 언제나 과거와 미래 사이-안 지점에서 일어난다. 좌표와 좌표를 건널 때마다 기억-상상의 선이 생긴다. 자신이 걷는 방식으로 걷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잉골드의 표현처럼 작가 자신의 창조 방식대로 삶은 나아간다. 삶의 창조는 고정되지 않는다. 따라서 작가의 창조는 간헐적이며 순간순간 일어난다.


나아감으로써 끊임없이 선을 그리는 일은 요가 수련을 떠오르게 한다. 요가에서 자세(아사나)를 행하는 것은 하나의 자세를 완성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그 자세를 만드는 과정의 연속이다. 나무 자세는 누구에게나 그늘과 열매를 내어 주는 나무의 관대함을 기억하고 상상하며 몸으로 그리는 과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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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요가 자세들을 미학적으로 완벽하게 성취하는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따로 있다. (...) [요가 수련으로] 몸을 자세에 맞추는 것이 아닌, 자세를 몸에 맞게 이용하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 요기는 성취를 위해 요가를 수행하지 않는다.

클레망틴 에르피쿰, <요가, 몸으로 신화를 그리다> 중에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삶의 미궁으로 기꺼이 뛰어들어 방랑과 도주도 마다하지 않을 용기가 있다면 우리는 선의 그림을 그리고 선의 음악을 지을 수 있을 것이다. 미학적으로 완벽한 요가 자세란 없듯 각자의 리듬으로, 붓질로, 또 다른 선에 조응하며 주체-객체, 실행-제작, 능동-수동의 이분법이 아닌 상호침투의 그물망에서 하기-겪기를 이어 나간다. 관계의 창발. 그 사이-안에서 인간은 언제나 되어가는 존재, 동사다.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말처럼 인간은 무엇이 되고 있는지 해결해 나가는 존재라는 것. 그리고 그 결말(혹은 목표)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다. 아직은 아니다. 삶이 있는 한 소실점은 사라지지 않는다. "선의 삶은 계속되어야 한다".















모든 것이 경제 논리로 수렴하는 세상에서 '인간'의 조건을 성찰하고 철학의 근본을 묻는 일은 중요하다. 정답을 찾는 것이 아닌 답을 찾는 과정, 매듭을 짓고 그물망을 펴는 손쉬운 방법은 독서다. 이비의 책들이 좋은 길라잡이가 돼주었다. 현상학에서 사변적 실재론, 선학에 이르기까지, 난해하지만 흥미로운 관점으로 가득한 현대철학의 풍경을 따라 또 다른 창을 열고 싶은 이들에게 권한다. 하나의 무한 그물망 짓기를 함께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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